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주의 성실하심을 내 입으로 대대에 알게 하리이다

전봉석 2018. 3. 3. 07:52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마태복음 6:24

 

내가 여호와의 인자하심을 영원히 노래하며 주의 성실하심을 내 입으로 대대에 알게 하리이다

시편 89:1

 

 

 

한데 늘 두 마음이 같이 있어 이쪽은 저쪽을 건드리고 저쪽은 이쪽을 어렵게 군다. 좀 나은 모습으로 주를 바라기를 원하는 마음과 불쑥 이는 짜증이 같이 있다. 사람들이 몰라도 상관없다는 생각과 알아주지 않는 데 따른 실망이 뒤섞인다. 보다 예민하게 주를 바라고 의지하려고 들면 영락없이 미련은 또 의혹은 나의 뒤를 잡는다. 그래서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무엇이든지 밖에서 사람에게로 들어가는 것은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되 사람 안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 하시고(막 7:15-16).”

 

곧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둑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질투와 비방과 교만과 우매함이니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21-23).” 나는 아니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어서 난감하다. 그래서 그처럼 바울은 전율하였던 것일까?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4).” 스스로 감당이 안 되는 자신을 두고 주 앞에 엎드린다. 나는 하나인데 나는 둘보다 많아서 힘들다.

 

설교원고를 작성하느라 점심을 걸렀다. 붙들린 말씀 앞에서 꼼짝을 할 수 없었다. 오후 두 시께나 되어 얼추 정리가 끝났고 전날에 두고 간 빵으로 간단히 요기를 하였다. 순간 너무 고요한 실내가 답답하였다. 창을 열자 아직 찬바람과 함께 소음이 밀려들었다. 9층 아래 사람들이 와글거리며 펼치는 일상을 내려다보았다. 좁은 길에 주차 문제로 차가 혼잡하였고, 어떤 공사를 하려는가. 역전은 가로막혀 답답하였다. 모처럼 하늘이 쨍하고 파랗게 눈이 시렸다. 창을 닫자 별개의 고요가 시치미를 떼고 있었다.

 

소파에 누워 <그분의 사역>을 읽었다. 존 파이퍼, 콜린 스미스, 카슨, 개리 밀러 등의 저자들이 누가복음을 중심으로 한 꼭지씩을 전재하고 있었다. ‘길 잃은 자를 부르시다.’ 부제로 붙은 것을 한참 곱씹어 생각하였다. 나는 늘 오늘 말씀이 버겁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그런데 내 안에는 항상 두 주인이 존재하는 것 같아서 말이다. 그러지 말아야지, 하면 영락없이 또한 그러는 내 자신이 신물이 난다.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 6:24).” 특히 사역을 감당한다는 일에서는 더욱 그렇겠다. 돈이 모이면 마음도 그리 쏠리게 돼 있다. 아예 모든 걸 포기하고 산다고 사는데도 여전히 내 안에서는 세상을 기웃거리는 마음이 더 크다. 설교원고를 작성하고 나면 이상하게 알 수 없는 공허감이 밀려든다. 은혜로 충만해야 할 건데, 그럴 때보다 알 수 없는 서글픔에 놓일 때가 더 많다.

 

“내가 여호와의 인자하심을 영원히 노래하며 주의 성실하심을 내 입으로 대대에 알게 하리이다(시 89:1).” 내 안에 이는 온갖 잡념을 다스릴 수 있는 길이다. 저절로 뚝딱 생겨나는 영성이란 없다. 다윗을 보면 더더욱 확실하다. 저의 숱한 광야가 없었다면 과연 저는 시므이의 조롱에도 그처럼 응수할 수 있었을까? 그 또한 주께서 그리 하게 하신 것이라면, 내가 그리 당함으로 주께서 갚아주시리라, 하는 굳은 믿음. 그 신뢰의 마음이 어느 날 불현 듯 생겨나지는 않은 것이다.

 

주만 바란다는 것. 주가 다 아신다는 일. 늘 나 역시 그처럼 붙들고 의지하고 싶은 것인데, 그러면 그럴수록 내 안에는 동일하게 누가 좀 알아주길, 사람이 좀 봐주기를 바라는 마음도 크다. 어쩌면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받지 못하느니라(마 6:1).” 오늘 말씀은 항상 그러는 내 안의 부끄러움을 알게 한다.

 

다들 돌아가고, 나는 청소기를 돌리고 물걸레질을 하였다. 그러고 있는데 아내가 전화를 하였다. 가르치는 아이 외조모가 돌아가신 모양이었다. 뭐라 위로의 말을 보내야 할지 물었다. 들은 바로는 믿는 이였는데 교회를 등한시 한다 그랬나, 아이에 대한 기억조차 선명하지가 않았다. 문득 누가 살고, 누가 죽는 일에 대하여 우리 삶의 무상함에 대해 생각하였다. “나의 때가 얼마나 짧은지 기억하소서 주께서 모든 사람을 어찌 그리 허무하게 창조하셨는지요(시 89:47).”

 

돌아보면 한순간인 것이어서, 이젠 어디가 아프고 뭐가 문제가 생기면 그걸 어떻게든 고치려고 하기보다 살살 달래며 남은 생을 같이 가는 게 나은 것도 같다. 그러니 “누가 살아서 죽음을 보지 아니하고 자기의 영혼을 스올의 권세에서 건지리이까 (셀라)(48).” 스스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위인들인데 뭐 그처럼 아등바등 악착같이 살아내려 하는지. 오늘 날 우리의 구호는 ‘자신을 즐기라.’는 것이다. 그것으로 위안을 삼으라는 교훈이다.

 

그럼 그럴수록 저들은 발끈하고 성을 잘 낸다. 지나치게 거칠고 마른짜증이 잦다. 순간적으로 사납게 지껄이는 무리들을 쉽게 마주칠 수 있다. 또한 언제부턴가 먹는 것에 다들 의미를 부여한다. 식탐이 는다. 미식가들을 양산한다. ‘한 턱’ 내려는 충동이 자주 인다. 모든 문제의 근원인데도 아무도 제지할 수 없는 것이 과음이다. 모든 사건의 대부분이 술 때문에 자행되는데도 말이다. 술 취한 사람은 항상 그럴 수밖에 없는 핑계를 댄다.

 

알게 모르게 서로 낭비를 조장한다. 부추겨 없어도 되는 걸 갖게 하는 사회다. 상대적으로 박탈감이나 상실감을 떠안기 때문이다. 그런데 신기한 건 서로들 관용을 대단한 미덕인 것으로 치부한다. 충동적인 사람이 대체로 너그럽다는 것은 그저 신기할 따름이다. 그런 사람들은 친밀한 관계를 너무 터무니없이 깨버린다. 그리곤 새로운 사람에게 몰입한다. 누가 살아서 죽음을 보지 못하는 인생이 있을까? 다 그 끝이 정해져 있어서 불안하기 때문이다. 쫓기듯 살면서도 느긋한 척을 한다. 나는 이렇게 여러 생각이 한꺼번에 일 때면 훌훌 털어버리 듯 청소를 한다.

 

혼자 있다는 게 때론 두려운 것이 중구난방 생각이 서로 두서없이 튀어오를 때이다. 가까우면서도 먼 아내에게 어찌 설명할 길이 없어 난감하다. 늘 신경을 쓰는 딸애의 마음이 고마우면서도 서운한 것처럼 말이다. 언제부턴가 나는 내 맘 대로 할 수 없다는 것이 늘어가면서 비로소 나의 주인이 내가 아니라는 데 생각이 머물고는 한다. 누구보다 충동적인 인물이고 유약하며 그래서 변덕스럽고 마음이 저 혼자 불편할 때가 많다.

 

싫으면서도 좋은 것이 설교원고를 작성하느라 꼬박 몇 시간씩을 앉아 있어야 할 때이다. 집중하여 본문을 살피고 적합한 단어를 고르고 몸에 익은 글쓰기를 할 때의 그 순간은 금세 아침이 가고 오전을 지나 점심나절이 되어서야 끝이 난다. 혼자다. 구제할 때도 혼자 알고, 기도할 때도 혼자 해라. 남이 알아주길 바라지 말고 알리려고 하지 마라. 오늘 본문은 나를 두고 하시는 말씀이다. 중언부언하지 마라.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종종 말씀을 마디글로 정리하고 시를 대하듯, 이렇게 읽을 때 각 음절이나 언어가 내포하고 있는 의미는 새롭게 열린다. 매일 반복하듯 되뇌며 아뢰는 기도인데도 새롭다. 과연 나는 주께서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기를 제일 과제로 삼고 있나? 일용할 양식으로 충분한가? 내가 사하는 것 같이 사함을 받는다면 과연 나는 사함을 받을 수 있을까? 이처럼 말씀은 실전에서 나를 놓아주지 않으신다.

 

예수님도 보면 말씀을 항상 오늘 여기로 가져와 읽으셨다. ‘그때 그곳’의 일을 ‘지금 여기’로 적용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오늘 나의 상태를 다 아신다. 내 마음이 어떤지, 내 생각이 어떤지, 무엇으로 곤욕스러워하는지, 말씀은 늘 나의 영적 상태를 상대하신다. 아침에 일어나 나는 횡설수설 묵상을 글로 기록하고 있지만, 그래서 때론 내가 지금 무얼 말하고 있나? 하고 알다가도 모를 소리를 하고 있는데도 말씀은 그때마다 다 맞춰주신다. 다 아신다. 이를 어찌 펼쳐서 보여줄 수도 없고 설득력 있게 설명할 길이 없으나, 갑자기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고 도둑질하느니라(마 6:19).” 하는 말씀이 나를 꽉 붙드시는 것과 같다.

 

옹알거리며 엄마와 눈을 마주치는 아이처럼, 때론 그 의미를 다 알 수 없다 해도 주께 시선을 마주하고 있을 때, 그렇지!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21).” 내 마음이 지금 어디를 기웃거리고 왜 그곳을 맴돌고 있는지 보면 알 수 있는 일이다.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34).”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다.

 

“여호와 만군의 하나님이여 주와 같이 능력 있는 이가 누구리이까 여호와여 주의 성실하심이 주를 둘렀나이다(시 89:8).” 주의 성실하심으로. “여호와를 영원히 찬송할지어다 아멘 아멘(52).”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