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전봉석 2018. 3. 1. 07:30

 

 

 

그들이 곧 그물을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그들이 곧 배와 아버지를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마태복음 4:20, 22

 

여호와께서 민족들을 등록하실 때에는 그 수를 세시며 이 사람이 거기서 났다 하시리로다 (셀라)

시편 87:6

 

 

 

하루 종일 어둑하였고 봄을 재촉하는 비가 내렸다. 모두는 바쁜데 나는 한가하였다. 기어이 증거가 나오고 누구의 증언이 나오면서, 그동안 유명인이었던 이들이 추풍낙엽처럼 떨어졌다. 예전에 TV프로 ‘아빠를 부탁해’를 재미나게 봐서 그런가, 저들 이야기가 여간 신경이 쓰이는 게 아니었다. 날이 궂어 몸은 아팠고 마음은 꾸물거리는 날씨만큼 어려웠다. 도대체 우리의 사람됨을 어쩌면 좋을까? 각계각층으로 번지고 있는 ‘미투 운동’이 이제 두렵기조차 하였다. 누군들 자유로울 수 있을까?

 

그런 와중에 주가 찾아오신다. 나를 따르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죽은 자들이 그들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니라(마 8:22).” 저들 이야기는 저들 이야기로 두고 ‘너는 나를 따르라.’ 이때 그럴 수 있은 공통점을 오늘 말씀에서 볼 수 있었다. “그들이 곧 그물을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저의 생업이다. 먹고 사는 문제다. “그들이 곧 배와 아버지를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나름의 인륜이고 도덕이다. 이루어놓은 성과다.

 

이를 ‘버려두고’ 아니 ‘곧’ 앞뒤 가릴 것도 없이 ‘예수를 따르니라.’ 나는 이제 그럴 수 있는 비밀이 무엇인지 확신한다. 내 의지나 취지가 아니었다. 궁지에 몰려 어쩔 수 없이 두 손 들고 수긍하는 태도도 아니었다. 그럴 수 있는, 그럴 수밖에 없는 강권하심의 은혜였다. 이를 오늘 시편은 ‘주께서 등록하실 때, 사람들이 거기서 났다.’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여호와께서 민족들을 등록하실 때에는 그 수를 세시며 이 사람이 거기서 났다 하시리로다 (셀라)(시 87:6).”

 

어떤 자격조건에 맞아서 또는 성과에 따른 결과로써의 부르심 또는 등록이 아니었다. 아, 그렇지. 불가항력적인 은혜. 왜 저들을 또한 나를 이처럼 부르셨는가 하는 회의할 겨를도 없이 <곧, 버려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이 땅에 사는 동안 내남없이 서로 편을 가르고 교회도 나서서 좌편향이니 우편향이니 하며 세상 풍조에 동조하고, 목사의 성향이 마치 그 교회의 성격을 좌우하듯 구는 데서는 찾아보기 힘든 일이 되었다.

 

연마하고 갉고 닦아 힘이 있고 능력이 있는 이에게 기회를 주는 세상 기준이 그대로 교회에 적용이 되었고, 그래서 저마다의 구호가 ‘준비된 자를 쓰신다’는 논리로 세상과 다를 바 없이 교회를 둘로 나누고 양극화는 심화되었다. 누군 개인의 거룩을 강조하며 사회 정의를 외면하고 누구는 사회 정의를 부르짖느라 개인의 거룩을 등한시하고. 정의를 부르짖느라 자유의지를 주창하고, 거룩함을 모색하느라 이원론적인 사고에 빠져버렸다. 사람은 결코 선하지 않다. 누구도 절대 부끄럽지 않은 존재란 없다. 스스로를 빗대어 하는 말은 믿을 게 못된다.

 

어떻게 저들은 예수께서 나를 따르라, 하실 때 곧 모든 걸 버려두고 따를 수 있었을까? 이는 불가항력적인 일이라, 자기과시나 어떤 자긍심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러고 보니 오늘 우리 사회의 특징을 한 마디로 정의하라면 자기애에 빠진 시대이겠다. 자기 자신에 대해, 또는 가족에 대해, 소속된 기관과 연합하고 있는 활동에 대해 어찌나 자부심이 강한지. 그와 같은 밀착의 시대가 오늘 우리 사회를 썩어지게 한 것은 아닐까?

 

덮어주고, 모른 체 하고,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하다는 논리로 ‘나만 아니면 돼’ 하는 식의 판단과 기준이 빚어낸 그야말로 괴물이 득시글거리는 시대가 되었다. 나름 저마다의 지식과 지성을 자랑삼아 살던 사회가 이 꼴이 무엇인지. 저 옛날 아테네 시절도 아니고, 저들은 이교도 중심으로 성적 향락을 제단의 향연으로 올렸다. 남자는 더 건강하고 젊은 남자와 어떻게 성교를 해야 하는지 동성애에 따른 매뉴얼이 있었다. 원치 않은 자식은 들짐승에게 내주었다. 동물과 교접하고 이를 과시하며 영웅처럼 떠받들었다. 서로를 동경하는 기쁨의 반증은 성교였다. ‘비화밀교’의 시대였다.

 

우연히 누구 노래에 원색적인 표현과 욕이 섞인 걸 듣고 깜짝 놀랐다. 아이들은 ‘19금’이라며 따라 불렀다. 랩에 섞인 온갖 추태와 더러움을 아이들은 걸러내지 못하고 흉내 내고 있었다. 춤이 묘사하는 성적인 농락과 야비한 조롱을 아이들은 눈치도 못 챈 채 사타구니를 쓸어 올리며 몸을 흔들었다. 딸보다 어린 아이들의 농밀한 몸짓과 현란한 음악에 중년의 사내들은 침을 꼴딱 삼킨다. 표현의 자유가 우리의 잠들었던 자유의지를 부추기며 장사를 일구고 있는 것이다. 저들 소속사와 기획사는 떵떵거리며 돈방석에 앉았다.

 

어느 사회학자가 진단하기를 신용카드가 생겨나면서부터 우리에겐 더 이상 인내가 남아 있지 않다고 한다. 실제 드러난 현상은 개인부채가 모두 어마어마하다. 우선 쓰고 볼 일이다. 가상화폐마저 우리의 미래를 들썩이게 하고 있다. 아, 그래서 성경은 사랑의 첫마디를 인내로부터 시작하신 것이구나!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고전 13:4).”

 

오래 참는 게 미련해져버린 세상이다. 사랑의 가장 든든한 밑바탕은 오래 참음이었다. 거기서 온유가 나온다. 그럴 수 있는 게 겸손이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마 11:29).” 저리 곧 따라나선 이들에게 예수님은 말씀하고 계신다. 예수의 멍에를 메고 예수께 배우라. 예수의 마음은 온유하고 겸손하시다. 오늘 아침, 사탄에게 시험을 받으시는 모습에서도 드러난다.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 사십 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신 후에 주리신지라(4:1-2).” 그러실 필요가 전혀 없는 분이셨다. 그럼에도 저의 시험을 다 받아내신다.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 하는 저의 시험에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고 응수하셨다. ‘거룩한 성으로 데려다가 뛰어내리라.’ 하실 때도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고 말씀하셨다. 이내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할 때에도,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셨다.

 

예수님께는 온전히 성부 하나님만이 전부였다. 성부 하나님은 온전히 예수로 인하여서 기쁨을 누리신다. 그러신 이가 말씀하셨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라.” 다들 저마다 고약하게 일하고 처절하게 쉼을 갈구한다. 먹고 죽자, 마시고 죽자, 하는 식으로 서로의 단합을 강조하는 것은 부추겨 비화밀교와 같이 은밀하고 농밀한 쾌락의 향연을 꿈꾸기 때문이다.

 

하긴 철학의 대가 플라톤 역시 <향연>이란 책에서 서로의 ‘동반자적인 관계’를 높이 사고 경축하였다고 하니, 되레 나는 오늘 또한 부추기는 ‘미투’의 피해자가 더 큰 피해를 입고 남은 평생을 숨어살지나 않을까 심히 우려된다. 더는 순결이 무형지물이 된 세상에서 말이다. 절제가 수반돼야 하고 이는 서로를 위하는 마음에서 위로가 될 터인데.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골 3:14).”

 

우리는 희생 대신 사랑을 운운하고 사랑 대신 용서를 뇌까리며, 사랑도 아니고 용서도 아닌 관용이라는 애매모호한 방식으로 쉬쉬 그만 덮으려 들 게 뻔하다. 자꾸 들춰봐야 먼지 안 나는 사람이 어디 있겠나, 하면서. 구린 게 많을수록 관용을 부르짖으며, ‘나는 이쪽 길로 갈 테니까 너는 저쪽 길로 가라.’ 하는 식으로 서로 못 본 체 해주는 고질적인 미덕을 발휘할 게 뻔하다. 그냥 서로 어깨를 으쓱하면서 마치 몰랐다는 듯이 입을 삐죽거리곤 시치미를 떼 주면서. 왜냐하면 저의 부끄러움은 나의 부끄러움을 들추어내게 돼 있어서 말이다.

 

사랑의 하나님이 어떻게 그러실 수 있죠? 하는 따위의 논고를 볼 때면 대체 그 사랑을 저들은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 것인지 의구심이 든다. 사랑보다 잔인하고 모진 게 또 있을까? 나는 요 며칠 사랑 장인 고린도전서 13장을 읊조리듯 되뇌어 외우면서 사랑에 대한 우리의 깊은 오해를 툭툭, 터져 나오는 사회 사건을 통해 더욱 확신할 수 있었다. 그리고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 죽었다 깨어나도 우리는 본디 그 사랑의 사랑을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

 

오늘 본문은 제자들이 그렇다고 예수를 그처럼 따라 나선 것에 대해 깊이 묵상하게 만드신다. 어떻게 생업인 그물을 버려두고, 또 배와 아비를 버려두고 그것도 곧바로 예수를 따를 수 있었을까? 사랑은 스스로 한 쪽 팔과 다리를 잘라내는 일이다. 자꾸 유혹의 눈길로 시선이 쏠리는 데 있어 스스로 자기 눈을 뽑아내는 일이다. 사랑은 잔인한 것이어서 오래 참음이 아니고는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이 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이르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시더라(마 4:17).” 새벽이 가까운 만큼 밤은 깊은 법이라.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그들이 곧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를 따르니라(19-20).” 부르심에 저절로 응하여지는 일. 때론 형이상학적인 아니 불가항력적인 이 은총이 사랑이다. “그들이 곧 배와 아버지를 버려두고 예수를 따르니라(22).” 이를 어찌 설득력 있게 설명할 수 있을까?

 

내가 안고 붙들고 의지하고 힘쓰던 것을 버려둘 수 있는 것. 이를 오늘 시편은 명쾌하게 정의한다. “그의 터전이 성산에 있음이여(시 87:1).” 궁극의 바탕이, 사랑의 근원이, 나의 모든 수고와 애씀이, 나의 터전이 성산에 있음이었다! “시온에 대하여 말하기를 이 사람, 저 사람이 거기서 났다고 말하리니 지존자가 친히 시온을 세우리라 하는도다(5).” 친히 주께서 우리를 세우시리라. 곧 “여호와께서 민족들을 등록하실 때에는 그 수를 세시며 이 사람이 거기서 났다 하시리로다 (셀라)(6).”

 

그러므로 “노래하는 자와 뛰어 노는 자들이 말하기를 나의 모든 근원이 네게 있다 하리로다(7).”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