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말씀하신 자라 일렀으되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가 오실 길을 곧게 하라 하였느니라
마태복음 3:3
은총의 표적을 내게 보이소서 그러면 나를 미워하는 그들이 보고 부끄러워하오리니 여호와여 주는 나를 돕고 위로하시는 이시니이다
시편 86:17
희한한 일이다. 나도 몰랐는데 내 입에서 그런 소리가 나왔다. 우리는 ‘외치는 자의 소리’라. 소리는 허공에 흩어져 다 사라지는 것 같으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가 오실 길을 곧게 하라.’ 하는 말씀을 사명으로 이루려 하시는 것이다. 아이 문제로 아이와 이야기를 하였고, 그 이야기를 아이엄마에게 들려주어야 했는데, 그 ‘소리’는 고스란히 나를 향한 말씀이 되어 되돌아왔다. 곧 우리는 기도하는 사람들이라.
아무 소용도 없을 것 같으나, 오히려 일은 점점 꼬여가서 뒤죽박죽이 되어 어디서 듣도 보도 못한 사울의 친척 시므이가 튀어 나와 돌을 던지며 모래를 뿌리고 욕을 해댄다 해도 것 또한 주의 뜻이라. “혹시 여호와께서 나의 원통함을 감찰하시리니 오늘 그 저주 때문에 여호와께서 선으로 내게 갚아 주시리라 하고(삼하 16:12).” 주께 향한 굳건한 신뢰만 있으면 된다. “다윗과 그의 추종자들이 길을 갈 때에 시므이는 산비탈로 따라가면서 저주하고 그를 향하여 돌을 던지며 먼지를 날리더라(13).”
오전에 읽던 말씀에 등장하는 여러 인물을 생각하였다. 아들 압살롬의 반역에 쫓겨 도망치는 다윗과 저의 친구 후새와 저의 조력자 사독과 아비아달과 가드 사람 잇대와 끝내 압살롬의 반역에 합류한 다윗의 모사였던 밧세바의 외조부 아히도벨과 스루야의 아들들. 곧 한 이야기 안에 수많은 등장인물들이 각양각색의 사연과 저들의 이야기가 뒤엉켜 있는 듯 하나 그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라는 데 우리의 확실한 신뢰와 믿음이 바탕을 이룬다.
악의 논리는 자명하다. 더더욱 악해지는 것이다. “아히도벨이 압살롬에게 이르되 왕의 아버지가 남겨 두어 왕궁을 지키게 한 후궁들과 더불어 동침하소서 그리하면 왕께서 왕의 아버지가 미워하는 바 됨을 온 이스라엘이 들으리니 왕과 함께 있는 모든 사람의 힘이 더욱 강하여지리이다 하니라(21).” 밧세바의 외할아버지로 다윗의 모사였던 이가 어쩌자고 압살롬의 반역에 가담하여 저에게 돌아선 것일까? 혹시 전에 밧세바를 범하였던 다윗의 소행에 대한 앙심이 남아 있던 것은 아닐까?
이내 악의 운명은 참혹하여서, “아히도벨이 자기 계략이 시행되지 못함을 보고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일어나 고향으로 돌아가 자기 집에 이르러 집을 정리하고 스스로 목매어 죽으매 그의 조상의 묘에 장사되니라(17:23).” 숨 가쁘게 전개되는 여러 인물과 인물의 등장은 우리를 궁지로 몰아넣는 것 같고 판세는 더 악화되어 모든 게 허무하게 끝장날 것 같지만, 다윗의 영성은 점점 성숙해지고 있었다. 그 가운데서 주의 뜻을 신뢰하고 의뢰하며, 그래서 스스로 나서서 억울함을 풀고 자기감정대로 하지 않았다.
주께서 갚아주실 것이다. 어쩌면 나는 은연중에 오전에 읽은 이 말씀을 붙들고 오후께 아이엄마와 통화하면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 이 말을 건네고 있었다. 안 믿는 가정에 시집 와서 안 믿는 시부와 신랑을 건사하는 일이란 얼마나 고달프고 황망하겠나. 그래서 자녀들만 보고 저들을 신앙 안에서 바로 세워가길 바라는데, 녀석들도 이제 머리가 굵었다고 더는 교회에 가려하지 않고 안 믿는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길을 따르려고 하니.
답답함에 안달을 부리고 안달은 부지불식간에 강압적인 태도를 취하게 되고, 이는 실제 그만큼 우리의 확신이 또 심정이 나약하기 때문이라는 반증일 뿐이니.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 다윗은 이제 그 원리를 알게 된 것일까? “또 다윗이 아비새와 모든 신하들에게 이르되 내 몸에서 난 아들도 내 생명을 해하려 하거든 하물며 이 베냐민 사람이랴 여호와께서 그에게 명령하신 것이니 그가 저주하게 버려두라(삼하 16:11).”
우리를 못 살게 구는 것까지도 하나님이 명령하신 것이라. 저가 선을 이루시고자 하심이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사랑하시므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발람의 말을 듣지 아니하시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저주를 변하여 복이 되게 하셨나니(신 23:5).” 주가 사랑하심을 붙드는 신앙. 곧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룰 것이라는 확신. 아이는 학원의 지나친 스케줄 때문에 눈물을 보였고, 그런 어려움을 엄마에게 선생님이 말해주면 안 되는가, 하고 구조를 요청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이루어진 우리의 대화 속에서 나는 저이에게, 아니 나 자신에게 ‘하나님이 그리 하시는 일에 대하여’ 말해주고 있었다. 기어코 우리는 우리 몸의 행실을 죽이기까지,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롬 8:13).” 내 ‘몸에 밴 어린 시절’을 벗어버리지 않는 이상 저들로 인한 고달픔만 하소연하며 시름이 깊어질 따름이라. 그러실 거 없다, 주께 맡긴다는 것은 우리로 기도하는 사람이 되게 하심이라, 말해주었다.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14).” 우리 기도의 능력이 크다. “그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백하며 병이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큼이니라(약 5:16).” 그래봐야 무슨 소용인가, 싶을 때도 있으나, “주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의 귀는 의인의 간구에 기울이시되 주의 얼굴은 악행하는 자들을 대하시느니라 하였느니라(벧전 3:12).” 우리는 주 앞에 간구하는 사람들이라. 저들의 말을 들어주고 위하여 기도하는 일을 하는 사람이라.
‘광야의 외치는 자의 소리’ 같아서 공허할 따름이고 그래봐야 별 볼일 없는 것 같지만, 그래서 때론 지치고 또 실의에 빠지기도 하지만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가 오실 길을 곧게 하라.’ 우리에게 두신 사명이었다. 오늘 본문을 나는 그리 곱씹는다. 그리고 기도하기를, “은총의 표적을 내게 보이소서 그러면 나를 미워하는 그들이 보고 부끄러워하오리니 여호와여 주는 나를 돕고 위로하시는 이시니이다(시 86:17).” 한심할 정도로 때론 처량한 것 같으나 저들 안에는 어떤 경외심이 담겨 있다는 걸 잘 안다.
저이도 놀라워하는 게 아침마다 시아버지가 차를 한 잔 하며 이런저런 말을 함께 나눈다는 것. 절대 그러실 분이 아닌데 심지어 자기 속엣 이야기를 하신다고 하니 놀라운 것이고. 나아가 더는 신랑이 주일에 또 수요일에 예배에 가는 것을 뭐라 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큰 기적 같다는 고백을 들으면서. 아, 내가 하는 일이 아니었다는 것을 새삼 깨닫는다. 오만 군상이 한데 뒤섞여 각각 제 목소리를 내는 아우성 같다 해도, 그렇지 않은 것이다. ‘은총의 표적을 내게 보이소서.’ 그것이 저들에게 증거가 되게 해주시기를 위해 기도한다.
고로 우리는 왕 같은 제사장이라.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9).” 고을을 다스릴 권세를 주신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 1:12).” 단지 주의 심판을 모면하고 천국에 들어가는 것으로 만족하는 위상이 아닌 것이다. 우리로 재판한 권세를 주신다.
그런 위인이 언제까지 저들 재판에 마음만 휘청거리고 있을 것인지. 나는 저이에게 ‘위하여 기도하자’는 제안을 하였다. 그러자면 먼저 벗어버릴 건 좀 벗어버리자고 말해주었다.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엡 4:22-24).” 다른 엄마들이 하는 것처럼 자녀들을 간섭하려 들면 안 된다. 더 나은 학원을 전전긍긍하며 아이를 보내놓고 발을 동동 구르는 참견과 안달을 부려서는 안 된다.
의연하게, 조금은 바닥을 치게, 그래야 우린 지금 이 혼돈의 시대를 치고 올라올 수 있을 것이다. 부끄럽고 창피할 정도로 온 사회가 온전한 곳이 없다. 다 썩었고 부패해서 그처럼 덕망 높고 존경 받는 위인들이 이중적인 삶을 살았다니! 차마 어찌 옮겨오기도 민망한 저들의 행적을 두고 깊은 한숨만 인다. 저들이 못 배워서 그런가? 학벌이 짧아서 그런가? 가진 재산이 없어서 그런가? 남들에게 무시당하는 삶이어서 그런가? 아니다. 저들은 오히려 우리 사회의 지도층이라. 위정자들이라. 그러니 온통 난리다. 이제 누구에 대한 '미투' 글을 읽기가 두렵다.
‘지성에서 영성으로’를 부르짖던 이가, 회개를 운운하며 교회에서 강연을 멋들어지게 하던 이가, 문화와 예술을 쥐락펴락하던 이가, 모든 이가 썩어 문드러져 곪을 대로 곪아 악취를 풍기고 있던 것을. 저는 그럴 사람이 아니라고 스스로 되뇌며 고개를 갸우뚱거려본들. 수많은 군상이 등장하는 것 같고, 각계각층의 인사들이 나름의 주장과 가치를 운운하며 저마다의 목소리를 내는 듯이 보이지만, 우린 이 죽음의 세상에서 부활의 백성으로 살아야 한다!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엡 5:8).” 누구를 탓할 거 없다. 내버려두라. 다만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9).” 우리의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을 맺게 하려 하심이다. 그러니 한 번 “주를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10).” 온전히 주만 바란다는 게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인가? 그러니 “너희는 열매 없는 어둠의 일에 참여하지 말고 도리어 책망하라(11).” 그것은 “그들이 은밀히 행하는 것들은 말하기도 부끄러운 것들이라(12).”
우리는 빛의 자녀들이다.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8).” 이 모든 상황과 사건과 난리법석 가운데 “그러나 책망을 받는 모든 것은 빛으로 말미암아 드러나나니 드러나는 것마다 빛이니라(13).” 잘난 줄 알았던 이들이 알고 보니 썩었다. 아름답고 화려한 성공적인 인생인 줄 알았더니, 위선과 거짓과 참혹한 부끄러움뿐이라. “그러므로 이르시기를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너에게 비추이시리라 하셨느니라(14).”
고로 우리는 죽은 사회에서 부활을 사는 사람들이다. 뭣도 아닌 것 같고 쥐뿔도 없는 것 같으나, 아들 압살롬의 반역에 줄행랑치며 쫓겨 가면서도 다윗은 붙든 것이다. 놔두라, 하나님께서 그리하신다. “무릇 주는 위대하사 기이한 일들을 행하시오니 주만이 하나님이시니이다(시 86:10).” 그러므로 “여호와여 주의 도를 내게 가르치소서 내가 주의 진리에 행하오리니 일심으로 주의 이름을 경외하게 하소서(11).”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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