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 할지어다
아모스 5:24
속히 나를 도우소서 주 나의 구원이시여
시편 38:22
아이의 말에서 또는 표정이나 행동에는 ‘어떤 결핍’이 보인다. 누군 너무 얌전하고 누군 너무 나댄다. 누군 자기밖에 모르고 또는 지나치게 남을 의식한다. 어떤 아이는 유난히 밉상인데 하는 짓마다 얄밉고, 어떤 아이는 부끄러움이 많아 병적으로 얌전하다. 꼬맹이들과 연속으로 두 팀, 수업이 있었다. 생활문 쓰기를 가르치느라 우리 생활에 대해 설명하는데 각자 나서서 할 말이 더 많았다. 수업을 마치고 느닷없이 한 아이엄마가 들어와 주차권을 달라고 하였다. 얼결에 주긴 하였는데 알고 보니 어느 아이의 엄마였단다.
저이는 눈도 못 마주치고 어수룩하였다. 지하주차장에는 다른 아이엄마가 있었는데, 늘 저이는 붙어 다니며 시키는 대로 한단다. 그러고 보니 그래서 아이들 사이에서도 그러저러했구나! 유난히 늦되고 혼자 웅얼거리던 아이는 옆에 아이의 눈치를 보며 그리 자꾸 따라하던 게, 어울려 다니며 술 담배를 즐기고 아이들 앞에서 거침없이 패악을 떠는 엄마들의 그것과 다르지 않았다. 아이는 엄마를 흉내 내고, 옆에 아이는 뒤에 아이가 말하는 대로 관심을 끌려 애를 썼던 것이다.
하나님과 상관없이 사는 생활의 피폐함에 대하여 나는 종종 목격한다. 한데 그보다도 하나님과 상관있이 사는 삶이면서 그 외골수적인 모습도 종종 본다. 어느 게 더 나은지에 대해 나는 말할 수 없다. 오히려 하나님과 상관없이 사는 이의 그러저러함은 그럴 수밖에 없으려니 싶어 안됐고, 나름 하나님과 상관있이 군다고 사는 데 따른 모습에서는 어떤 알 수 없는 연민도 느껴진다.
오늘 본문에서 나는 그에 따른 헛됨을 묵상한다. “너희는 살려면 선을 구하고 악을 구하지 말지어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의 말과 같이 너희와 함께 하시리라(암 5:14).” 그러니 저들은 벧엘을 찾고 브엘셀바로 모인다. 길갈에서 행하여 여호와의 날을 바란다. 한데 저들은 “정의를 쓴 쑥으로 바꾸며 공의를 땅에 던지는 자들”이다(7). 그리고는 “힘없는 자를 밟고 그에게서 밀의 부당한 세를 거두었은즉 너희가 비록 다듬은 돌로 집을 건축하였으나 거기 거주하지 못할 것이요 아름다운 포도원을 가꾸었으나 그 포도주를 마시지 못하리라(11).”
바라는 것과 실제의 생활이 다른 것이다. 아이들에게 생활 속의 이야기를 글로 쓰려고 할 때 종종 두려움이 앞설 때도 있다. 그러면 평소에 외면하고 스스로 회피했던 것과도 마주해야 하는데, 이를 글로 가져온다는 일은 쉽지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나름의 믿음이 더 무섭다는 생각을 종종 한다. 자신이 믿는 그 믿음을 믿음으로 확정짓고 사는 사람들이 때로는 무섭다. “너희는 살려면 선을 구하고 악을 구하지 말지어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의 말과 같이 너희와 함께 하시리라(14).” 그 선과 악의 기준을 자신의 판단과 사회적인 안목으로 가져다 실천하려니까 말이다.
성경은 이를 바로 잡으신다. “너희는 악을 미워하고 선을 사랑하며 성문에서 정의를 세울지어다(15).” 그래서 벧엘에 모이고 브엘셀바를 찾아 나름의 수고를 낙으로 삼으려 하는 것이다. 이는 마치 “마치 사람이 사자를 피하다가 곰을 만나거나 혹은 집에 들어가서 손을 벽에 대었다가 뱀에게 물림 같도다(19).” 형식적인 또는 그 도식적인 자기만족의 삶에 대하여, “내가 너희 절기들을 미워하여 멸시하며 너희 성회들을 기뻐하지 아니하나니 너희가 내게 번제나 소제를 드릴지라도 내가 받지 아니할 것이요 너희의 살진 희생의 화목제도 내가 돌아보지 아니하리라(21-22).”
그러니 그저 자기가 하는 행위로 만족하는 것을, 누가 뭐라 한들. “네 노랫소리를 내 앞에서 그칠지어다 네 비파 소리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라(23).” 두려운 마음으로 말씀 앞에 앉는다. 누구를 생각하고 또는 안 믿는 아이엄마들과 그 아이들의 허접함에 대해 꼬집어 말하려는 게 아니다. 나는 생각이 많았고 그래서 싫기만 하던 아이들에게 엉뚱하게도 마음이 갔다. “오직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 할지어다(24).” 분명 이것은 내 마음이 아니다.
나는 아이들로 수고롭고 짜증스러워서 겨울방학 동안만 특강으로 한다는 생각이지만, 아이의 어눌함이 또는 함부로 구는 행동이 그 안쓰러움에 대하여, 공의를 강 같이 흐르게 할 것이라! 그래서 예수님이 말씀하셨구나.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요 7:38).” 그 비결은 너무도 간단하였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사실은 억지로 맡은 거여서, 것도 겨울방학 동안 딱 4회만 해주기로 했던 것인데. 그 얄밉고 천방지축이면서 자기 멋대로 구는 아이들을 눈여겨보게 하시더니 급기야 그 아이엄마를 보게 하시고, 그렇듯 하나님과 상관없이 사는 이의 열악함에 대하여 마음에 두고 기도하게 하시려고. 오후께 그와 대조적으로 나름들 하나님과 상관있이 산다고 사는 이의 황량하고 바쁜, 그러나 적당한 거리에서 거기까지만 바라는 삶에 대하여도 다를 게 없음을. 오히려 이를 더 불편해하시고 진노하시는 것을 말씀이 들려주신다.
“너희가 사십 년 동안 광야에서 희생과 소제물을 내게 드렸느냐(암 5:25).” 아, “너희가 너희 왕 식굿과 기윤과 너희 우상들과 너희가 너희를 위하여 만든 신들의 별 형상을 지고 가리라(26).” 그게 더 고역이겠구나! 나름의 수고와 애씀이, 한다고 하면서 스스로 여기는 만족함에 대하여 하나님은 진노하심이었다. 다른 것 필요 없다. “오직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 할지어다(24).” 누가 언제 벧엘로 브엘셀바로 또는 길갈로 길을 잡아 거룩을 도모하라고 하셨던가!
나는 황급히 주 앞에 앉는다. “속히 나를 도우소서 주 나의 구원이시여(시 38:22).” 내가 누굴 뭐라 하려던 게 아니라 늘 번번이 그게 나였음을 고백한다. 제 몸 하나 건사하는 것으로 그 수고가 엄연한 사람이라. “내가 넘어지게 되었고 나의 근심이 항상 내 앞에 있사오니 내 죄악을 아뢰고 내 죄를 슬퍼함이니이다(17-18).” 주께 고하고 바라는 길밖에.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나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암 5:4).” 주를 찾지 않고는 길이 없다.
가정예배를 드리며 아내에게서 아이들에 대해, 그 엄마들의 면면을 소상히 전해 들으면서 ‘아, 그래서 그랬구나.’ 하는 아이에 대한 이해와 관심을 새삼 주께 구하였다. 그래서 말씀을 적어야 한다. 묵상을 써야 한다. 기도를 메모해야 한다. “여호와께서 내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는 이 묵시를 기록하여 판에 명백히 새기되 달려가면서도 읽을 수 있게 하라(합 2:2).” 같이 말씀을 읽는데 그 확신이 더해졌다. 말씀이 아니고는 단 한 시도 살 수 없다는 것에 대하여,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반드시 응하리라(3).”
설마, 하고 방심할 때라. 에이, 하고 회의할 때라. 그 정한 때가 있나니 속히 이를 것이다. 누구 이야기가 아니라 내 이야기다. 너무 막연하여서 때론 더디고 때론 무모한 것 같아도 지체되지 않고 응할, 반드시 응할 것이다. 저녁에 같이 읽었던 말씀을 통해 내 안에 두시려는 말씀이 무엇인가 알 것 같았다.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세상에 가득함이니라(14).” 이처럼 주를 인정하는 것이 온 세상에 가득하여질 때가 오나니. 곧 방주의 문이 닫히기 전에, 더는 어찌 손도 써볼 수 없는 ‘롯의 처를 기억하라.’
마음이 서늘하여졌다. 두려움이 드는 것은 나만 그런가. “화 있을진저 여호와의 날을 사모하는 자여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날을 사모하느냐 그 날은 어둠이요 빛이 아니라(암 5:18).” 아, 이는 “마치 사람이 사자를 피하다가 곰을 만나거나 혹은 집에 들어가서 손을 벽에 대었다가 뱀에게 물림 같도다(19).” 방심하였을 때라. “여호와의 날은 빛 없는 어둠이 아니며 빛남 없는 캄캄함이 아니냐(20).”
그러니 어쩔 것인가? “여호와께서 내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는 이 묵시를 기록하여 판에 명백히 새기되 달려가면서도 읽을 수 있게 하라(합 2:2).” 공연한 당부가 아니시다. 준엄한 명령이시다. 두려운 마음으로 주 앞에 앉는다. “여호와여 주의 노하심으로 나를 책망하지 마시고 주의 분노하심으로 나를 징계하지 마소서(시 38:1).” 그리하여 나로 하여금 평안을 허락하시기를. 바로 두려워할 줄 알 때 온전히 감사함도 풍족한 것이다. “내가 들었으므로 내 창자가 흔들렸고 그 목소리로 말미암아 내 입술이 떨렸도다 무리가 우리를 치러 올라오는 환난 날을 내가 기다리므로 썩이는 것이 내 뼈에 들어왔으며 내 몸은 내 처소에서 떨리는도다(합 3:16).”
그러므로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를 나의 높은 곳으로 다니게 하시리로다(17-19).” 하는 확신으로 주를 신뢰하며. 유랑하듯 느긋하게 굴 때가 아니었던 것이다. “주의 화살이 나를 찌르고 주의 손이 나를 심히 누르시나이다(시 38:2).” 이것이 복이다.
나를 찌르고 나를 누르시는 하나님의 손길이 은총이었다. 그리하여 “속히 나를 도우소서 주 나의 구원이시여(22).” 왜냐하면 “내가 넘어지게 되었고 나의 근심이 항상 내 앞에 있사오니 내 죄악을 아뢰고 내 죄를 슬퍼함이니이다(17-18).” 누구를 위해 종을 울리는 게 아니었다. 늘 나에게는 큰 분기점이 되었으니,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고전 2:10).” 성령이 함께 하실 것을. 언제나 새롭게 또한 현재진행형으로 ‘오늘에서’ 말씀을 하신다.
그렇지. 내가 먹을거리는 오직 하나 주의 성실하심이었다. “여호와를 의뢰하고 선을 행하라 땅에 머무는 동안 그의 성실을 먹을 거리로 삼을지어다(시 37:3).” 그리하여 주께서 준비하신 것, “기록된 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하지도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고전 2:9).” 성령이 내주임재하심이었다. 내 안에 두려움을 넣으시고 안 됐고 답답함을 느끼게도 하시면서 저 한 어린 영혼을 두고, 또한 그 아이엄마의 어쩔 수 없음에 대하여도. 기도하게 하시려고. 그것만이 살 길임을.
그리하여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참모습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니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요일 3:2-3).”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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