[묵상글]

여호와를 의지하리로다

전봉석 2018. 1. 13. 07:29

 

 

 

아모스가 아마샤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선지자가 아니며 선지자의 아들도 아니라 나는 목자요 뽕나무를 재배하는 자로서 양 떼를 따를 때에 여호와께서 나를 데려다가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기를 가서 내 백성 이스라엘에게 예언하라 하셨나니

아모스 7:14-15

 

새 노래 곧 우리 하나님께 올릴 찬송을 내 입에 두셨으니 많은 사람이 보고 두려워하여 여호와를 의지하리로다

시편 40:3

 

 

 

내가 나서서 주의 일을 한다고 해서는 안 된다. 반대로다. 주가 이끄셔서 임의로 나를 주장하시는 게 옳다. 내가 나를 알지만 내 죄악이 쉴 새 없고 그것으로 나는 혼미할 지경이다. 오늘 시편의 고백도 그러하다. “수많은 재앙이 나를 둘러싸고 나의 죄악이 나를 덮치므로 우러러볼 수도 없으며 죄가 나의 머리털보다 많으므로 내가 낙심하였음이니이다(시 40:12).” 모르겠다. 가끔 아내에게 나의 속내를 드러내면 아내는 놀란다. 수시로 드는 생각이 늘 악하다. 누구를 향한 비난과 불평이 가득하다. 툭, 하면 원망이 인다.

 

나의 죄악이 나를 덮치므로 우러러볼 수도 없다. 죄가 나의 머리털보다 많다. 나는 날마다 낙심한다. 그러므로 “여호와여 주의 긍휼을 내게서 거두지 마시고 주의 인자와 진리로 나를 항상 보호하소서(11).” 이와 같은 기도가 매순간 절실한 까닭이다. 그저 '나는 목자요, 뽕나무를 재배하는 자인데' 주께서 나를 데려다 말씀을 전하게 하신 것이다. 늘 하면 할수록 나는 할 수 없습니다, 하는 고백만이 나오는 이유다. 나 같은 게 무슨, 싶은 열패감이 아니다. 아랑곳하지 않고 하나님이 이르시는 것이다. 내 백성에게 예언하라. 내 양을 치라. 먹이라.

 

안 할 수 있으면 지금이라도 안 하고 살고 싶은데. 그저 나 혼자 어디 멀리 숨어서 지난 날의 죄악은 물론 수시로 이는 죄악들에 덮쳐나지 않게 빌고 또 빌면서. 그런데 말씀은 그것까지도 내가 나를 의지하려는 것임을 지적하시면서, “새 노래 곧 우리 하나님께 올릴 찬송을 내 입에 두셨으니 많은 사람이 보고 두려워하여 여호와를 의지하리로다(3).” 내게 두시는 말씀으로 주를 의지하게 하시는 것이다.

 

나는 아마샤인가 아모스인가. 내가 나서서 하려 할 때와 주가 끌어다 세우시는 것과는 다른 것이다. 그게 그거 같고, 결국은 같은 데서 나는 것 같으나 내용이 다르다. “주께서 내 귀를 통하여 내게 들려주시기를 제사와 예물을 기뻐하지 아니하시며 번제와 속죄제를 요구하지 아니하신다 하신지라(6).” 거짓과 위선을 가름하기란 너무 어렵다. 한 때 일 년 반 정도 ‘아이들 때문에’ 다녔던 서초동 모 교회가 결국 1, 2심 판결에 이어 대법원 판결을 남기고 있다. 도로를 불법 점유하여 성전을 지었다는 것이다.

 

땅값 얼마, 공사비 얼마, 철거 보수비 얼마, 하는 기사를 읽으면서 혀를 내둘렀다. 몇 천억 원을 그렇듯 교회 건물을 짓는데 사용하고 이를 무슨 대단한 공로로 치부하며 강단에서 선포되고, 그러느라 편법을 동원하면서까지 무리하게 교회를 건축하더니 급기야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이래저래 마음이 좋지 않은 하루였다. 전날에 딸애에게 뭐라 한 것 때문에도 어떤 회의가 또 불안이 엄습하고 있던 중에 이러한 보도를 보니까 가슴이 답답하였다.

 

도대체 누가 그 큰 성전을 원하고 호화롭고 더 화려하게 100년의 한국 교회 역사를 빛내라고 했단 말인가? 저는 아마샤냐 아모스냐? 두려운 마음뿐이다. 단지 그것이 어느 특정 교회 하나의 이야기로 그치나? 당최 나는 잘 모르겠다. 정치적이며 행정적인 목사들의 업무에 대해 또는 그로 인해 번잡스러운 목회 일선의 바쁨 주의보에 대해. 그러저러한 마음을 정말 하나님이 주신 것인지 아니면 충동하는 자가 교묘히 들어와 떠벌여놓은 것인지. “그 때에 내가 말하기를 내가 왔나이다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이 두루마리 책에 있나이다(7).”

 

말씀만을 붙든다. 나는 확신하기를 다 허물면 어떠나? 모두가 떠나면 어떠나? 다 잃는다 해도 어떠나? ‘나를 가리켜 기록한 말씀이 내게 있나이다.’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즐기오니 주의 법이 나의 심중에 있나이다 하였나이다(8).” 주의 뜻이라 하면 주가 행하시도록 주가 이루어 가시는 일에 묵묵히 따라 준행하는 것. 도대체 누가 그처럼 제사를 원하고 제물을 원하고 수천억 원의 돈을 들여 어마 무지막지한 성전을 건축하여 봉헌하라고 했던가? 그것이 천년을 가나 만년을 가나?

 

나도 모르게 어떤 슬픔이 또 울분이 터질 것 같았다. 나는 개인적으로 옥한흠 목사를 존경한다. 어쩌면 내가 가장 상하고 터져 망가져 있던 영혼의 시절에 두 아이 핑계로 주일마다 그 교회로 가게 하셨던 것도 그래서일까? 설교가 참 달다. 깊고 오묘하여 빠져든다는 느낌. 저와 함께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오며 악수를 하고 인사를 건넨 적이 몇 번 있다. 어떤 끌림과 홀림이 결코 저의 것이 아닐 거였다. 그렇게 일 년 반 이 년 남짓 주일아침이면 그 혼잡한 서초동까지 출석하던 시절이 가물가물하면서, 마음이 어려웠다.

 

주가 내게 보이신 것이 무엇인가? 나는 아마샤인가 아모스인가? 오늘 말씀은 내게 묻는 것 같다. 딸애가 교회 사역에 대해 진지하게 담임 목사에게 메일을 보낸 모양이다. 뜻밖에 담임목사가 자신이 다 이해하고 책임져줄 테니, 오늘 와서 이야기하자고 달래더란다. 나도 모르겠다. 저마다 다 자신들의 생각과 가치와 기준이 있을 것인데. 그저 나는 ‘목동에 뽕나무나 재배하던 이’였는데 불러다 말씀을 떠안기신 것이니. 내가 할 수 있는 게 무엇이겠나. “내가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귀를 기울이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도다(1).”

 

기다리고 귀를 기울이고 부르짖는 것만이 내 일이라. 어깨가 아파서 설교원고를 작성하다가 여러 번 멈추어 늦어졌다. 두 시께 중2 아이가 와서 글을 쓰고, 그러는 동안 나는 간신히 탈고를 하였다. 뒤미처 다섯 시께 아이가 하나 더 와야 하는데, 어디 캠프를 다녀와서 좀 쉬고 싶다고 연락을 주었다. 비로소 소파에 누워 허리를 비틀었다. 그리고는 한 삼십 분 곤하게 잠에 떨어졌다. 한결 몸이 가벼워졌다. 주보를 만들고 물걸레질까지 마치니 하루 일과가 끝났다.

 

딸애의 귀가가 늦어져 아내와 둘이 가정예배를 드렸다. 읽는 말씀마다 위로가 되었다.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습 3:17).” 읽으면서 울컥하였다. 그럼 됐지 뭐! 이것으로 충분하지 않나! 다 잃고 다 망치고 다 허망하였다 해도, 그는 나의 전능자시라. 주께서 나로 말미암아 기뻐하신다니. 그 기쁨을 이기지 못하실 정도라니.

 

나를 잠잠히 사랑하시기를 나로 말미암아 즐거워하시고 기뻐하신다는. 감격하였다가 송구스러웠다가 죄송하였다가 그저 면구스럽기만 하였다가. 하는 것도 없는 사람이라 내가 무얼로 주를 기쁘시게 할 수 있으려나? 이뤄온 것도 없고 늘 번번이 빈주머니 뿐인데도, 나로 인하여 기뻐하시고 즐거워하신다니! 나의 기도는 울먹거렸고 간절하였다. 내 몸 하나 지탱하고 살기가 고달플 따름인데, 누굴 염두에 두고 무엇을 마음에 품어 주께 아뢰고 고한들.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고후 4:17-18).” 나는 이와 같은 말씀 앞에서도 민망할 따름이다. 정말이지 하는 것도 없이 늘 마음엔 머리털보다 많은 죄악뿐인데. 수시로 이는 근심과 걱정은 말할 것도 없고 누구를 향해 무엇을 보고 찧고 빻고 욕을 하고 비난하기 일쑤인데. 그러는 자가 차마 나의 오늘의 고달픔을 환난이라 할 수나 있겠나.

 

너무 보잘것없어, 도무지 내세울 게 없어서 머리도 들지 못할 지경인데 과연 내가 감히 주목하여 보이지 않는 영광의 영원함을 바라도 될 것인지. 나는 결코 내 문제 하나도 해결할 수 없다. “우리를 도와 대적을 치게 하소서 사람의 구원은 헛됨이니이다(시 60:11).” 무엇으로 나를 도울 것인가?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용감하게 행하리니 그는 우리의 대적을 밟으실 이심이로다(12).” 주를 의뢰하고 주 앞에 송구하나 주의 긍휼하심만을 바라고 구하는 길밖에. 내 안에 이는 두려움에 대하여는 주께 고함이라.

 

“보라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시라 내가 신뢰하고 두려움이 없으리니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며 나의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심이라(사 12:2).” 아이의 사역문제도 또한 저가 사귀는 교제문제도 또는 모 교회의 난처한 상황에 대해서도 나는 무엇을 어찌 구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늘 엉거주춤하여 어렵기만하다. 무엇이 옳은지 몰라 말씀 앞에만 서자. 말씀만으로 붙들자. 스스로에게 이르고 다짐한다. 애들을 안타까워하고 사랑하되 그것이 목표는 아니다. 주가 맡기신 교회가 소중하고 귀하나 그게 또한 목표도 아니다.

 

교회가 없어 교회를 하나 더 두신 게 아니라면, 목사가 부족해서 목사를 하나 더 세우신 게 아니라면. 나는 다만 나를 향해 가리키는 두루마리의 말씀만으로 족한 것이다. 다 잃어도, 다 망가지고 오히려 모든 게 수포로 돌아간다 해도, 내가 공들여서 될 일이 아닌 것이다. 다 저녁에 초딩 4학년 아이들 셋이 장난처럼 들렀다 갔다. 주일에 보자, 하고 일렀으나 아이들은 거드름을 떨 듯 봐서요! 됐어요! 하고 내뺀다. 저들끼리 낄낄거리며 후다닥 도망치듯 사라졌다. 어떤 역겨움이 내 안에 이는 것이다. 내가 공들여 내 몸 하나 건사할 수나 있나?

 

오직 주만 바라기를.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하게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롬 8:20).” 주가 하시지 않으면 나는 나조차 감당이 안 됨을.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26).” 성령이 친히 나를 이끌어 오늘에 두시는 것이라면 이루시고 다지시며 세워 가시는 이도 하나님이신 것을. 살면서, 살아서, 가장 큰 나의 즐거움이 무엇이겠나?

 

송구하고 염치없을 따름이지만,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습 3:17).” 내가 살아서 사는 날 동안 주께 그러하였으면. 나로 잠잠히 사랑하시며 나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는, 주님 앞에 나의 처신은 무엇이겠나? 주의 도우심을 바라고 구하는 것뿐. 주의 인자하심과 긍휼하심만을 의뢰하는 것.

 

“나는 가난하고 궁핍하오나 주께서는 나를 생각하시오니 주는 나의 도움이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라 나의 하나님이여 지체하지 마소서(시 40:17).”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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