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잠잠하고 참고 기다리라

전봉석 2018. 1. 10. 06:56

 

 

 

보라 산들을 지으며 바람을 창조하며 자기 뜻을 사람에게 보이며 아침을 어둡게 하며 땅의 높은 데를 밟는 이는 그의 이름이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시니라

아모스 4:13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고 기다리라 자기 길이 형통하며 악한 꾀를 이루는 자 때문에 불평하지 말지어다

시편 37:7

 

 

 

그러게. 잠잠히 참고 기다린다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모른다. 단언하건대 내 의지로 되는 게 아니다. 주를 바라고 신뢰하지 않고는 결코 그럴 수 없다. 주가 이루시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마음이다. 그게 가능한 것은 ‘여호와 앞에서다.’ 곁에서 누군 잘 되고 누구는 잘만 되는 것 같아 조바심이 일지만, ‘불평하지 말지어다.’ “보라 산들을 지으며 바람을 창조하며 자기 뜻을 사람에게 보이며 아침을 어둡게 하며 땅의 높은 데를 밟는 이는 그의 이름이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시니라(암 4:13).”

 

이것으로 붙들리지 않으면 설 수가 없다. 딸애가 진지하게 장문의 문자를 하였다. 너무 섣불리 사역의 자리로 나선 건 아닌지, 더 일이 커지기 전에 담임 목사에게 못하겠다고 말하고 누구 올 때까지만 하겠다고 하면 안 될까? 하는 것이었다. 그 심정이 어떤지 안다. 당장 그래도 된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그러나 먼저는 내가 선택한 것 같으나 주님이 우리를 선택하셨다는 것, 다음은 감당할 수 있는 힘도 주신다는 것을 말해주었다. 지금 그런 마음은 수시로 드는 것이어서, 괜히 했나? 못 한다 그럴까? 이게 맞나? 들들볶는다.

 

대신 말해주기를 사람들 볼 것 없다. 심지어 담임 목사를 볼 것도 아니다. 사람 관계 다 망가져도 괜찮다. 심지어 맡겨졌던 아이들이 다 떨어져도 괜찮다. 일이 미숙하여 엉터리로 끝난다 해도 괜찮다. 다만 말씀 붙들고 성령이 하시게 자신을 놓아두라고. 너무 안달하지 말고 조바심 낼 거 없고 걱정이 앞설 것도 아니다. 그런 시달림은 관둔다고 해소될 게 아니어서 어차피 그리스도인으로 살려고 하면 할수록 더 극성이라, 사는 날 동안 안고 가야 한다.

 

대신 잠잠히 주 앞에 있자는 것. 다들 보자. 잘들 지내고 잘들 해내는 것 같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똑같다. 아니, 더하다. 나름 “아침마다 너희 희생을, 삼일마다 너희 십일조를 드리며 누룩 넣은 것을 불살라 수은제로 드리며 낙헌제를 소리내어 선포하려무나 이스라엘 자손들아 이것이 너희가 기뻐하는 바니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4-5).” 자신들이 기뻐하는 바일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은 아니다.

 

“또 내가 너희 모든 성읍에서 너희 이를 깨끗하게 하며 너희의 각 처소에서 양식이 떨어지게 하였으나 너희가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였느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6).” 돌아오라 하실 때 돌아오기를 거절하는 이들이 그 열심이다. 아무리 하나님이 꾸짖고 야단치고 신호를 보내도 ‘너희가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였느니라.’ “내가 곡식을 마르게 하는 재앙과 깜부기 재앙으로 너희를 쳤으며 팥중이로 너희의 많은 동산과 포도원과 무화과나무와 감람나무를 다 먹게 하였으나 너희가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였느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9).”

 

그러니 참, 사람의 열심보다 더 극성스러운 게 있을까? 나름이 수고하고 애써 잘 살아보겠다고 하나 그것이 다 허사라. “그러므로 이스라엘아 내가 이와 같이 네게 행하리라 내가 이것을 네게 행하리니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만나기를 준비하라(12).” 곧 “보라 산들을 지으며 바람을 창조하며 자기 뜻을 사람에게 보이며 아침을 어둡게 하며 땅의 높은 데를 밟는 이는 그의 이름이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시니라(13).”

 

마음이 좋지 않았던 것은 그게 어떤 심정인지 안다. 말 그대로 너무 성급히 결정하는 것 같았다. 한데 본인이 오래 전부터 마음에 두고 기도하였던 것이 그리 이루어주셨다고 하니, 그와 같은 확신으로 시작한 일이라면 묵묵히 더 가봐야 할 길이다. 섣불리 결정한 것 같으나 하나님보다 신중하신 이는 없으시다. 우리 안에 ‘착한 일’을 시작하시는 이는 분명코 하나님이시다.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빌 1:6).”

 

내가 주를 선택한 게 아니라 주님이 나를 선택하셨다. 내가 이 일을 시작한 게 아니라 주님이 이 일을 시작하셨다. 그렇듯 시작하신 이가 또한 끝까지 책임지실 것을.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9:8).” 오히려 넘치게 하시는 이가 오늘 우리의 마음을 모르실 리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갈 6:10).”

 

주만 믿고 가자. 정 견디기 힘들면 또한 피할 길도 주시는 법이니까 죽으나 사나 한 번 해보자. 딸애에게 해주었던 말은 고스란히 내게 들려주고 싶은 말이었다. 원래 하루에도 열두 번씩 뒤돌아보고 후회도 하고 회의도 하고 갈등도 하면서 어디 다른 걸 좀 해야 하지 않겠나? 싶은 게 이 길인 것 같다. 보람을 느낄라 그러면 그게 보람이 아니라고 생짜를 놓으시니, 나만 그런가? 그래서 난 이제 보람 따위에 연연하지 않게 되었다. 애가 좀 나아진 듯하여, 또 누구와의 관계가 좋아질 것 같아, 뭐가 좀 되려나 싶어 그것을 보람으로 삼았다간 영락없다.

 

“여호와를 의뢰하고 선을 행하라 땅에 머무는 동안 그의 성실을 먹을 거리로 삼을지어다(시 37:3).” 초지일관 성경의 말씀은 한결 같다. 주만 바라라는 것. 주만 신뢰하라는 것. 심지어는 자식도 아내도 의지하지 말 것은 ‘오직 주만이’ 나의 소원을 이루실 것이라.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그가 네 마음의 소원을 네게 이루어 주시리로다(4).” 그러므로 “네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를 의지하면 그가 이루시고 네 의를 빛 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 같이 하시리로다(5-6).”

 

마치 새로운 말씀인 것처럼 나는 안도한다. 번번이 넘어져보면 안다. 참 그렇더라. 아, 이 애가 이렇게 자라주는구나, 하고 기뻐할라치면 시들하다. 저렇게 하시려고 그러셨는가? 하고 어떤 일에서 자부심을 갖으려고 하면 어림도 없다. 때론 하나님이 훼방꾼 같다. 사람에게도 어떤 일에서도 마음의 위로를 찾지 못하게 하신다. 그리하여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고 기다리라 자기 길이 형통하며 악한 꾀를 이루는 자 때문에 불평하지 말지어다(7).”

 

그 기다림이 평생을 걸려 생을 다한다 해도 그것으로 족할 것은, 세상은 이를 실패라고 하겠으나 이미 충분한 성공이었다. 그러는 동안 나는 다시 주를 의지하였고 의뢰하여 주만 바라며 살아왔던 셈이니까, 정작 ‘그 일’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해도 또는 사람이 더는 기대도 할 수 없는 대상이 되었다 해도 괜찮은 것이다. 딸애에게 문자로 답을 해주고 그 내용이 내게 위로가 되었다. 주만 바라자. 말씀만 붙들자. 다른 건 다 잃어도 괜찮다.

 

“내가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 나의 하나님께 감사하며 간구할 때마다 너희 무리를 위하여 기쁨으로 항상 간구함은 너희가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라(빌 1:3-5).” 그 기쁨이 어떤 성과가 아니라 참여이다. 결과를 중시하고 마치 이뤄놓은 오늘의 결과를 최종적인 축복인 양 구는 세상에서야 별 수 없는 노릇이겠으나, “의인의 적은 소유가 악인의 풍부함보다 낫도다(시 37:16).” 우리의 소유는 저들의 풍부함으로 측량할 수 없는 것이다.

 

점심나절에 잠시 우울하였던 것은 생각보다 가격을 잘 쳐줘서 이백에 차가 팔렸다. 가져간 이가 어느 교회 목사라고 하니 것도 마음이 좋았다. 한데 그 돈이 들어오기 무섭게 또 무엇을 충당하는 데 찔끔 쓰이고 마는 것이어서, 사는 데 드는 비용이 너무 과하다 싶어서 말이다. 좋았다 나빴다, 들떴다가 시무룩하였다가, 그 어떤 간사함보다 더한 것이 내 마음이지 않겠나. 채 감사함으로 좋아했던 마음이 식기도 전에 울적하여서 휑하니.

 

“내가 기도할 때에 기억하며 너희로 말미암아 감사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엡 1:16).” 감사하기를 그치는 자리가 금세 지옥이구나. 그래서 우린 어떤 현상도 또 사람도 또는 일의 성과에 대해서도, 그것을 표준으로 감사하거나 기뻐해서는 안 된다. 그래서 성경은 늘 우리의 시선을 어디에 둬야 하는지 분명히 하신다. “너희는 이제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너희 목전에서 행하시는 이 큰 일을 보라(삼상 12:16).” 왜냐하면 “홀로 큰 기이한 일들을 행하시는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시 136:4).”

 

나는 늘 투덜거리며 입을 삐쭉거리기 일쑤여서, 그런 자인 내게 더욱 주를 바라며 의지하게 하시려고 이 아침 말씀 앞에 앉히신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걸음을 정하시고 그의 길을 기뻐하시나니 그는 넘어지나 아주 엎드러지지 아니함은 여호와께서 그의 손으로 붙드심이로다(시 37:23-24).” 주가 세우셨고 걷게 하셨으며 붙드심이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다. 세 치 혀를 조심하자. 툭, 튀어나오는 불평과 원망으로 마음은 금세 휘말리기 십상이니. 자고로 “내가 어려서부터 늙기까지 의인이 버림을 당하거나 그의 자손이 걸식함을 보지 못하였도다(25).”

 

주가 이루신다. 다 이루시기까지 멈추시지 않는다. 빨리 가야 하는 것도 아니고 느리다고 도태되는 것도 아니다. 세상으로 시선을 두면 그럴 테지만, 대학을 어디 나왔든, 뭘 먹고 살아왔든, 자식은 어떤지 그 남은 사적은 어떤지, 가끔씩 엘리베이터에서 휠체어에 앉아 기력을 다한 노인을 볼 때면 크게 깨닫는다. 삶의 무상함에 대하여, 기어이 죽음을 면전에 두고서야 저는 대체 무엇으로 한 생을 감사할 수 있을 것인가. “온전한 사람을 살피고 정직한 자를 볼지어다 모든 화평한 자의 미래는 평안이로다(37).” 주 앞에 온전한 자로 살자.

 

부디 “먼저 내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너희 모든 사람에 관하여 내 하나님께 감사함은 너희 믿음이 온 세상에 전파됨이로다(롬 1:8).” 감사함으로 감사되는 감사가 주를 영화롭게 하는 것이니.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시 50:15).” 나는 주를 부르고 주는 나를 건지시고, 이로써 나로 하여금 주의 이름이 영광되게 하는 일. “그의 이름의 영광을 찬양하고 영화롭게 찬송할지어다(66:2).” 다 산다. 살아서 각각 자기 생을 다한다. 훗날 우리가 한데 모여 보면 알 일이다. 무엇이 도움이었나.

 

“여호와께서 그들을 도와 건지시되 악인들에게서 건져 구원하심은 그를 의지한 까닭이로다(37:40).” 그러므로 나는 주께 간구한다. “그가 내게 간구하리니 내가 그에게 응답하리라 그들이 환난 당할 때에 내가 그와 함께 하여 그를 건지고 영화롭게 하리라(91:15).”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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