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보라, 내가 내 백성을 해가 뜨는 땅과 해가 지는 땅에서부터 구원하여 내고 인도하여다가 예루살렘 가운데에 거주하게 하리니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진리와 공의로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스가랴 8:7-8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적을 전파하리이다
시편 73:28
아침에 일찍 일어나 교회로 올라왔다. 명절 대목이라 떡집과 반찬가게와 두부가게가 일찍부터 문을 열고 있었다. 이런저런 불편함이 때론 우리를 성실하게 한다. 오늘 말씀은 주께서 회복하심을 목격한다. 주가 인도하여, 나는 주의 백성이 되고 주는 나의 하나님이 되신다. 이런저런 것들이 때론 나를 미끄러지게 하지만,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하나님이 참으로 이스라엘 중 마음이 정결한 자에게 선을 행하시나 나는 거의 넘어질 뻔하였고 나의 걸음이 미끄러질 뻔하였으니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투하였음이로다(시 73:1-3).” 부럽지 않다면 거짓말이다. 저들의 형통함이 질투가 난다. 그러다 퍼뜩 생각이 미치는 것은 ‘주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이처럼 주의 전에 올라와 말씀을 가까이 하면서야 다시 깨닫는다.
아이들이 들뜬 마음에 맞춰 이번 주 주제는 가족이었다. 명절을 맞으며 그 행적을 듣고 싶었다. 아니나 다를까 아이들 눈에 비치는 어른들의 세계는 위선과 거짓과 방종의 것이었다. 하지 말라고 하고 자신들은 아무렇지 않게 행하는 것들에 대하여, 아이들도 다 안다. 세뱃돈을 받으면 이런저런 이유로 도로 걷어가는 부모의 행태도 공분을 샀다. 엄마(여자)들만 고생하는 것에 대해서도 할 말이 있었다. 그러면서도 가족들이 최고다.
아무리 뭐라 해도 명절은 기다려지는 일인데, 한 아이는 명절 때면 아빠가 출장을 간다고 하며 시무룩하였다. 다들 있는데 그 사연을 물어볼 수는 없었다. 그러자 옆에 있던 아이는 그저 피식 웃으며, 나는 아빠가 아니라 아저씨랑 살아! 하고 위로랍시고 하는 말에 웃음이 났다. 어릴 적 아이들의 이런저런 사연이 사는 날 동안 두고두고 안고 살아야 할 일일 텐데. “내가 어쩌면 이를 알까 하여 생각한즉 그것이 내게 심한 고통이 되었더니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그들의 종말을 내가 깨달았나이다(16-17).”
어떻게 하면 아이들을 예배로 나오게 할까? 아이들이 복음을 받아 그 가정에 씨앗이 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가득하지만 어찌 할 방도가 없다. 큰 녀석은 퉁명스럽게 ‘가보도록 할게요.’ 하는 답 문자가 전부여서 어쩔 때는 속이 터진다. 오란 소리도 지겹고 저들은 외면과 거절도 상처가 된다. 그럴 때면 다신 말하지 말아야지, 하는 속 좁은 생각도 든다. 내가 하려고 해서는 영락없다. 실망과 좌절만 인다. 나의 소망은 주의 영광을 바라는 일.
그러므로 “너희 중 장로들에게 권하노니 나는 함께 장로 된 자요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이요 나타날 영광에 참여할 자니라(벧전 5:1).” 나에게 권한다.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으로 그 나타날 영광에 참여할 자로서 말이다. 이는 모든 피조물로서의 바람이다.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 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롬 8:21).” 주의 자녀들의 영광. 내가 사모하는 그것을 저 아이들도 알게 될 것임을.
곧 이 사실 자체가 주의 영광을 위한 것이다. “오직 은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으로서 곧 감추어졌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고전 2:7).” 이는 오늘 갑자기 생겨난 게 아니다. 우연한 게 결코 아니다. 어쩌다 그리 된 것도 아니다.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일이다. 이보다 더 든든한 말씀이 또 있겠나? 그 하나님의 영광을 바람은 곧 우리의 영광을 위하여서이다.
주를 영화롭게 하는 일이 나를 영광되게 한다. 그 영광의 중한 것을 이루는 일이다. 그러므로 오늘의 이런저런 구차한 상황이 그리 대단한 일이 될 수 없다.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고후 4:17).” 족히 비교도 되지 않는다. 그런 걸 자주 한눈을 팔고 엉뚱한 데 마음이 쓰이곤 하는 것이 세상살이라. 왜냐하면 자주 남들과 비교가 되고 저들의 형통이 부러움의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럴 때면 영락없다. 부러워하면 보기 좋게 미끄러지게 돼 있다. 오늘 말씀의 이치다. “나는 거의 넘어질 뻔하였고 나의 걸음이 미끄러질 뻔하였으니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투하였음이로다(시 73:2-3).” 안 그래야 하는데, 안 그럴 수가 없는 세상에서 그럼 나는 무얼 붙들고 서야 할까? 기어이 주가 나를 영화롭게 하실 것이라는 사실이다.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롬 8:30).”
그렇지. 미리 정하신 나이다. 나를 부르셨다. 부르신 나를 의롭다 하신다. 의롭다 하신 나를 또한 영화롭게 하신다. 내가 나서서 그 영화를 추구하는 게 아니었구나. 어깨가 아파서 글을 오래 쓰기가 힘들다. 엉덩이가 아파서 의자에 오래 앉아 있기가 어렵다. 이러자니 저렇고 저러자니 이렇고, 구구한 사연과 서글픔이 나를 우울하게도 하지만 그래서 더욱 다곤 같은 세상에 도취되지 않게 주의해야 한다. 그러자면 어떻게 해야 할까?
요 며칠 계속 붙들 게 되는 단서 하나, 하나님으로 만족하는 영혼이 되는 일.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빌 1:20-21).” 이것은 그럴 만한 여건일 때만의 일이 아니다.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의 존귀가 드러나기를.
이를 위해 나는 모든 것을 해로 여긴다.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3:8-9).” 이와 같은 말씀 앞에서 마음을 다잡을 수 있다는 게 신비롭다. 이런 말씀이 눈에 들어온다. 마음에 새겨진다. 그리고 간절히 바라는 게 된다.
내가 하나님 안에서 최고의 영광을 바랄 때가 하나님이 가장 영광을 받으시는 일이었다. 아플 때나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어떠하든지. 아침에 일찍 일어나 가족들이 다들 모여 잠들어 있어 슬그머니 교회로 나올 수 있는 마음, 이 마음을 주가 주셨다. 그리고 그 만족함을 추구하고 열망하게도 하신다. 시편 100편을 소리 내어 또박또박 되뇐다.
온 땅이여 여호와께
즐거운 찬송을 부를지어다
기쁨으로 여호와를 섬기며 노래하면서
그의 앞에 나아갈지어다
여호와가 우리 하나님이신 줄
너희는 알지어다
그는 우리를 지으신 이요
우리는 그의 것이니
그의 백성이요
그의 기르시는 양이로다
감사함으로 그의 문에 들어가며
찬송함으로 그의 궁정에 들어가서
그에게 감사하며
그의 이름을 송축할지어다
여호와는 선하시니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고
그의 성실하심이
대대에 이르리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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