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내 백성 이스라엘이 사로잡힌 것을 돌이키리니 그들이 황폐한 성읍을 건축하여 거주하며 포도원들을 가꾸고 그 포도주를 마시며 과원들을 만들고 그 열매를 먹으리라
아모스 9:14
낮에는 여호와께서 그의 인자하심을 베푸시고 밤에는 그의 찬송이 내게 있어 생명의 하나님께 기도하리로다
시편 42:8
교회를 이루어간다는 것에 대해 생각하였다. 늘 그냥 누가 왔으면 하지,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잘 모르겠어서 말이다. 아이는 온다고 했다가 오지 않았고, 누구와 누구는 왔으면 하는데도 또한 오지 않았다. 그게 어디 쉽나. 안 오는 게 이상한 게 아니라 오는 게 이상한 걸 거였다. 그래서 교회에 대해 그 원론적인 말씀을 찾아보았다.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고전 12:27).” 곧 내가 나를 돌보는 데는 주의 것이라. 그의 몸으로써 그 지체를 다함이다.
이는 매우 역설적으로 나를 돌보는 데 그치지 않는다. “우리가 몸의 덜 귀히 여기는 그것들을 더욱 귀한 것들로 입혀 주며 우리의 아름답지 못한 지체는 더욱 아름다운 것을 얻느니라 그런즉(23).” 때로는 저 아이에게 마음을 두는 일에 지친다. 공들여 나름 얼레고 달래 그러겠다고 답을 들었는데도 함흥차사라. 아이 입으로도 ‘못 일어난다.’는 데 별 수 있겠나. 안 믿는 가정에서 그 부모의 무관심이 도움이 될 리 없다.
누군 또 자꾸 마음만 쓰이지 정작 저가 교회로 인도 되는 일은 쉽지 않다. 평소에 와서 그저 같이 말을 나누고 차를 한 잔 하는 것으로 족하지 자신의 의지로 받아들이기에는 어려운 것이다. 그럼에도 늘 우리의 기도 안에 있는, ‘덜 귀히 여기는 그것들’을 위해 생각하고 주께 아뢰는 일은 ‘더욱 귀한 것으로 입혀’ 내 마음에 두는 일이면서 동시에 성령의 도우심을 아뢰고 구하는 일이기도 하다. 나오라는 교회로는 나오지 않으면서, 저가 준 생물 고등어를 먹으며 그 마음이 고마울 뿐이었다.
“우리의 아름다운 지체는 그럴 필요가 없느니라 오직 하나님이 몸을 고르게 하여 부족한 지체에게 귀중함을 더하사 몸 가운데서 분쟁이 없고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 돌보게 하셨느니라(24-25).” 나는 지금 당장 저들이 ‘우리 교회’로 나와야 그것으로 결실이라 여기지는 않는다. 나로 인해 주를 생각하고 주를 바라는 마음이 은연중에 생겨 어느 시점에서 문득 또는 다급하게 주를 찾는 날이 올 것이다. 이에 대한 것은 나의 오늘이 누군가의 기도의 결실이라는 것을 확신하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는 나의 가장 부족한 부분에 주의 가장 선명한 사랑을 새기셨다. 아픈 데 손이 가듯 어떤 결핍이 또 괴로움이 주의 이름을 의뢰하게 하는 동력이 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즐거워하느니라(26).” 이는 동시적이면서 개별적인 계시다. 나의 이야기면서 우리의 이야기다. 아직 알지 못하여 저들이 찾지 못하는 그 보배에 대해, 내가 마치 불을 간직하고 있는 사람처럼 의연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결국 나도 주의 한 지체다. 내가 아프면 그리스도도 아프시다.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27).”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셋째는 교사요 그 다음은 능력을 행하는 자요 그 다음은 병 고치는 은사와 서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각종 방언을 말하는 것이라(28).” 그러니 “다 사도이겠느냐 다 선지자이겠느냐 다 교사이겠느냐 다 능력을 행하는 자이겠느냐 다 병 고치는 은사를 가진 자이겠느냐 다 방언을 말하는 자이겠느냐 다 통역하는 자이겠느냐(29-30).” 서로에게 너는 나와 다르면서도 같은 것이 된다. 내 이야기, 너의 이야기가 별개이면서도 우리의 이야기는 주의 이야기다.
그러므로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가장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31).” 우리는 나오지 않는 아이들을 두고 역할을 좀 더 나누었다. 아내는 권하고 격려하여 분위기를 조성하고 나는 말씀을 전하면 딸애가 이를 같이 놀아주며 관심을 유도하기로. 전에 아이들은 글방으로 이어져서 나와 개인적인 관계의 틀을 벗어나지 못했다면 이제는 구력이 생겨 아내와 딸애가 같이 도모할 수 있을 거였다. 이 또한 우리들 나름의 마음이라. 성령께서 이끄시지 않으면 모두 소용이 없는 것이겠으니. 더욱 큰 은사를 바라고 사모하자.
몰랐는데 12명의 성도가 돼야 개척교회로 등재가 되고 노회의 지원이 따르는 것인가? 동기들 방에서 누가 1년을 견뎌 비로소 개척교회로 축하예배를 드린다고 하여 의아하였다. 누구에게 물어볼까 하다 그만두었다. 대충 짐작은 가는 일이라, 것이 또 그다지 옳다고 여겨지지는 않아서 말이다. 조직의 질서를 위해서는 필요하겠으나. 하여튼 교회란,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행 2:42).” 부흥의 다른 시각은 내가 감당할 수 없는 몫이라 아직은 잘 모르겠다.
가시적으로 어떤 성과를 보여주세요, 하는 게 올해 나의 기도 제목인데 실은 이것도 옳은 것인지 그른 것인지 잘 모르겠다. 여느 교회들처럼 또는 그리 비교하여 생각하는 데서 두는 마음은 아닌지. 어떤 성과를 기대하는지 솔직히 나도 자신할 수 없는 것이어서 그럼에도 그냥 그렇게 기도한다. 무엇보다 복음의 능력을 믿는다. 누가 오든 안 오든, 있든 없든 나에게 두시는 가장 큰 은사가 말씀을 읽고 듣고 이해하여 받은 것을 전하는 일이겠으니, 직접적으로는 설교하는 일일 테고 간접적으로는 누구와의 대화에서이겠으나, 기도하기를 힘쓰라.
가르침도 교제도 떡을 뗌도 다 좋지만 ‘오로지’ 기도하기에 힘쓰는 일. 그러자면 무던해야 하고 묵묵해야 한다. 일희일비해서 누가 오고 안 오고에 너무 연연해서는 안 되는 이유다. 기도는 주께 드리는 것이면서 동시에 받는 일이다. 백날 기도한다고 하나님이 들어주시지 않는 것도 있으나 그것으로 내가 들어나는 게 있다. 예전에는 열등감이고 소외감이었던 게 이제는 주를 바라는 원동력이 되는 것이다. 일례로 내가 빙충맞을 수 있으니 이처럼 잠잠할 수도 있는 것이다.
아내와 멀리 돌아서 동네를 한 바퀴 걸으면서 생각하였다. 나의 약함이 약한 것이어서 주를 바라고 구하는 데 이롭다. 튼튼하고 아무렇지도 않았으면 내가 나서서 경건을 도모하고 열심을 다해 그것으로 나를 삼킨 바 되게 하였을 텐데. 친구 가운데 그리 여겨지는 경우가 있었다. 저는 몇 년째 목사를 준비한다. 해외에 나가봤더니 선교를 하는 데도 목사라는 신분과 달리 일반 성도로서는 한계가 있다면서 그 수단으로 목사가 되려는 것이다. 연방 신대원에서 떨어지고, 다시 도전하는 동안 여느 일을 같이 해가면서.
글쎄다. 과연 주의 부르심인가 자신의 필요인가 나는 잘 모르겠다. 그게 같지가 않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되는 게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배제되고 성령의 이끄심이 주도하지 않는 길로 가서는 결코 서울에 당도할 수 없다. 역설적으로 말해 그럼 아무리 느리고 더뎌 매일 제자리걸음인 것 같아도 어느새 거기가 서울이었다. 그러므로 “아무도 자신을 속이지 말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이 세상에서 지혜 있는 줄로 생각하거든 어리석은 자가 되라 그리하여야 지혜로운 자가 되리라(고전 3:18).”
하나님밖에 모르고 말씀밖에 관심이 없는, 어리석은 자가 되자. 부흥 없는 교회도 교회는 교회다. 내가 세운 게 아닐 테니까 말이다. 나는 혼자 천천히 걸으면서 생각하였다. 주일 오후, 무심히 길을 걷다보면 누군 교회에 다녀오는 길인 것을 단박에 알아볼 수 있다. 저의 옷차림에서 또 입가에 번지는 미소나 눈가의 그윽한 시선에서도. 우리의 육신은 서로를 그냥 비껴 지나치지만 영혼은 서로를 알아보고 즐거워하는 것이다. 교단이 어딘지, 저의 직분이 무엇인지, 오늘 예배는 어땠는지 상관없이 말이다.
오늘 본문에서 그리 들려주신다. “내가 내 백성 이스라엘이 사로잡힌 것을 돌이키리니 그들이 황폐한 성읍을 건축하여 거주하며 포도원들을 가꾸고 그 포도주를 마시며 과원들을 만들고 그 열매를 먹으리라(암 9:14).” 그 주체는 주님이시다. 돌이키시고 건축하시고 가꾸시고 먹이시는 이가 그리하실 때, 가시적인 성과라. 회복이라. ‘그 열매를 먹으리라.’ 내가 생각하는 결과가 아니라 해도 말이다. 주께서 주의 백성을 향하신 것이라. 저는 나의 백성이거나 나의 몸이 아니다. 우리는 각각 지체다. 대신할 수 없으나 다를 수조차 없다. 오직 우리가 바라야 하는 것은 주의 인자하심이다.
“낮에는 여호와께서 그의 인자하심을 베푸시고 밤에는 그의 찬송이 내게 있어 생명의 하나님께 기도하리로다(시 42:8).” 그 찬송이 내게 있게 하는, 기도다. 그러니 누가 왜 안 오는지, 나는 대체 이쯤 되면 어찌 해야 하는지, 또 실망하고 좌절하고 그러기를 숱하게 반복하는 일이 주일이라 해도, 그것이 내게 두신 주의 일이라.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나는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11).”
낙심할 거 없다. 불안할 거 없다. 곧 “내가 그들을 그들의 땅에 심으리니 그들이 내가 준 땅에서 다시 뽑히지 아니하리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암 9:15).” 주가 하신다. 그러느라 나는 여기 있다. 혼자 또 그리 생각하며 사람들 사이를 느리게 걸었다. 푸근하여서 어디든 한껏 걸어갈 수 있는 날씨였다.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시 42:1).” 내 코가 석 잔데 자꾸 누구를 생각하게 하시는 게 주일이었다. 그러니 내 영혼은 주를 찾는다.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의 얼굴을 뵈올까(2).”
갈급함이란 나를 향한 게 아니라 너를 향하는 마음에서였다. 그게 아니면 벌써 나부터 시들하여졌을 것이다. “사람들이 종일 내게 하는 말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하오니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도다(3).” 저들이 있어서 내가 더 절실하게 주를 바라고 의지하게 되는 것을 느낀다. “내가 전에 성일을 지키는 무리와 동행하여 기쁨과 감사의 소리를 내며 그들을 하나님의 집으로 인도하였더니 이제 이 일을 기억하고 내 마음이 상하는도다(4).” 내가 누구로 인해 기도를 하고 속앓이도 하지만 그것이 결국 나를 위한 것이었다.
공들여 애지중지하였던 것이 사라지면서 남기는 마음도 있다. 그러니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5).” 그럴 거 없다. 하나님께 소망을 두자. 애들도 아니고 교회 부흥도 아니고 심지어 한 영혼의 구원의 문제도 아니다. 내가 교회라. 주의 몸이라. 지체라. “내 하나님이여 내 영혼이 내 속에서 낙심이 되므로 내가 요단 땅과 헤르몬과 미살 산에서 주를 기억하나이다(6).”
내게 두시는 그 자리에서 주를 기억함이라. 이로써 “낮에는 여호와께서 그의 인자하심을 베푸시고 밤에는 그의 찬송이 내게 있어 생명의 하나님께 기도하리로다(8).” 아멘.
'[묵상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내 칼이 나를 구원하지 못하리이다 (0) | 2018.01.17 |
---|---|
주께서 계시는 곳에 이르게 하소서 (0) | 2018.01.16 |
주 앞에 세우시나이다 (0) | 2018.01.14 |
여호와를 의지하리로다 (0) | 2018.01.13 |
내 입에 재갈을 먹이리라 (0) | 2018.01.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