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민이 각각 자기의 신의 이름을 의지하여 행하되 오직 우리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의지하여 영원히 행하리로다
미가 4:5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시편 51:10
서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네 명의 동의가 필요하다. 나와 너 그리고 너의 어린아이와 나의 어린아이가 그렇다. 여전하여서 늘 동일하게 구는 어린아이가 있었으니, 나와 나의 자라지 못한 자아이다. 어른이 다 된 나는 능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인데도 순간 내 안의 어린아이가 기분이 상하고 고집을 부릴 때가 있다. 동시에 보이는 너와 네 속의 어린아이도 같은 갈등 구조를 갖는다. 그러므로 나는 나를 이해할 수 없다.
이를 바울 사도의 논법으로 정리하면,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롬 7:18).” 그래서 나는 나와 다투는 게 정상이다. 너를 대할 때 두 몫의 이해를 전제로 하는 일이라 어렵다. 점심 때 아이가 왔다. 아이 부친이 산본에서 인천까지 데려다 주었다. 지난 주 우리의 만남이 어떤 계기가 되었는지, 아이는 재수학원을 등록하기로 하였다. 그런데 오전 일곱 시 반부터 오후 열 시 반까지라 너무 벅차지 않겠나 우려도 되었다.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내가 참 많이 너를 생각한다는 것. 내가 너를 생각하는 것보다 우리 하나님이 너를 지극히 사랑하신다는 것. 때로 우리는 외면하고 부정하나 그 주님은 우리의 만남을 주도하고 계시다는 것. 그러니 어떤 상황이 도래해도 숨은 어린아이에게 주도권을 내어주지 않기를.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하는 사도의 절규가 우리를 깨어있게 해야 한다는 것. 그래서 주를 바라는 것은 내가 나를 이길 수 없는 까닭이라는 것. 나는 아이에게 이 말을 해주고 싶었다. 쌀국수를 먹이고 올라와 과일을 내주고 돌아가기에 앞서 저를 위하여 기도할 때, 나의 바람이 그것이었다.
아이가 돌아가고 어떤 서운함이 울컥, 하고 올라왔다. 당분간 매주 이렇게 좀 만날까 했는데. 주일에 좀 같이 나와 믿음 생활을 했으면 했는데. 그러게 또 재수학원을 등록할 것이고, 거긴 매일 그렇게 나갈 수밖에 없는 것이어서. 나는 더 뭐라 말할 수도 없어서 뭐라 말하려다 주춤거리고는 하였다. 딱 그 시점에 <하박국> 첫 장을 읽었다. 그러게. 하나님은 종종 내가 생각하는 것과 달리 응답하신다. 당황하여 나는 묻는다. “여호와여 내가 부르짖어도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니 어느 때까지리이까 내가 강포로 말미암아 외쳐도 주께서 구원하지 아니하시나이다(1:2).”
기껏 마음 쓰게 하시고, 그렇듯 몇 주를 씨름하게 하시고, (기적처럼 그때마다 아이아빠가 데려다주기까지) 뭔가 아이의 반응이 오는가 싶었는데. 늘 그런 식이다. ‘뻐꾸기 둥지를 날아간 새’처럼 허망하기까지 하다. 좀 되려나? 어떤 변화가 있으려나? 하였는데, 너무 급진전하듯 재수학원으로 등록하다니. 좋은 직장에 취직을 하다니. 군대에 가다니. 애인이 생기다니. 부모가 반대를 하다니. 그러저러 해서 더는 주 앞에 나오기를, 거절당할 때의 당혹스러움은 누구의 몫일까?
엘리베이터 앞에서 아이의 등을 다독거리며 잘 가라고 악수를 할 때 눈물이 핑, 돌았다. 괜히 속상하고 화가 났다.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니 어느 때까지이리까?’ 나는 뚱하니 앉아 마치 ‘따귀 맞은 영혼’처럼 화가 났다. 내 안의 어린아이는 비웃듯이 비아냥거렸다. 때로는 하나님이 제일 이상하다. 정말 이해가 안 된다. 왜 또 엉뚱한 방향으로 틀어지게 놓아두시는 걸까? 작년 내내 공부도 않고 대학을 포기한 아이처럼 두문불출하게 굴더니, 일주일 사이에 재수학원이라니.
나는 하나님이 그리시는 그림을 아무리 들여다봐도 모르겠다. 하나님도 어쩔 수 없는 문제가 아니시라면, 어떤 숨은 의도가 있으신 것일까? 하박국은 답답한 심정으로 주께 고하는데, 전혀 엉뚱한 답을 내어놓으신다. “보라 내가 사납고 성급한 백성 곧 땅이 넓은 곳으로 다니며 자기의 소유가 아닌 거처들을 점령하는 갈대아 사람을 일으켰나니(6).” 저들로 공격하게 하시겠다는 것이다. 차라리 응답이 없으실 때가 더 이해가 되었다. 아이의 무반응이 더 마음이 가고 안타까웠다. 한데 느닷없이 재수학원을 등록하고 더 견고하게 그럴 수밖에 없는 벽을 두르게 하시는 것이다.
아이들을 대할 때 그래서 나는 어떤 희망을 보기보다 절망을 느낀다. 기껏 좀 되려는가 싶었는데, 너무 좋은 직장이 되어 더는 아쉬울 게 없어져서 그런가. 또 누군 오려는가, 했더니 뜬금없이 연애를 시작하고. 누구는 황당하게도 교회를 멀리하는 부모의 반대에 부딪치질 않나. 모양도 이유도 각각이라 차라리 주께서 응답하시지 않으실 때가 더 나았던 것 같은 생각마저 든다.
나는 돌아와 시무룩하니 급 우울해졌다. 다섯 시에 와야 할 아이가 또 이런저런 이유로 못 오게 되어 다행이다 싶었다. 나의 어린아이는 삐친 것이다. 소파에 돌아누워 아무 것도 하기 싫었다. 그러고 있을 때 아내가 전화를 했다. 장모가 동대문에 가다가 지하철에서 쓰러져 응급실로 실려 갔다는 것이다. 고대안암병원이면, 순간 나의 반응은 그 거리를 가늠하고 어떻게 가야 하나 그 걱정이 먼저 들었다. 울먹거리는 아내를 진정시키고, 손위 처남이 달려가고 있다니까 조금만 두고 보자, 하고 일렀다.
어떤 두려움이 나를 엄습했다. 내가 아무 것도 할 수 있는 게 없구나, 하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그럴 때 내가 할 수 있는 게, 더욱 주를 의지하는 수밖에 없음을. 조금 있자 아내가 다시 전화를 하였다. 어머니와 통화가 된 모양이었다. 어쩌다 넘어졌고, 뇌진탕으로 기절을 했으며, 119에 실려 가장 가까운 병원으로 가게 된 것인데, 타박상 정도만 있고 딱히 어떤 증상은 없어 형님이 도로 모시고 집으로 가는 길이라고 하였다. 금요일에 신경외과 쪽으로 검사를 하기로 했다고, 그땐 자신이 모시고 가겠다고 하였다.
하나님은 전적으로 하나님만 의지할 수 있는 자리로까지 낮추시고, 내려놓기까지 참고 또 기다리신다. 곧 “그들은 자기들의 힘을 자기들의 신으로 삼는 자들이라 이에 바람 같이 급히 몰아 지나치게 행하여 범죄하리라(합 1:11).” 이를 아시는 이가 그러므로 가장 선한 길을 열어 가시는 거였다. 그러는 동안 나는 끌탕을 지기고 안달복달, 엎치락뒤치락 내가 의지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동원하려 드는 것이다.
오늘 미가서의 말씀이 이를 정리하고 있다. “만민이 각각 자기의 신의 이름을 의지하여 행하되 오직 우리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의지하여 영원히 행하리로다(미 4:5).” 각기 저마다의 ‘신의 이름을 의지하여 행하되’ 그렇다면 너는 어쩔 것인가? 다들 그렇다 하니, 그럼 나는 어떻게 할 것인가? 이때 선지자는 강조한다. ‘오직’ 바로 이 ‘오직’이 내겐 얼마나 유효한가, 하는 것이다. 어떠하든. 다들 뭐라 하든. 어쩌든지. 나는, ‘오직 우리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의지하여 영원히 행하리로다.’
이를 이어서 다윗의 기도에 아멘 한다.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시 51:10).” 내 안의 숨은 어린아이를 인정하는 일. 시시각각, 사사건건 먼저 앞서는 마음으로는 하나님을 도대체 이해할 수가 없다. 내 기대와 정반대로 일을 틀어버리시는 것 같은, ‘오직’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만 의지하게 하시려고. 이것만이 가장 선하고 의로운 길인 것을 알게 하시기까지 주의 긍휼하심은 오래 참고 또 기다리시는 거였다. 믿기를 거부할 때 생겨나는 요지경 속의 세상을 살게 하심으로!
기어이 주만 바라고 구하게 하시려고. 이를 깨달은 다윗은 자기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기를 기도할 수 있었다. 나름 유용하였던 가치와 기준은 저가 아무리 선하다 해도 우리야의 아내를 범하는 일로, 이를 은폐하기 위해 저를 전장으로 내몰아 죽기까지 음모하고, 기어이 밧세바를 취하여 아내로 삼는. 거짓과 오만의 실체를 맞닥뜨리게 하심으로 자신의 의를, 그 어떤 공로도 취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하신다. 오히려 더 천하고 추한 경우에서 선을 도모하시는 하나님의 공의를 오늘 본문에서 읽을 수 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그 날에는 내가 저는 자를 모으며 쫓겨난 자와 내가 환난 받게 한 자를 모아 발을 저는 자는 남은 백성이 되게 하며 멀리 쫓겨났던 자들이 강한 나라가 되게 하고 나 여호와가 시온 산에서 이제부터 영원까지 그들을 다스리리라 하셨나니 너 양 떼의 망대요 딸 시온의 산이여 이전 권능 곧 딸 예루살렘의 나라가 네게로 돌아오리라(미 4:6-8).” 아, 이 보배를 왜 질그릇에 담으셨는가, 그 이유가 분명해진다. 내가 나를 의지하는 것조차 바르지 못한 것임을 알게 하시려고, 나는 날마다 나의 어린아이와 다툰다.
돌아와 가정예배를 드리며, 참 다행이라는 말을 새삼 실감하였다. 아내는 혼쭐이 빠진 사람처럼 우려와 근심으로 오후 내내 발을 동동거리다 비로소 안도하며 주께 감사하였다.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따라 내게 은혜를 베푸시며 주의 많은 긍휼을 따라 내 죄악을 지워 주소서(시 51:1).” 주께 아뢰고 구하지 않으면 감당이 안 되는 나와 나의 어린아이에 대하여. “나의 죄악을 말갛게 씻으시며 나의 죄를 깨끗이 제하소서(2).” 우선하여 드는 의심과 두려움에 나의 믿음 없음을 주께 고백하였다.
우리의 모든 한 날 한 시, 이 모든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은 선하시다. 어떠하든 선하시다. 욥의 고백처럼 나를 죽이신다 해도 선하시다. 하나님께는 부당함이란 없으시다. 기껏 말로써 또 마음으로 아이를 주 앞에 인도하였다 싶으면, 영락없이 미끄러지게 하시는 데 답이 있었다. “보소서 주께서는 중심이 진실함을 원하시오니 내게 지혜를 은밀히 가르치시리이다(6).” 나로 하여금 더욱 주님만 바라게 하시려고. 아이의 변화도, 나의 어떤 성장도 또는 기대나 희망도 모두 헛된 것임을. 오로지 나의 중심이 진실함으로 주만 바라는 지혜를 가르치시려고.
그러므로 “우슬초로 나를 정결하게 하소서 내가 정하리이다 나의 죄를 씻어 주소서 내가 눈보다 희리이다(7).” 그러할 때 비로소 나는 안다. “내게 즐겁고 기쁜 소리를 들려 주시사 주께서 꺾으신 뼈들도 즐거워하게 하소서(8).” 고통인줄만 알았는데, 즐겁고 기쁜 소리를 들려주신다. 나의 꺾인 뼈들이 즐거워한다. 그리하여 “주의 얼굴을 내 죄에서 돌이키시고 내 모든 죄악을 지워 주소서(9).” 나는 주 앞에서 바라는 것이 달라지는 것이다.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10).”
그러므로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11).” 곧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켜 주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12).”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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