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마태복음 5:16
주께서 내가 아는 자를 내게서 멀리 떠나게 하시고 나를 그들에게 가증한 것이 되게 하셨사오니 나는 갇혀서 나갈 수 없게 되었나이다
시편 88:8
어지러운 세상에서 우린 그럼 어떻게 살아야 할까?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고전 13:13).” 먼저는 믿음과 소망과 사랑으로 살아야 한다.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로 말이다.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끊임없이 기억함이니(살전 1:3).” 그리고 서로를 위한 기도로 산다.
“이러므로 우리도 항상 너희를 위하여 기도함은 우리 하나님이 너희를 그 부르심에 합당한 자로 여기시고 모든 선을 기뻐함과 믿음의 역사를 능력으로 이루게 하시고(11).” 그래서 우리의 가슴에는 믿음과 사랑의 호심경을 붙이고 머리에는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써야 한다. “우리는 낮에 속하였으니 정신을 차리고 믿음과 사랑의 호심경을 붙이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자(5:8).”
곧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 5:16).” 덕을 실천하는 일이겠다. “그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더하라(벧후 1:5-7).” 우리의 착한 행실로 사람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는 삶이었다.
결론은 우리의 온전함을 이루려고,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 5:48).” 그리하여 이루어질 ‘팔복의 나라’에서 살게 하시려는 것임을 알겠다. 그 나라에서는 심령이 가난하지 않았던 이가 없다. 애통해하지 않았던 이는 없고, 의에 주리고 목마르지 않았던 이도 없고, 온유하고, 긍휼하고, 마음이 청결하고, 화평하지 않은 이는 없다. 저마다의 힘겨움으로 그 은혜는 배가 된 나라이다.
그러므로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부터 나느니라(37).” 너무 나서는 것은 악이다. 기도와 말씀이 정치논리와 이 땅에서의 진영논리로 함몰되어 버린 기독교는 추할뿐이다. 마치 내가 아니면 안 될 것 같은 그릇된 맹세와 각오와 신념이 도를 넘어섰다. 이는 여전히 녹지 않은 소금이다. 본래의 맛을 잃은 것이다. 타들어가지 않는 빛이다. 인공적으로 비추는 거짓이다. 우리는 세상의 소금이어야 한다. 빛이어야 한다. 드러날 것을 드러내야 하고 부패를 막고 맛을 더해야 한다.
며칠째 읽고 있던 책, 톰 라이트의 <그리스도인의 미덕>을 몇 마디로 요약하자면 이와 같을 거였다. 오늘 말씀도 이에 따른 이해를 더하시는 것 같다. 여느 날과 다를 바 없이 하루를 보냈다. 어디를 좀 갈까, 하였지만 바람은 불고 마음은 불안하였다. ‘나는 갇혀서 나갈 수 없게 되었다.’ “주께서 내가 아는 자를 내게서 멀리 떠나게 하시고 나를 그들에게 가증한 것이 되게 하셨사오니 나는 갇혀서 나갈 수 없게 되었나이다(시 88:8).”
답답하고 그래서 때론 고통스럽기도 한데 그것으로 얻는 유익이 더 크다. 아내와 딸애가 나와 같이 점심을 먹고 교회로 다시 올라갔다. 덕을 세우는 일, 선을 이루며 사는 일이란 먼저는 항상 말씀을 곁에 두고 사는 것을 말한다. 성경은 이정표와 같다. 말씀 없는 선과 의는 그 정도를 가늠할 수 없어 위태롭다. 언제든 엇나가기 십상이다. 그래서 성경의 여러 인물은 우리의 표준이 되기도 하고 교훈을 더하기도 한다. 저들을 모방하고 답습하는 게 아니라, 저들이 바라고 의지하였던 바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붙들게 된다.
이를 삶으로 재연하며 사는 일이겠다. 실천은 막상 고약한 것이어서 몸에 밴 나의 고집과 아집과 오래된 습성과 다투는 일이다. 이를 서로가 돕는 게 이 땅에 두시는 공동체의 역할일 테고 서로는 서로에게 본이 되어 우리 이야기에서 하나님의 뜻을 읽게 하는 것이다. 내게 더하시는 은혜는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게 하려 하심이다. 어떠하든 이제는 몸에 밴 선한 습관을 좇아, 하늘이 두 쪽이 나도 ‘하던 대로’ 하는 것이다.
“다니엘이 이 조서에 왕의 도장이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 집에 돌아가서는 윗방에 올라가 예루살렘으로 향한 창문을 열고 전에 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의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단 6:10).” 내 처지와 상황이 어떠하든, 당장 무슨 일이 겹쳐 죽게 생겼다 해도, 성경은 우리가 가야 할 길을 제시하신다.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우리로 하여금 인내로 또는 성경의 위로로 소망을 가지게 함이니라(롬 15:4).”
그러므로 말씀과 기도는 필수라. 성경의 여러 인물들과 저들 군상의 행태와 그 소소한 우여곡절이 말세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길을 제시한다. “그들에게 일어난 이런 일은 본보기가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를 깨우치기 위하여 기록되었느니라(고전 10:11).” 만일 성경이 없었다면 어땠을까? 이를 무시할 때, 또는 축소하고 와전하여 확대하고 재생상할 때, 성경 대신 태극기를 들고 기도와 찬송은 변질되어 누구를 저주하고 원망하는 데 쓰인다.
두렵고 떨리는 일이다. 성경을 접하기 전에 사람들이 먼저 대하는 게 나였다면 나의 믿음이 본이 돼야 한다. 관심과 또는 호기심에 이끌려 주를 알고자 하는 마음을 더할 수 있도록, “하나님의 말씀을 너희에게 일러 주고 너희를 인도하던 자들을 생각하며 그들의 행실의 결말을 주의하여 보고 그들의 믿음을 본받으라(히 13:7).” 믿음의 여러 인물을 열거하고 성경은 이와 같이 말씀하신다. 나만 그러는 게 아니다. 허다하였다.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12:1).”
아, 그래서 바울은 그의 삶을 본보기로 내어준 것이다(고전 10:31-11:1). 단순한 모방이나 이상의 것이 아니다.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세계의 이야기가 아니다. 날마다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치고 복도에서 인사를 나눠야 하는 이웃에게다. 같은 공간을 사무실로 쓰는 이들에게 나로 인하여 그리스도의 향기가 나타나도록 하는 삶이겠다. “누구든지 네 연소함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고 오직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에 있어서 믿는 자에게 본이 되어(딤전 4:12).”
오늘 본문은 이를 더하시는 주의 말씀이다. 때론 내가 “곤란으로 말미암아 내 눈이 쇠하였나이다 여호와여 내가 매일 주를 부르며 주를 향하여 나의 두 손을 들었나이다(시 88:9).” 어디 어렵고 힘든 육신의 어려움과 생활의 곤고함으로 겪는 불편의 날들이라 해도 그래서 내가 매일 주를 부른다. 내 두 손을 든다. 비록 “주는 내게서 사랑하는 자와 친구를 멀리 떠나게 하시며 내가 아는 자를 흑암에 두셨나이다(18).” 더 곤란한 처지에 놓인 것 같으나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 5:48).”
나는 이제 말씀을 따라 말씀을 묵상하는 일에 그 귀하고 소중함을 잃고 싶지 않다. 과연 나는 심령이 가난한 자로 살 수 없을 터인데 그럴 수 있게 하심으로 천국이 내 안에 건설되고 있음을 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아이들과 그 가정을 위해 애통해하는 마음을 더하심으로 더 큰 위로를 사모하게 하신다. 결코 내 의지로 온유한 자가 될 수 없다는 사실 앞에 나는 애통해한다. 그러다 불현 듯 오늘 나에게 허락하신 땅이 넓고 귀함을 깨달아 더욱 송구하고 감사하여 온유하게 된다.
말씀을 더 바라고 저들 믿음의 사람들처럼 살고자 하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로 살게 하심으로 나의 형편과 사정에도 굴하지 않고 배부르다. 오히려 나보다 못한 이를 돌아보며 저를 위해 안타까움으로 기도하는 긍휼을 더하심으로 긍휼히 여김을 받는 것이다. 늘 거짓되고 더러운 마음을 씻어내고 청결하기를 바람으로 하나님을 보게 된다. 내 안의 화평이 내 곁의 사람들을 화평하게 함으로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저들로 알게 할 수 있다.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것이 천국을 소유하는 일이었다.
어렵고 힘들다가도 기뻐하고 즐거워한다. 하늘의 상을 알기 때문이다. 교회를 이루어간다는 것은 참으로 함의 된 내용이 두터워서 단순히 유형의 교회만이 아니라 내 안에 성령을 모시고 사는 무형의 교회를 포함한다. 노아의 때에서부터 아브라함으로 이어져 오늘 우리 가족에게까지 이르려 함께 교회에 나아오는 어린아이들에게까지, 교회는 이내 서로에게 본이 되며 성령의 열매를 맺어가는 일이겠다. 서로 돌아보아 격려하면서 말이다.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히 10:24-25).” 그러므로 나는 권하는 자로 세우심을 받았으니, 먼저는 말씀을 바르게 붙드는 자여야 하고 다음은 이를 삶 가운데서 나타내는 것이어야 한다. 지극히 평범하고 일상적인 삶이겠으나, 묵묵히 주어진 데서 순응함으로 순종을 이루어가는 일이었다.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 5:16).” 말씀을 다시 우물거리고 되씹는다. 이는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48).” 나의 온전을 이룰 수 있게 하시는 게 주의 은혜이고 이 은혜의 최종적인 목표는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일이다. 그러기까지 그 생활이란 막연한 것이 아니어서 때론 내 눈을 내가 빼어 버리는 일이며(29), 오른 손을 스스로 잘라내는 일이다.
아, 그래서 “주께서 내가 아는 자를 내게서 멀리 떠나게 하시고 나를 그들에게 가증한 것이 되게 하셨사오니 나는 갇혀서 나갈 수 없게 되었나이다(시 88:8).” 그러므로 “내가 매일 주를 부르며 주를 향하여 나의 두 손을 들었나이다(9).” 이로써 “여호와여 오직 내가 주께 부르짖었사오니 아침에 나의 기도가 주의 앞에 이르리이다(13).”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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