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304 주일
사무엘하 16:5-14
선으로 갚아주시리라
16:5 다윗 왕이 바후림에 이르매 거기서 사울의 친족 한 사람이 나오니 게라의 아들이요 이름은 시므이라 그가 나오면서 계속하여 저주하고
16:6 또 다윗과 다윗 왕의 모든 신하들을 향하여 돌을 던지니 그 때에 모든 백성과 용사들은 다 왕의 좌우에 있었더라
16:7 시므이가 저주하는 가운데 이와 같이 말하니라 피를 흘린 자여 사악한 자여 가거라 가거라
16:8 사울의 족속의 모든 피를 여호와께서 네게로 돌리셨도다 그를 이어서 네가 왕이 되었으나 여호와께서 나라를 네 아들 압살롬의 손에 넘기셨도다 보라 너는 피를 흘린 자이므로 화를 자초하였느니라 하는지라
16:9 스루야의 아들 아비새가 왕께 여짜오되 이 죽은 개가 어찌 내 주 왕을 저주하리이까 청하건대 내가 건너가서 그의 머리를 베게 하소서 하니
16:10 왕이 이르되 스루야의 아들들아 내가 너희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그가 저주하는 것은 여호와께서 그에게 다윗을 저주하라 하심이니 네가 어찌 그리하였느냐 할 자가 누구겠느냐 하고
16:11 또 다윗이 아비새와 모든 신하들에게 이르되 내 몸에서 난 아들도 내 생명을 해하려 하거든 하물며 이 베냐민 사람이랴 여호와께서 그에게 명령하신 것이니 그가 저주하게 버려두라
16:12 혹시 여호와께서 나의 원통함을 감찰하시리니 오늘 그 저주 때문에 여호와께서 선으로 내게 갚아 주시리라 하고
16:13 다윗과 그의 추종자들이 길을 갈 때에 시므이는 산비탈로 따라가면서 저주하고 그를 향하여 돌을 던지며 먼지를 날리더라
16:14 왕과 그와 함께 있는 백성들이 다 피곤하여 한 곳에 이르러 거기서 쉬니라
이야기 1
압살롬이 자기를 위하여 병거와 말들을 준비하였다. 저는 앞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을 훔쳤다. 압살롬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지 사 년 만에 헤브론으로 가서 왕이 되었다. 사람들의 마음을 빼앗고, 다윗의 모사 길로 사람 아히도벨을 자기편으로 삼았다. 백성들은 저에게 모여들었고 이와 같은 소식을 전해들은 다윗은 도망하였다.
왕은 후궁 열 명을 남겨 왕궁을 지키게 하였다. 다윗은 광야 길로 향하였다. 그때 사독과 그와 함께 한 레위 사람이 하나님의 언약궤를 메고 왔다. 제사장 아비아달도 올라와서 다윗을 따르려고 했다. 다윗은 사독에게 하나님의 궤를 도로 성읍으로 메어 가게 하였다. 왕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인도하여 그 궤와 그 계신 곳으로 다시 돌아오게 하실 것을 확신하였다. “그러나 그가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를 기뻐하지 아니한다 하시면 종이 여기 있사오니 선히 여기시는 대로 내게 행하시옵소서 하리라(삼하 15:26).”
그래서 왕은 제사장 사독과 함께 그 두 아들 아히마아스와 아비아달의 아들 요나단을 데리고 성읍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사독과 아비아달이 하나님의 궤를 예루살렘으로 도로 메어다 놓았다. 어떤 사람이 아히도벨이 압살롬 편에 선 것을 알렸다. 다윗은 아랑곳하지 않고 하나님을 경배하는 마루턱에 이르렀다. 아렉 사람 후새가 옷을 찢고 흙을 머리에 덮어쓰고 다윗을 맞으러 나왔다. 그러나 왕은 저를 전략적으로 예루살렘에 남게 하였다. 사독과 아비아달 두 제사장이 남았으니 함께 후일을 도모하려는 것이었다.
이야기 2
마루턱을 지나자 므비보셋의 종 시바가 나왔다. 저는 안장 지운 두 나귀에 떡 이백 개와 건포도 백 송이와 여름 과일 백 개와 포도주 한 가죽부대를 싣고 다윗을 맞았다. 왕이 시바에게 물었다. “네가 무슨 뜻으로냐?” 시바가 아뢰었다. “나귀는 왕의 가족들이 타게 하고 떡과 과일은 청년들이 먹게 하고 포도주는 들에서 피곤한 자들에게 마시게 하려 함이니이다.” 왕이 물었다. “네 주인의 아들은 어디 있느냐?” 시바가 아뢰었다. “예루살렘에 있는데 그가 말하기를 이스라엘 족속이 오늘 내 아버지의 나라를 내게 돌리리라 하나이다.” 이는 거짓이었다. 아직 그 사실을 모르는 왕은 시바에게 므비보셋의 재산을 돌렸다.
왕이 바후림에 이르렀다. 그때 사울의 친족 중 하나인 시므이라 하는 자가 따라오며 돌을 던지고 저주하였다. 다윗의 용사들이 왕의 좌우에 있었다. “피를 흘린 자여, 사악한 자여, 가거라, 가거라. 사울의 족속의 피를 여호와께서 네게로 돌리셨도다.” 하는 저의 말에 스루야의 아들 아비새가 왕께 여쭈었다. “이 죽은 개가 어찌 내 주 왕을 저주하리이까. 청하건대 내가 건너가서 그의 머리를 베게 하소서.” 그러나 다윗 왕이 답하였다. “너희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그가 저주하는 것은 여호와께서 그에게 다윗을 저주하라 하심이니 네가 어찌 그리하였느냐? 할 자가 누구겠느냐?”
그리고 왕은 아비새와 모든 신하들에게 말하였다. “내 몸에서 난 아들도 내 생명을 해하려 하거든 하물며 이 베냐민 사람이랴! 여호와께서 그에게 명령하신 것이니 그가 저주하게 버려두라. 혹시 여호와께서 나의 원통함을 감찰하시리니 오늘 그 저주 때문에 여호와께서 선으로 내게 갚아 주시리라.” 그러는 동안에도 시므이는 산비탈로 따라가면서 저주하고 그들을 향하여 돌을 던지며 먼지를 날리었다.
이야기 3
압살롬과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루살렘에 이르고 아히도벨도 그와 함께 이르렀다. 다윗의 친구 아렉 사람 후새도 압살롬에게 나아갔다. 압살롬이 아히도벨에게 어떻게 행할지 계략을 물었다. 그 때에 아히도벨이 베푸는 계략은 하나님께 물어서 받은 말씀과 같아서, 다윗에게나 압살롬에게나 그와 같은 권위가 있었다. 아히도벨은 왕이 남긴 후궁들과 더불어 동침하라 하였다. 그러면 백성들이 이를 보고 압살롬과 함께 있어 다윗과 반목한 것을 알고 모든 사람의 힘이 더욱 강하여질 것이라 하였다. 이에 사람들이 압살롬을 위하여 옥상에 장막을 치었다. 압살롬은 온 이스라엘 무리가 보는 앞에서 그 아버지의 후궁들과 더불어 동침하였다.
아히도벨이 다시 계략을 내었다. 만 이천 명의 군사를 이끌고 그 밤에 일어나서 다윗의 뒤를 추적하겠다는 것이었다. 그가 지금 곤하고 힘이 빠졌을 것이니 지금 기습하면 그와 함께 있는 모든 백성들은 도망하고 그럼 다윗 왕만 죽일 수 있다고 하였다. 압살롬은 다시 아렉 사람 후새에게도 물었다. 그러자 후새는 달리 말하였다. “이번에는 아히도벨이 베푼 계략이 좋지 아니하니이다. 다윗과 그 추종자들은 용사라. 들에 있는 곰이 새끼를 빼앗긴 것 같이 격분하였고, 전쟁에 익숙한 사람인즉 백성과 함께 자지 아니할 것입니다. 지금 그가 어느 굴에 숨어 있으리니 혹 우리 중 몇이 엎어지면 그 소문을 듣고 오히려 압살롬을 따르는 자가 패함을 당하였다 할지라. 이는 이스라엘 무리가 다윗은 영웅이요 추종자들은 용사인 것을 앎이니이다.”
덧붙여 말하길, “나는 이렇게 계략을 세웠나이다. 온 이스라엘을 단부터 브엘세바까지 바닷가의 많은 모래 같이 당신께로 모으고 친히 전장에 나가시고 우리가 기습하면 모든 사람을 하나도 남겨 두지 아니할 수 있을 것이요, 또 만일 그가 어느 성에 들었으면 온 이스라엘이 밧줄을 가져다가 그 성을 강으로 끌어들여서 그 곳에 작은 돌 하나도 보이지 아니하게 할 것이니이다.” 그러자 압살롬과 온 이스라엘 사람들이 후새의 계략을 아히도벨의 계략보다 낫다 여겼다.
이런 뒤 후새는 서둘러 사독과 아비아달 두 제사장에게 통보하여 아히도벨이 압살롬과 이스라엘 장로들에게 어떤 계략을 세웠던 일을 알리고, 오늘밤에 광야 나루터에서 자지 말고 아무쪼록 빨리 강을 건너가게 하였다. 이 소식을 듣고 다윗이 일어나 모든 백성과 함께 요단을 건넜다. 한편 아히도벨은 자기 계략이 시행되지 못함을 보고,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일어나 고향으로 돌아가서 자기 집에 이르러 집을 정리하고 스스로 목매어 죽었다.
이야기 4
압살롬은 후새의 계략대로 모든 이스라엘 사람과 요단을 건너 다윗을 쫓았다. 압살롬이 아마사로 요압을 대신하여 군지휘관으로 삼았다. 아마사는 이스라엘 사람 이드라라 하는 자의 아들이다. 이드라가 나하스의 딸 아비갈과 동침하여 그를 낳았으며 아비갈은 요압의 어머니 스루야의 동생이다. 이에 이스라엘 무리와 압살롬이 길르앗 땅에 진을 쳤다.
이에 다윗이 그와 함께 한 백성을 천부장과 백부장을 세우고, 삼분의 일은 요압의 휘하에 두고 삼분의 일은 스루야의 아들 요압의 동생 아비새의 휘하에 넘기고 남은 삼분의 일은 가드 사람 잇대의 휘하에 넘겼다. 그리고 다윗 왕이 말하였다. “나도 반드시 너희와 함께 나가리라.” 하지만 백성들은 극구 만류하였다. 그래서 다윗은 남았고, 모든 백성이 백 명씩 천 명씩 대를 지어 나아갔다. 왕이 명령하였다. “나를 위하여 젊은 압살롬을 너그러이 대우하라.”
이에 백성이 이스라엘을 치러 들로 나가서 에브라임 수풀에서 싸웠다. 이스라엘 백성이 다윗의 부하들에게 패해 전사자가 이만 명에 이르렀다. 그 땅 사면에 퍼져 싸웠으므로 그 날에 수풀에서 죽은 자가 칼에 죽은 자보다 많았다. 압살롬이 다윗의 부하들과 마주치고 도망치다 노새를 탔는데, 그 노새가 큰 상수리나무 번성한 가지 아래로 지날 때에 압살롬의 머리가 그 상수리나무에 걸려 공중에 매달렸다. 한 사람이 이를 보고 요압에게 알렸다. 요압이 지체 없이 달려가 아직 살아 있는 압살롬의 심장을 찔렀다. 이어 요압의 무기를 든 청년 열 명이 압살롬을 에워싸고 쳐 죽였다.
요압이 나팔을 불어 추격을 멈추었다. 그들이 압살롬을 옮겨 수풀 가운데 던지고 그 위에 큰 돌무더기를 쌓았다. 온 이스라엘 무리가 각기 장막으로 도망하였다. 압살롬이 살았을 때 자기를 위하여 한 비석을 미리 마련하였다. 그가 자기 이름을 전할 아들이 없다고 하여 자기 이름을 기념한 것으로 그 비석이 왕의 골짜기에 있고 이제까지 그것을 압살롬의 기념비라 일컫는다.
다윗 왕이 아들 압살롬의 죽음으로 마음이 심히 아파 문 위층으로 올라가 울었다. 그가 올라갈 때에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내 아들 압살롬아. 차라리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면, 압살롬 내 아들아 내 아들아.” 하였다.
이야기 속의 이야기
여러 인물이 뒤섞여 있다. 아히도벨은 압살롬을 따르고 후새와 사독과 아비아달은 다윗을 따랐다. 므비보셋의 종 시바는 거짓을 꾸미고 사울의 친족 시므이는 그 와중에도 다윗을 조롱하고 욕했다. 각자는 자기 이야기를 가지면서 동시에 한 무리의 이야기 속에 속한다. 내 이야기와 너의 이야기는 한데 뒤섞여 우리의 이야기가 된다. 스루야의 아들 요압은 왕의 심정을 헤아리기보다 공명심과 현실적인 선택으로 수풀에 걸린 압살롬을 죽였다. 압살롬의 비극적인 생의 마감은 자기애를 나태내는 아름다움의 상징인 저의 머리털에 의해 끝장났다.
어쩌면 일찍이 아버지 다윗의 방임이 저를 그처럼 자가당착에 빠지게 한 것은 아닐까? 암논이 동생 다말을 강간하고 능멸하였을 때, 동생 다말의 수치에 대해 아버지 다윗이 적절하게 조치를 취했더라면 어땠을까? 이에 앙심을 품고 이년여의 긴 시간을 홀로 복수의 날을 기다렸을 저의 심정을 상상해본다. 기어이 압살롬이 암논을 살해하고 도망쳤을 때도 다윗은 침묵하였다. 삼년여의 긴 시간이 흐른 뒤 요압의 중재로 간신히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한 뒤에도, 다윗은 저를 이년여의 시간 동안 보지 않았다.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의 외조부인 아히도벨은 또 어떠한가? 저가 다윗에게 모사를 이르는 자로 지냈으나 그 심중에는 일찍이 손녀를 함부로 범하고 저의 신랑 우리아를 죽게 하였던 다윗에 대한 분노가 그 속에 남아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래서 압살롬의 반역에 저를 도와 그의 모사꾼으로 곁을 지켰으나 스스로 환멸을 느껴 목을 매달아 자살한 게 아닐까? 저는 다윗의 신복으로 출중한 사람이었다.
성경은 이를 이렇게 정의한다.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막 8:35).” 하나님은 처음 살인자 가인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창 4:7).” 다스리고 지켜야 한다. 개인의 이야기는 서로의 관계를 통해 드러나지만, 그래서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이야기에는 끊임없이 배신과 보복과 자기애만이 남는다.
“내가 신뢰하여 내 떡을 나눠 먹던 나의 가까운 친구도 나를 대적하여 그의 발꿈치를 들었나이다(시 41:9).”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첫째, 믿음과 사랑과 소망으로 산다.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고전 13:13).” 두 말할 것도 없이 ‘믿음과 소망과 사랑’으로 살아야 한다.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로 말이다.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끊임없이 기억함이니(살전 1:3).”
둘째, 서로를 위한 기도로 산다.
“이러므로 우리도 항상 너희를 위하여 기도함은 우리 하나님이 너희를 그 부르심에 합당한 자로 여기시고 모든 선을 기뻐함과 믿음의 역사를 능력으로 이루게 하시고(11).” 그래서 가슴에는 믿음과 사랑의 호심경을 붙이고, 머리에는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써야 한다. “우리는 낮에 속하였으니 정신을 차리고 믿음과 사랑의 호심경을 붙이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자(5:8).” 곧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 5:16).”
혼재 되어 있는 사람과 사람 간의 관계는 무엇으로 의를 구하고 어떻게 선을 세워가야 하는지 참으로 모호할 때가 많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르시되 ‘착한 행실’을 말씀하셨다. 이는 저절로 뚝딱 생겨나는 게 아니다. 아이는 나면서부터 자기 고집으로 똘똘 뭉쳤다. 어릴 때 고집은 평생 간다. 세 살 때 버릇은 여든까지 간다. ‘몸에 밴 어린 시절’을 생활 습관으로 가지고 산다. 그래서 누가 말하길 ‘올 때는 손을 꼭 쥐고, 갈 때는 손을 다 펴고 간다.’ 기어이 살면서 살아봐야 길들여지는 것이 습관이다.
셋째, 덕을 실천하며 산다.
“그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더하라(벧후 1:5-7).” 우리의 착한 행실로 사람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는 삶이었다. ‘더욱 힘써야 한다.’ 믿는다고 하면서도 덕이 없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덕이 무엇인가? 사려 깊은 성품이다. 서로를 헤아리는 마음이다. 이는 저절로 생겨나지 않는다. 그래서 어릴 때 그 고집을 꺾지 않으면 평생을 두고두고 고약하게 군다.
어릴 때 교육이 집중되는 까닭은 그래서다. 바른 지식이 없이는 덕이 불가능하다. 한데 지식이 과하면 더 큰 낭패라. 고학력을 자랑하는 오늘 날 우리 사회의 완악함은 이를 반증하는 좋은 예이다. 지식에 반드시 따르는 것은 절제다. 덮어놓고 좋은 학력 높은 지위를 추구하였던 생이 어떻게 마감되는가는 사회 곳곳에서 여실히 비춰지고 있다. 절제는 인내로 가능하고 참 인내는 경건을 바탕으로 한다. 우리의 경건은 살면서 더불어 사는 형제우애로 나타난다. 이에 사랑을 더하라.
넷째, 온전하심을 추구하며 산다.
왜 그래야 할까?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 5:48).” 모든 실천은 ‘몸에 밴 어린 시절’과의 사투다. 나의 고집과 아집과 오래된 습성과 다투는 일이다. 이를 통해 내게 더하시는 은혜를 깨닫고, 은혜는 결국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데서 소용이 된다. 그러므로 우린 온전하심에 따른 습관으로 길들여져 날마다 주의 영광을 바라는 ‘하던 대로’의 꾸준함이 필요하다.
“다니엘이 이 조서에 왕의 도장이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 집에 돌아가서는 윗방에 올라가 예루살렘으로 향한 창문을 열고 전에 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의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단 6:10).”
나오는 말
오늘 본문은 다윗이 다윗이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어려움과 시련을 겪어야 했는가를 보여준다. 저에게 그 숱한 광야가 없었다면 과연 오늘 본문과 같은 영성이 가능했을까? 시므이는 상대도 안 되는 인물이었다. 앞서 나발에 대해 화를 내어 그 일가를 몰살하려 했던 다윗과는 심히 대조적이다. 성경은 이와 같은 내용을 가감 없이 기록하고 있다.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우리로 하여금 인내로 또는 성경의 위로로 소망을 가지게 함이니라(롬 15:4).”
다윗은 비로소 이와 같이 고백한다. “혹시 여호와께서 나의 원통함을 감찰하시리니 오늘 그 저주 때문에 여호와께서 선으로 내게 갚아 주시리라 하고(12).” 저는 인내로 또 말씀의 위로로 소망을 삼은 것이다. 우리는 어찌 살아야 할까? 성경과 기도가 필수라. “그들에게 일어난 이런 일은 본보기가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를 깨우치기 위하여 기록되었느니라(고전 10:11).” 곧 오늘 저의 이야기는 우리의 삶에 본보기가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너희에게 일러 주고 너희를 인도하던 자들을 생각하며 그들의 행실의 결말을 주의하여 보고 그들의 믿음을 본받으라(히 13:7).”
더불어 우리는 누군가에게 본이 되어야 한다. 누가 우리의 선행을 보고 또 그 삶의 자세를 통해 하나님을 알고자 하는 마음이 생겨날 수 있도록. 그러니 “누구든지 네 연소함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고 오직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에 있어서 믿는 자에게 본이 되어(딤전 4:12).” 살아야 한다. 다시 말하지만 성경이다. 말씀을 기초로 하여, 저의 이야기를 나의 이야기로 가져오고 우리의 이야기 가운데서 하나님의 이야기가 들려져야 하는 것이다.
곧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히 10:24-25).” 이를 선으로 갚아주시리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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