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원고]

사무엘하 1:24-25 / 여디디야

전봉석 2018. 2. 9. 11:53

20180211 주일

 

 

사무엘하 1:24-25

여디디야

 

 

12:24 다윗이 그의 아내 밧세바를 위로하고 그에게 들어가 그와 동침하였더니 그가 아들을 낳으매 그의 이름을 솔로몬이라 하니라 여호와께서 그를 사랑하사

12:25 선지자 나단을 보내 그의 이름을 여디디야라 하시니 이는 여호와께서 사랑하셨기 때문이더라

 

 

배경 이야기

 

1) 이웃하고 있는 암몬 땅의 나하스 왕이 죽고 그의 아들 하만이 왕이 되었다. 저의 조부를 애도하려 다윗은 사람을 보냈다(삼하 10:2). 한데 이를 염탐하러 온 것으로 여겨 저들은 다윗의 사람들을 능멸하고 모멸감과 수치심을 안겼다(3-5). 당시는 사울이 죽고 뒤를 이었던 이스보셋도 죽어, 명실상부하게 다윗이 유다에서의 76개월 동안 반쪽짜리 통치를 끝내고 전체 이스라엘의 왕권을 거둔 때였다. 이 일로 이스라엘과 암몬이 전쟁을 하게 되었다.

 

암몬은 주변국으로부터 용병들을 끌어 모았다(6). 다윗은 그의 누이 스루야의 아들들 가운데 요압에게 이 전쟁을 맡기고 예루살렘에 그대로 있었다(11:1). 그뿐인가? 저는 저녁 때에 옥상을 거닐다 건너편에 목욕하고 있는 여인을 보고 마음이 동하였다. 이에 다윗은 밧세바를 범하였고 밧세바가 임신을 하자 이를 위장하려고 그의 남편 우리아를 전장에서 끌어올렸다. 저의 노고를 치하하는 듯 저를 집으로 보내 침실로 들어가게 하려 했다.

 

한데 저는 충성된 자라. 전쟁 중에 아내 곁으로 갈 수 없다고 하며 궁에 머물렀다(8). 다윗은 다음 날 또 다른 꾀를 내어 저를 술에 취하게 한 뒤 집에 들어가게 하려 했다(13). 하지만 그 또한 수포로 돌아가자, 이내 다윗은 요압 앞으로 편지를 썼다. 저를 전장 깊숙이 몰아 죽게하라는 것이었다(14-15). 결국 요압은 왕의 명에 따라 저를 성벽 가까이로 몰아 죽게 하였다(17). 우리아가 죽자 정례를 치르기 무섭게 다윗은 밧세바를 아내로 맞아들였다(27).

 

하나님은 나단을 다윗에게 보내 그 죄를 일깨우셨다(12:1-7). 부한 사람이 가난한 이의 하나밖에 없는 암양 새끼를 취하여 손님을 맞았다는 비유를 들어 다윗의 동의를 얻어낸 것이다. “다윗이 그 사람으로 말미암아 노하여 나단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이 일을 행한 그 사람은 마땅히 죽을 자라(5).” 예수님은 이를 일컬어 일갈하셨다.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7:3).” 나단이 다윗에게 말했다. “당신이 그 사람이라(삼하 12:7).”

 

2) 다윗이 나단에게 말하였다.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 회개는 용서를 구한다. “여호와께서도 당신의 죄를 사하셨나니.” 아울러 책임이 따른다. “이 일로 여호와의 원수가 크게 비방할 거리를 얻게 하였으니, 당신이 낳은 아이가 반드시 죽으리이다.” 밧세바가 다윗의 아이를 낳았다. 아이를 여호와께서 치시매 심히 앓는지라, 다윗이 아이를 위하여 하나님께 간구하여 금식하며 밤새도록 땅에 엎드렸다.

 

나이든 대신들이 왕을 일으키려 하나 왕이 듣지 않았다. 그들과 더불어 먹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이레 만에 아이가 죽었다. 신하들은 차마 이 사실을 왕에게 아뢸 수 없어했다. 왜냐하면 아직 아이가 살았을 때도 금식하며 애통하고 저리 괴로워하는데 아이가 죽은 것을 말하면 왕이 더욱 상심할까 두려워서였다. 다윗이 신하들의 수군거림을 듣고 아이가 죽은 줄을 알았다(19).

 

이에 다윗이 땅에서 일어나 몸을 씻고 기름을 바르고 의복을 갈아입었다. 그리고 여호와의 전에 들어가 경배하고 왕궁으로 갔다. 명령하여 음식을 차리게 하고 먹었다(20). 그의 신하들이 의아하여 그에게 물었다. “아이가 살았을 때에는 그를 위하여 금식하고 우시더니 죽은 후에는 일어나서 잡수시니 이 일이 어찌 됨이니이까?” 그러자 다윗이 말했다. “아이가 살았을 때에 내가 금식하고 운 것은 혹시 여호와께서 나를 불쌍히 여기사 아이를 살려 주실는지 누가 알까 생각함이거니와 지금은 죽었으니 내가 어찌 금식하랴! 내가 다시 돌아오게 할 수 있느냐? 나는 그에게로 가려니와 그는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리라(23).”

 

 

첫째, 우리의 생은 이 땅의 삶이 전부가 아니다.

 

주의 죽은 자들은 살아나고 그들의 시체들은 일어나리이다 티끌에 누운 자들아 너희는 깨어 노래하라 주의 이슬은 빛난 이슬이니 땅이 죽은 자들을 내놓으리로다(26:19).”

 

살아서 단지 이 땅에서 사는 것으로 끝이라면 우리 생이 얼마나 허망한가? 믿는 자이든 안 믿는 자이든, 기독교인이든 타종교인이든 사람들은 다 안다. 죽음 너머에 다른 세상이 있다는 것을 말이다. 사람 외에 다른 더 위대한 존재, 철학에서 말하는 절대자아 또는 초자아 어떤 미지의 권세 잡은 자가 있음을 말이다. 그래서 무의식적으로도 소원을 빈다. 행운을 바라고 어떤 도움을 원한다. 그러면서도 무신론자라 외치는 이는 무식하기 때문이다.

 

땅의 티끌 가운데에서 자는 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깨어나 영생을 받는 자도 있겠고 수치를 당하여서 영원히 부끄러움을 당할 자도 있을 것이며 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빛나리라(12:2-3).”

 

둘째, 그대로 있었다는 것은 영적인 게으름이다.

 

그 해가 돌아와 왕들이 출전할 때가 되매 다윗이 요압과 그에게 있는 그의 부하들과 온 이스라엘 군대를 보내니 그들이 암몬 자손을 멸하고 랍바를 에워쌌고 다윗은 예루살렘에 그대로 있더라(삼하 11:1).”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저는 사울에게 쫓기는 자였다. 사울이 죽고도 7년 반 동안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이 통치하는 이스라엘과 숱한 내전을 치러야 했다(5:4-5). 저는 천혜의 요새 예루살렘에서 여부스 사람들을 쳐서 시온 산성을 다윗 성으로 삼았다(6). 지향적으로 험준하여 그 땅에는 흉흉한 소문이 돌아 온전치 못한 이들이 지켜도 아무도 넘보지 못할 땅이라 했었다. (8-10). 이 모든 여정이 주의 도우심으로 순탄하였다. 정작 사울의 왕 이스보셋을 죽인 것도 다윗이 아니었다. “여호와께서 주위의 모든 원수를 무찌르사 왕으로 궁에 평안히 살게 하신 때에(7:1).” 그런 저가 안이하게 그대로 있었다.’

 

셋째, 자신의 권력을 남용하지말자.

 

다윗이 사람을 보내 그 여인을 알아보게 하였더니 그가 아뢰되 그는 엘리암의 딸이요 헷 사람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가 아니니이까 하니(11:3).”

 

보내었다는 표현이 11장에서만 연거푸 여섯 번 나온다(3, 4, 6, 12, 14). 여인이 누군가 알아보려 사람을 보냈고, 보내어 데려오게 하였고, 이를 모면하려 사람을 보내 저의 남편을 오게도 하였고, 저를 보내어 전장으로 죽게도 하였다. 본래 한 번 뿌리치지 못한 마음은 덧대고 덧대어져 점점 더 무리한 데까지 이른다. 거짓말의 특징과 같다. 처음에 살짝 비튼 거짓말은 거짓말이 거짓말을 낳으며 끝 간 데 없이 이어지기 마련이다. 이에 권력이 사용된다. 자신의 잘난 미모가, 특출한 장점이, 좋은 배경이 또는 남보다 연약한 자기연민에 이르기까지.

 

강함 뿐아니라 약함도 권력이다. 이를 남용할 때 죄는 덧대어져 둔화된다. 그래서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6:12).” 이 일을 겪고 난 뒤 다윗이 지은 시가 51편에 수록되어 있다.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따라 내게 은혜를 베푸시며 주의 많은 긍휼을 따라 내 죄악을 지워 주소서(51:1).” 우리는 결코 스스로를 어찌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

 

넷째, 주의 은택으로만이 살 수 있다.

 

다윗이 그의 아내 밧세바를 위로하고 그에게 들어가 그와 동침하였더니 그가 아들을 낳으매 그의 이름을 솔로몬이라 하니라 여호와께서 그를 사랑하사(12:24).”

 

오늘 본문은 주의 은혜가 무궁하심을 새삼 일깨운다. 그럼에도 저를 버리지 않으시고 기어이 저에게 아들을 주셨는데, 저가 바로 다음 왕으로 이어질 지혜의 왕 솔로몬이다.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시고,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3:16).” 이를 알 수 있는 게 은혜라.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8:32).”

 

이를 믿는 자가 구원을 얻는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요일 4:10).” 내가 하나님을 먼저 사랑한 게 아니다. 마치 선택을 하듯 여러 종교 가운데 하나를 취한 것으로 기독교인이 된 줄로 안다면 어리석다. 성경은 분명히 밝히고 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5:8).”

 

 

나오는 말

 

선지자 나단을 보내 그의 이름을 여디디야라 하시니 이는 여호와께서 사랑하셨기 때문이더라(12:25).”

 

여기 있는 우리는 여디디야. 하나님의 사랑을 입었다. “여호와의 사랑을 입은 자는 그 곁에 안전히 살리로다 여호와께서 그를 날이 마치도록 보호하시고 그를 자기 어깨 사이에 있게 하시리로다(33:12).” 아무 것도 한 게 없고, 남들보다 결코 더 나은 게 없는데, 어째서 주께서 나를 사랑하셨는가? 나는 그 심오한 비밀을 알 길이 없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 사랑을 받을 자격이 나에게는 없다는 것이다.

 

내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이니까 말이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5:8).” 어떤 기준으로 내가 주의 사랑을 입은 자가 되었는지, 나는 솔직히 알지 못한다. 내가 어찌 나의 부모의 자식이 되었는지, 아무리 과학적으로 증명하려 해도 설명할 길이 없는 것과 같다. 앞서 사울의 노력어린 경건을 봐도 다윗의 경우보다 나았다. 어떻게 태중에 있을 때에 에서와 야곱이 갈렸는지 우리는 증명할 길이 없다.

 

다만 분명한 사실은 한 가지다.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신다.’ 어떤 자들이 이에 반응하는가? 창세 전에 택하사, 예정하신 자들이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1:4-6).”

 

그런 자들의 고백은 한결같다. “내가 죄악 중에서 출생하였음이여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51:5).” 이를 정하게 하실 이는 주밖에 없으시다. “우슬초로 나를 정결하게 하소서 내가 정하리이다 나의 죄를 씻어 주소서 내가 눈보다 희리이다(7).” 그러니 보소서 주께서는 중심이 진실함을 원하시오니 내게 지혜를 은밀히 가르치시리이다(6).”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10).” 다윗의 기도가 내 것이 되면서는 확신한다.

 

하나님이여 나의 구원의 하나님이여 피 흘린 죄에서 나를 건지소서 내 혀가 주의 의를 높이 노래하리이다(14).”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