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원고]

삼하 13:21, 14:24 / 마음 따로 몸 따로

전봉석 2018. 2. 23. 12:38

20180225 주일

 

삼하 13:21, 14:24

마음 따로 몸 따로

 

 

 

 

13:21 다윗 왕이 이 모든 일을 듣고 심히 노하니라

 

14:24 왕이 이르되 그를 그의 집으로 물러가게 하여 내 얼굴을 볼 수 없게 하라 하매 압살롬이 자기 집으로 돌아가고 왕의 얼굴을 보지 못하니라

 

 

 

들어가는 말

    

-이야기 1 

다윗의 아들 압살롬에게 아름다운 누이가 있었다. 그 이름은 다말이다. 다윗의 다른 아들 암논이 그를 사랑하였다. 암논이 그의 누이 다말 때문에 울화로 말미암아 병이 되었다. 암논에게 요나답이라는 친구가 있었다. 저는 다윗의 형 시므아의 아들이다. 저가 꾀를 내었다. 아픈 체 하고 이복누이 다말로 병간호를 하게 해달라고 왕께 구하라는 거였다.

 

이내 다윗이 다말에게 일러 암논의 집으로 가게 하였다. 다말이 저를 위해 과자를 굽고 그 냄비를 가져다 암논 앞에 놓을 때, 암논이 먹기를 거절하고 다말을 침실로 끌어들여 억지로 그와 동침하였다. 그런 뒤 갑자기 마음이 식어져 다말을 미워하니 이제 미워하는 미움이 전에 사랑하던 사랑보다 더하였다.’ 일어나 가라. 다말을 내쫓았다.

 

다말은 나를 쫓아 보내는 이 큰 악은 아까 내게 행한 그 악보다 더하다.’ 하였으나 암논은 듣지 않았다. 암논이 종을 불러 이 계집을 내게서 내보내고 문빗장을 지르라.’ 하였다. 다말은 수치심에 못 이겨 재를 자기 머리에 덮어쓰고 그의 채색옷을 찢고 손을 머리 위에 얹고 가서 크게 울부짖었다. 그의 친 오라비 압살롬이 암논과의 일을 알았다. ‘누이야 지금은 잠잠히 있고 이것으로 말미암아 근심하지 말라.’ 다말이 압살롬의 집에서 처량하게 되었다.

 

다윗 왕이 이 모든 일을 듣고 심히 노하였다. 압살롬은 암논이 그의 누이 다말을 욕되게 하였으나 암논에 대하여 잘잘못을 말하지 않았다.

  

-이야기 2  

만 이 년이 지난 후였다. 압살롬이 양 털을 깎는 날이었다. 압살롬이 왕의 모든 아들을 청하였다. 다윗이 암논과 왕의 모든 아들들이 그와 함께 양 털 깎는 날을 보내게 하였다. 압살롬은 흥이 돋은 후에 암논을 죽였다. 왕자들이 놀라 각기 노새를 타고 도망하였다. 이 소식을 듣고 다윗은 옷을 찢고 땅에 드러눕고 괴로워했다. 이때 또 요나답이 와서 왕자들은 살아 있음을 알렸다. 암논만 죽었는데, 누이 다말을 욕되게 한 날부터 압살롬이 결심한 것이라 아뢰었다.

 

압살롬은 도망하여 그술 왕 암미훌의 아들 달매에게로 갔다. 저는 그에게 외조부였다. 다윗은 날마다 그의 아들로 말미암아 슬퍼하였다.

 

압살롬이 도망하고 그술로 가서 산 지 삼 년이 되었다. 스루야의 아들 요압이 왕의 마음을 알고 꾀를 내었다. 드고아에서 지혜로운 여인 하나를 불러 연극을 시킨 것이다. 드고아 여인이 자신의 아들 둘이 싸워 한 아이가 다른 아이를 죽인 것에 대해, 온 족속이 자신을 핍박하고 그의 동생도 쳐 죽이라 한다고 호소하였다. 다윗이 이에 호응하자, 그것이 다윗의 일인 것을 알려주었다.

 

다윗은 그 의미를 알고 요압에게 일러 압살롬을 데려오게 하였다. 압살롬이 그술에서 예루살렘으로 왔으나 다윗은 그를 그의 집으로 물러가게 하고 저의 얼굴을 보지 않았다. 압살롬이 이태 동안 예루살렘에 있으되 왕의 얼굴을 보지 못하였다. 이후 요압을 사이에 세워 다윗과 어색한 화해를 이루었다.

    

-이야기 3 

그 후에 압살롬이 자기를 위하여 병거와 말들을 준비하고 호위병 오십 명을 세웠다. 그리고 성문 길 곁에서 송사를 가지고 왕에게 재판을 청하러 가는 백성들의 환심을 샀다. 압살롬의 행함이 이스라엘 사람의 마음을 훔쳤다.

 

사 년 만에 압살롬이 왕께 아뢰어 헤브론으로 가기를 청하였다. 다윗은 그 속내를 알지 못하고 저를 보내었다. 압살롬이 헤브론에서 백성들을 모아 왕이 되었다. 저가 그 일에 다윗의 모사인 아히도벨을 내세웠다. 이스라엘의 인심이 압살롬에게로 돌아갔고 저가 왕이 되었다는 보고가 다윗에게 전해졌다. 이에 다윗이 일어나 도망하였다. 

 

이야기 속의 이야기  

모든 이야기는 그 이야기 속에 여러 겹의 이야기를 갖는다. 오늘 본문은 다윗의 장자 암논의 성적 욕구가 빚어낸 끔찍한 다윗의 개인 가정사로 국한되지 않는다. 암논의 욕구에 불을 지핀 인물이 요나답으로 저는 심히 간교한 사람이다.’ 후에 압살롬이 왕자들을 다 죽였다는 소문에 다윗 왕이 절망하고 있을 때, 기회주의자답게 끼어 들어 다윗의 형 시므아의 아들 요나답이 아뢰어 이르되 내 주여 젊은 왕자들이 다 죽임을 당한 줄로 생각하지 마옵소서 오직 암논만 죽었으리이다 그가 압살롬의 누이 다말을 욕되게 한 날부터 압살롬이 결심한 것이니이다(삼하 13:32).” 뻔뻔스럽기 이를 데 없다.

 

저마다 서로의 상처 받은 영혼은 마음 따로 몸 따로우리의 연약함에 좌우된다. 지나친 걱정은 강압적인 사랑이 되어서 숱한 경고와 통제와 압력을 행사함으로, 오히려 자식들은 빈둥거리거나 늑장을 부리고 자신을 스스로 방치한다. 이런 부모의 특징은 실제 자신의 유약함을 감춘다. 우유부단한 부모는 자식을 떠받들어 키우고, 아이는 상대를 존중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 툭하면 한 턱 쏘는 부모는 대체로 유약하고 방임형이다.

 

유약한 부모는 아이의 요구에 못 이겨 그 충동적인 요구를 들어주고, 방임하는 부모는 자녀가 간청하지 않았는데도 빈번하게 선물을 안긴다. 아이들은 넘쳐나는 선물-사랑으로 끈기가 부족하다. 보란 듯이 잘못을 응징하는 부모는 그럴 때마다 자신의 신념이나 가치를 내세우지만 아이는 은연중에 부모의 적개심을 알아챈다. 또한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병약한 부모 밑에서 자란 아이는 대체로 무기력하고 무책임해진다. 너무 바쁜 부모 밑에서 자란 아이는 친밀하고 의미 있는 관계 맺기가 서툴다.

 

다윗에 대한 일련의 사건은 이 모든 형질의 특징을 총체적으로 보여주는 것 같다. 다윗의 묵인과 외면과 자기감정과 실제 취하지 않았던 행동사이의 마음 따로 몸 따로의 번민은 그 결과가 참으로 끔찍하였다. 결국 압살롬의 반역으로 도망가는 이야기 부분은 다음 시간에 이어서 다루도록 하고, 오늘 나는 이 총제적인 난국을 데살로니가전서 58절 말씀에서 그 답을 찾고자 한다. “우리는 낮에 속하였으니 정신을 차리고 믿음과 사랑의 호심경을 붙이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자.”

 

믿음과 사랑의 호심경  

앞서 다윗은 암논과 같이 똑같은 범죄를 저지른 바 있다.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를 범하고 이를 은폐하려 했던 내용을 지난 시간에 살펴본 바 있다. 어쩌면 그래서 저는 그의 큰 아들 암논이 자행했던 성폭력을 아무런 대응도 하지 못한 것은 아닐까? “다윗 왕이 이 모든 일을 듣고 심히 노하니라(삼하 13:21).” 듣고 노하였다. 그리고 다음 조치가 없었다. 저를 불러 응당한 벌을 내리지 않았다. 다윗의 묵인은 본인의 이야기로 끝나는 게 아니었다.

 

딸아이 다말의 수치심은 물론이거니와 저의 친 오라비 압살롬의 원한은 극에 달하기까지 무척 오랜 시간을 혼자 견뎌야 했다. “그의 오라버니 압살롬이 그에게 이르되 네 오라버니 암논이 너와 함께 있었느냐 그러나 그는 네 오라버니이니 누이야 지금은 잠잠히 있고 이것으로 말미암아 근심하지 말라 하니라 이에 다말이 그의 오라버니 압살롬의 집에 있어 처량하게 지내니라(20).”

 

우리는 믿음과 사랑의 호심경을 붙여야 한다. 누구도 저절로 선할 수 없다. 그냥 두면 나아지는 굴절은 없다. 잠깐씩 어느 일정 구간은 그래 보일 수 있으나 엄연히 구부러진 만큼 각도는 벌어지고 틈은 생기게 돼 있다. 스스로 부끄러울 게 없다고 말하는 사람은 그래서 무섭다. 다윗은 진노하였다. 그러나 아무런 조치도 취할 수 없었다. 그냥 적당히 무마되기를 바랐는지도 모른다. 실제 또 때를 노리는 압살롬의 침묵으로 모든 게 잘 해결된 듯이 보였다.

    

성경은 이르신다. “우리는 낮에 속하였으니 정신을 차리고 믿음과 사랑의 호심경을 붙이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자(살전 5:8).” 우리는 낮에 속하였다. 그렇다면 정신 차리고 은폐나 은밀한 어둠을 경계해야 한다. 안 보이면 그만이 아니다. 그렇다면 믿음과 사랑의 호심경은 어떤 것일까? 먼저 호심경이란 우리의 가슴을 보호하기 위해 갑옷 위에 대는 구리판이다. 앞서 성경은 그 의미를 분명히 정의하고 계신다.

   

구원의 소망의 투구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끊임없이 기억함이니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형제들아 너희를 택하심을 아노라(1:3-4).” 바울은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사랑을 서정적으로 기술하면서 믿음과 소망과 사랑은 항상 함께 있는 것임을 강조하였다.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13).” 따로 떼놓고 나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랑이 제일이라고 믿음과 소망이 소멸되거나 없어지는 걸 의미하지 않는다. 사랑으로 확장되어 그 의미는 실제가 되는 것이다.

 

먼저는 믿음의 역사다. 히브리서 11장에 나열되고 있는 성경의 믿음의 사람들을 살펴보면 한 눈에 알 수 있다. 누구도 스스로 의인일 수 없다. 또한 선함이란 저절로 뚝딱 주어지고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이를 표현하는 단어가 열매다. 성령의 열매를 맺고 사는 데는 그만큼의 무던함과 수고가 따른다. 자기 안의 악전고투 없이 고군분투하지 않고 이뤄내는 열매란 없다. 이것이 유구한 믿음의 역사다. 믿음 없이 아브라함도 야곱도 모세도 없다. 이는 소망의 인내로 이루어진 역사다.

 

저들의 이야기가 내 이야기로 날마다 매순간 나의 가슴팍을 보호한다. 정신 차리고 믿음과 사랑의 호심경을 붙이지 않으면, 우리는 언제든 미끄러지고 넘어져 구렁텅이에 빠질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자. 사랑은 처절한 실제이고 이를 인내하는 믿음은 막연한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구원의 소망이다. 투구를 써서 우리가 아는 이 값진 지혜를 간직해야 한다. 그럴 수 있는 게,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3:2).” 이는 성경의 확고한 메시지다.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  

오늘 우리의 믿음은 그저 값없이 주어진 은혜의 선물인 것만은 아니다. 어마어마한 값을 주고 산 것이다. “너희는 값으로 사신 것이니 사람들의 종이 되지 말라(고전 7:23).” 그럼에도 여전히 사람들 사는 모양대로, 사람들처럼 사는 것을 평범함의 이상으로 여기곤 하니 문제다.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의 구분이 모호해졌다. 이를 좀 더 구체화시켜주는 본문이 있다.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 받는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너희는 평강을 위하여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너희는 또한 감사하는 자가 되라(3:12-15).” 결코 막연한 구호나 감미로운 간증의 낭만적인 이야기가 아니다.

 

이로써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16-17).”

 

다윗 일가의 이야기가 그냥 저들 이야기로 그치게 해서는 안 된다. 첫째,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둘째,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셋째,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넷째, ‘감사하는 마음으로다섯째,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여섯째, ‘그를 힘입어살아야 한다.

    

 나오는 말

힘입어’, ‘옷 입어’, ‘덧입어는 같은 맥락의 표현이다.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기 위한 필수조건이다. 그러려면 먼저 벗어야 한다. “너희도 전에 그 가운데 살 때에는 그 가운데서 행하였으나 이제는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벗어 버리라 곧 분함과 노여움과 악의와 비방과 너희 입의 부끄러운 말이라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하지 말라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 버리고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5-10).”

 

분함과 노여움과 악의와 비방과 나의 입의 부끄러운 말이라.’ 이를 벗어버리지 않으면 동시에 힘입을 수 없다. 오늘 본문에서처럼 육체의 일은 자명하다.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5:19-21).”

 

어쩌면 우리가 육신을 입고 사는 동안 마음 따로 몸 따로의 이율배반적인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흔히 말하듯 젖 먹던 힘까지 다해 싸우고 지켜내야 한다.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그는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3:20-21).” 믿음의 역사다.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3:5)." 사랑의 수고가 필요하다.


그러므로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14).곧 믿음과 사랑의 호심경을 붙여야 한다.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써야 한다. 다윗 일가의 파란만장한 음욕과 암투와 중상모략은 결코 저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사랑의 수고에는 시작이 우선이다. 반복이 최선이다. ‘마음 따로 몸 따로를 극복하는 길은, “우리는 낮에 속하였으니 정신을 차리고 믿음과 사랑의 호심경을 붙이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자(살전 5:8).”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