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전봉석 2018. 3. 4. 07:14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추를 반석 위에 놓은 까닭이요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

마태복음 7:24-27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시편 90:10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모세가 표현하는 인생 덧없음에 대해 묵상한다. 노인은 볼 때마다 늙어갔다. 꾸부정한 허리는 더욱 휘어졌고 이마의 주름은 한 뼘이나 깊어졌다. 기력을 다 해 몸에 좋다는 것을 구해 먹고 나름 바동거리며 운동을 하려는 듯 여기저기 기웃거리는 데서 눈물겨웠다. 그런 노인들을 상대로 물건을 강매하는 장사치들이 있다. 누굴 데려오면 혜택을 더 주는 척 해 노인들은 서로서로 불려 다닌다. 얼추 몇 천은 쓰거나 먹고 마신 듯 한편으론 저의 위기감이 안타까울 따름이었다.

 

그러니 사는 데 드는 비용이 너무 가혹하다. 누구는 풍치로 어금니를 다 뽑고 임플란트를 각각 얼마씩 몇 대를 했는지 모른다며 인생무상을 그리 표현하였다. 젊을 때 돌도 씹어 먹던 것으로 과장하다 너털웃음을 지었다. 같이 쓰는 복도 저편에도 노인들을 위한 무슨 체험관 같은 것을 운영하는데 늘 보면 인산인해라. 꾸부정한 노모들이 여간 극성이 아니다. 사는 날을 계수하면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인데 것도 신속히 지나간다.

 

이제 완연한 봄날 오후였다. 나는 여느 날과 다를 것 없었고, 오후께는 늙으신 장모가 손수 후원헌금을 주러 인천에를 왔다. 아내와 딸애가 나란히 저를 맞았고 닦달을 하듯 같이 나란히 앉아 이런저런 우려를 표시했다. 사돈에 팔촌이 연락이 와서 어딜 갔었다는 데서부터 무엇이 또 좋네, 어쩌네 하는 말이 한참씩 되풀이 되었다. 뭐라 한들. 믿는 사람은 그런 거 따지는 거 아니에요, 하고 말을 해도. 가물가물한 기억 속에서도 갖은 고생을 하였던 젊은 날을 반복해서 끄집어내었다.

 

문득 생각하였다. 젊을 때 아직 기력이 있을 때 무엇으로 습관을 들여 이를 성품으로 이룰 것인가, 하는 데 가슴이 철렁했다. 교회도 다니고 기도도하고 누구보다 신앙이 좋다고도 하면서 실상은 그 근심과 걱정을 세상에서 풀려하는 것이어서. 그러느라 일주일에 한 번 말씀 펼쳐서 보는 일이 족하고, 기도란 것이 그저 바라고 구하는 일로 안 믿는 이들의 요구와 다를 게 없으며, 천국을 사모함은 그저 막연하여서 ‘좋은 곳’으로 족하였으니.

 

연마되지 않고는 주를 바라는 것도 세상적으로 달리 방법이 없구나, 싶었다. 힘써야 한다. 이웃과 화해하기를 힘써야 하고(눅 12:58), 남들은 마다해도 주를 더욱 바라며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13:24).” 그러니 누가 대놓고 좁은 문을 선호할까? 나 쓸 것도 없는데 손 대접하기를 누가 힘쓸까(롬 12:13). 그래서 배워야 한다. 마땅히 행할 길이 저절로 행해지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끝으로 주 예수 안에서 너희에게 구하고 권면하노니 너희가 마땅히 어떻게 행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지를 우리에게 배웠으니 곧 너희가 행하는 바라 더욱 많이 힘쓰라(살전 4:1).” 그래서 오늘 본문은 이를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일로 비유하고 계신다.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로 사는 일이 그리 녹록하지는 않다. 우선적으로 해야 할 게 있고, 더 급한 게 항시 우리를 몰아세우는 법이다. 그러니 자꾸 미룬다.

 

다 알면서도 어쩔 수 없었다는 말로 자신을 두둔한다. 이에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보면 알 일이다. ‘그 집’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길들여온 믿음의 정도는 그 ‘주추를 반석 위에 놓은’ 것인지 아니면 ‘모래 위에 지은’ 것인지. 아직 젊을 때 평온 할 때는 구분이 안 되는 것이어서,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무던히 수고하고 애써, 힘쓰는 신앙이 되레 어처구니없어 보이기는 하겠다.

 

성경은 이를 상기시킨다. “또 너희에게 명한 것 같이 조용히 자기 일을 하고 너희 손으로 일하기를 힘쓰라(살전 4:11).” 여기서의 일은 남들처럼 그저 주어진 삶을 죽자고 사느라 애쓰고 수고하는 정도는 아닐 것이다. 안 믿는 이들도 그 정도는 한다. 그래서 “너는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딤후 2:15).” 나의 날들이 주께 드려지는 데 힘쓰라는 것인데, 이를 보다 구체적으로 언급한다.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4:2).”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거함이고, 그래서 더 ‘연약한 그릇’으로 삼으신 것도 서로의 부족함을 채우는 일에 힘쓰는 것이겠다. “남편들아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그를 더 연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함께 이어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 이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 또는 그 아내를 더 연약한 그릇 같이 여겨 지식을 따라 동거하고(벧전 3:7).”

 

장모는 지난날의 어려웠던 심정을 다 늙어서 스스로 보상하려는 것처럼 말하였다. 아내는 그 내용에 동조하면서도 이를 부추겨 장사 수단으로 삼는 상술을 두고 경계하였다. 그럴 수 있는 여력이 있어서,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 나는 생각이 다른 데 가 있었으니, 보다 힘써 말씀으로 의지하고 삶에서 이를 몸에 배게 하는 데까지 무던할 수 있는 게 복이겠구나! 생각으로야 누군들 못할까. 마음으로야 뭔들 어려울까. 막상 비가 오고 바람이 불고 창수가 나면 알 일이다.

 

그렇듯 더는 어쩔 수 없는 상황에 놓이기 전에 보다 더욱 말씀을 의지하고 주를 바라며 이를 삶으로 실천하여 습관이 되고 인격이 되어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기까지, 힘쓰라.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바라보나니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서 나타나기를 힘쓰라(벧후 3:14).” 결단코 힘써야 하는 일은 이처럼 다른 데 있었다. 누굴 뭐라 비판할 것도 없이 오히려 그럴 수 없는 저의 상황과 심정을 헤아리며,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 나타나기를 힘쓰는 삶. 그리고 오늘 본문을 다시 본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바로 실천의 문제이지 안다고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다. 실행으로 옮겨 몸에 배기까지의 수련의 일이지 깨달음의 정도에서 그치는 일이 아니다. 그러할 때,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추를 반석 위에 놓은 까닭이요” 저 또한 어려움에 역경에 온갖 시련이 닥쳐오나 든든하였다.

 

그런데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알겠다고 하고, 나도 다 안다고 하면서도 우선 다른 일에 더 급한 문제를 고집하느라 미뤄두었던 이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마 7:24-27).” 다 같은 한 생을 살아가는 데 있어, 그 연수의 자랑은 기껏 해봐야 수고와 슬픔뿐이라.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시 90:10).” 어느 훗날 무엇으로 이를 알까?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마 7:17-18).” 돌아보아 지난날 자신의 삶이 어떠했노라 항변하면 무슨 소용이겠나?

 

나는 요즘 어느 노 시인의 말로를 보며 한탄한다. 아름다운 언어와 절제된 시로 모든 이의 심금을 울리며 칭송받던 이가 실은 괴물이었다니! 자상한 아버지, 수줍음 많은 중년의 중후한 배우인 줄 알았는데 실은 추하고 더러운 도색가였다니! 자고 일어나면 또 누가 누굴 언제 적에 성추행했다느니, 누가 또 그런 사람이었다느니, 하는.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느니라(19).”

 

누군가 토로하지 않았더라면 여전히 저는 고상한 시인으로, 순결하고 아름다운 음색을 노래하는 예술가로, 선생으로, 덕망 좋은 풍채를 자랑하며 살고 있지 않았겠나! “이러므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20).” 두렵다 나는. 어려서부터 빨리 늙은이가 되기를 바랐던 것도 실은 덜 음욕을 품고 덜 욕심을 부리며 좀 더 덜 바라며 살지 않을까, 싶어서였는데. 이는 결코 물리적으로 저절로 그리 되는 문제가 아닌 거였다. 나이가 든다고 기력이 없다고 해서 탐욕이 또 욕심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로 살아야 하는 것이다. 하루아침에 뚝딱 세워지는 게 아니다.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그 수고와 인내가 어떠했을까? 내가 제일 두려워하는 말씀은,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마 7:22).” 나 또한 그 중 하나일까 하여.

 

결국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21).” 열심을 다해 수고하고 애쓴다고 될 일도 아닌 것이어서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한다. 그래서 좋은 열매란 아버지가 기뻐하시는 것으로, 그 생애 어떤 열매를 주께 드려야 할 터인데. 나는 도무지 어떻게 내가 무얼 한다고 해서 될 일이 아니어서. 아니, 솔직하지 못해서 그렇지 누구보다 추하고 더러운 위인이라 나야말로 무엇으로 ‘아버지의 뜻대로’ 행할까?

 

“산이 생기기 전, 땅과 세계도 주께서 조성하시기 전 곧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는 하나님이시니이다(시 90:2).” 주가 나를 이처럼 삼으셨으니, “주의 목전에는 천 년이 지나간 어제 같으며 밤의 한 순간 같을 뿐임이니이다(4).” 내 연한을 다한들 스스로 무슨 선한 것을 낼 수 있을까? “풀은 아침에 꽃이 피어 자라다가 저녁에는 시들어 마르나이다(6).” 참으로 보잘것없는 사람이라, “우리는 주의 노에 소멸되며 주의 분내심에 놀라나이다(7).” 이는 “우리의 모든 날이 주의 분노 중에 지나가며 우리의 평생이 순식간에 다하였나이다(9).”

 

주께서 나를 불쌍히 여기시고, “아침에 주의 인자하심이 우리를 만족하게 하사 우리를 일생 동안 즐겁고 기쁘게 하소서(14).” 그리하여 “주 우리 하나님의 은총을 우리에게 내리게 하사 우리의 손이 행한 일을 우리에게 견고하게 하소서 우리의 손이 행한 일을 견고하게 하소서(17).”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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