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에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
마태복음 8:17
하나님이 이르시되 그가 나를 사랑한즉 내가 그를 건지리라 그가 내 이름을 안즉 내가 그를 높이리라
시편 91:14
부모가 유약한지 방임한지는 저들의 마음 씀을 보면 쉽게 구분이 된다. 이내 아이의 요구를 거절하지 못하고 그때마다 지면 유약한 부모이다. 그런데 아이가 어떤 요구도 하기 전에 먼저 제공하고 더 주려 들면 이는 방임하는 부모다. 아이가 떼쓰면 기어이 지는 쪽은 유약함이고 아이 의사와 상관없이 먼저 제공하려 들면 방임함이다. 저들의 근원은 또 그와 같은 부모 밑에서 자랐거나 그와 같은 환경에서 성장했기 때문이다. 저 둘은 한데 섞여 같은 방식을 취하기도 하고 독자적인 방식을 선호하기도 한다.
넉넉하게 자라지 못해(물질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또는 사랑에 대해서도) 그 보상으로 자식에게 과하게 구는 쪽은 대부분 방임형이 된다. 그런 아이는 언제나 소극적이고 심드렁하다. 감사할 줄 모르고 새로운 것에 늘 지쳐있다. 지속적인 인간관계를 맺기 어려워하고 새로운 친구와 처음엔 잘 어울리다 쉽게 시들 한다. 노력을 이어가지 못하고 그때마다 새로운 쪽으로 눈을 돌리고 그러는 자신을 정당하게 여긴다.
너무 부유한 부모 밑에서 자랐을 경우에도 자신의 노력의 결과에 따른 보상을 알지 못한다. 당연한 것이거나 별 것 아닌 것처럼 남의 호의를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물론 인사치레를 하지만 진심을 담아내지는 못하는 것이다. 혹은 어떤 죄의식이나 죄책감에 사로잡힌 부모 밑에서 자란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저들 부모는 괜히 자꾸 미안해하여 아이의 요구보다 항상 앞서서 보상한다. 선천적으로 필요 이상의 애정을 과시하는 부모도 있다. 어떤 결핍의 흔적인데, 저들의 맹목적인 사랑은 과잉보호로 나타난다.
아이는 주도적으로 활동하는 것 같으나 그 논리가 항상 자기 주관적이다. 사고방식의 틀이 그리 고정되어서 누구의 말도 한 주파수로만 들리는 것과 같다. 고마움을 도식적으로만 열거할 줄 알지 가슴으로 느껴 몸으로 갚을 수 있는 능력을 모른다. 왜 그렇게까지 해야 하는지 아이는 배운 적이 없다. 저의 유약한 또는 방임형 부모는 긴 잔소리에 비해 번번이 아이의 요구에 굴복했거나 한 번도 그 고집을 꺾어본 적이 없다.
그렇게 어른이 되었을 때, 다른 사람은 어쨌든 내 마음을 알아주어야 하고 마땅히 그럴 수 있는 사람을 원한다. 그렇지 않으면 화가 난다. 상대는 알지도 못하는데 저 혼자 불평한다. 알아서 알아달라는 요구다. 늘 자신은 관심 받지 못한다고 여기고, 그러면서도 누구의 관심을 달가워하지 않는다. 그러다 정작 자신이 책임지고 행동을 취해야 하는 상황에서는 자주 우는 소릴 한다. 해보지도 않고 못하겠다고 징징거린다. 그리곤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이유를 백 가지 이상 열거할 준비가 되어 있다. 성마른 말투가 특징이다. 냉소적이다.
예배를 마치고 아내와 딸애는 눈치껏 핑계를 대고 자리를 떠났다. 아이와 남아 이런저런 얘기를 나눌 수 있었다. 바로 또 어디 약속이 있어서 가야 하는 터라, 아이와 좀 더 길게 이야기를 나눌 수는 없었다. 지난 번, 여기를 그만 나오면서 아예 동네 교회에도 다니지 않았다고 말하였다. 그 고집스러움은 설득하여 돌이킬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저가 호기심에 또는 어떤 흥미를 가지고 다시 온다거나 하지 않으면, 성령의 회초리밖에는 달리 길이 없을 것 같다.
몸에 대한, 건강에 대한 불만이 늘 있어서 자신이 자신하고 있는 열심과 상관없는 결과를 하나님께 핑계로 돌리는 셈이다. 아프면 아픈 대로 사는 거지! 하는 나의 말에 아이는 동의하지 않는다. 마치 정당한 권리를 주장하듯 ‘낫게 하지도 못하는 종교’를 더는 원치 않는다. 오늘 본문을 읽으면서 문득 어제 아이가 돌아가고 읽은 휴 미실다인의 <몸에 밴 어린시절>을 두서없이 기억나는 대로 먼저 정리해본 것은, 안고 살아할 무게가 우리 의지로는 해결이 안 된다는 데 동의하기 때문이다.
그동안 나 역시 어떤 요구, 특별히 몸의 질병에 대한 요구가 마치 응석받이 떼쓰듯 기도하였던 적이 있다. 당연히 들어줘야 한다고 여기는 게 유약하거나 방임하는 자의 특징이다. 마치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듯이 하나님께 명령하는 것이다. 단지 그런 아이로 그치는 게 아니었다. 고스란히 그런 부모가 되어 똑같이 아이들을 대하였고, 여전히 나 자신을 그처럼 마주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익숙하다는 건 거의 불순종으로 기울 게 되어 있다.
오늘 주님에 대한 마태의 서술이 눈에 들어온다.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에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마 8:17).” 주님 앞에 나오는 병든 이와 온갖 문제를 해결해주신다. 이를 마태는 담당하시고 짊어지신다는 이사야의 진술을 기억하고 그리 표현한 것이다. 심지어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사 53:4).”
그 슬픔과 징벌이 본래는 내 것이었다. 내 병을 짊어지셨다.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아프다? 이는 단지 도식적인 이해의 몫이 아닌 것이다. 내가 병들어 나의 영혼이 뒤틀릴 수 있는 상태인데, 그 병으로 인해 영혼이 병들지 않게 하시려는 것이다. 그러니까 전엔 나도 아이처럼 나의 약한 육신 때문에 스스로 이겨내려고만 할 때 오히려 강퍅한 영혼으로 살았다는 걸 이해한다. 병든 자가 병이 낫고, 배고픈 자가 배불렀고, 귀신 들린 자가 나음을 입고, 죽었던 이가 살아나고 하는 진술은 그 자체 이면의 영혼의 회복을 묵상해야 한다.
또한 그 값이 본래 죄로 인한 것이었다면 그 값을 직접 자신의 몸으로 치러주신 주님을 생각해야 한다.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엡 2:1).” 왜냐하면 이 땅에서의 모든 나음은 그저 일시적인 것일 뿐이다. 배고픈 자가 배불리 먹었다고 해서 더는 배고픔이 없겠나? 죽었던 이가 다시 살아났다 해서 다시 죽지 않겠나? 우리는 당장 지금의 질병, 어떤 문제, 그 결핍으로 쩔쩔매며 그것만 해결되면 모든 게 나을 것 같다고 여기지만 오늘 본문에 열거되고 있는 병 고침과 나음은 그 이상의 의미로 읽고 이해해야 한다.
실제 ‘우리 같은’ 이들의 특징은 자신을 알아달라는 것이다. 말 안 해도 척척 원하는 바를 들어줘야 하는 것이다. 스스로에게 늘 관대하다. 나름의 노력을 기울인다고 하지만 항상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이유를 준비하고 산다. 그런 자신을 그냥 내버려두는 방임이 되풀이 되는 것이다. 아주 단순한 예로 어릴 때 갖지 못했던 장난감을 어른이 된 자신을 위해 분에 넘치게 선물한다든지. 요즘은 특히 그런 분위기여서 그런 상술은 인형에서부터 온갖 액세서리로 이어져 장사가 잘 된다. 오락이 판 친다. 게임 시장이 번창한다.
그럼 다른 길이 없을까? 아이를 보며 뭐라 한들 들을 것 같지 않아 나는 혼자 생각이 많았다. 불쑥 왔다 무심히 돌아가는 아이의 빈자리가 내겐 늘 버겁다. 나는 어둑어둑해질 때까지 혼자 교회에 있다가 집으로 올라갔다. 그게 어디 저 아이 때문이겠나. 저 아이 뿐이겠나. 우리는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이를 아파하지 않는다. 아픈 줄 모르는 병이 우리 영혼을 소진시킨다. 차라리 아프고 고통스러워서 살려주세요, 하는 소리가 저절로 나와야 할 것인데. 대신할 수 있는 위로가 또는 응급처지로 위안을 삼을 놀이가 너무 흔한 세상이다.
아파할 줄 모르면서 우리는 자신에 대해서조차 방임한다. 방관자가 된다. 남 얘기 하듯 그럴 수도 있고, 하는 식이다. 대수롭지 않게 종말을 기대한다. 그럼 그냥이라도 주일마다 이쪽으로 와! 아이를 엘리베이터에까지 마중하며 말했다. 그리고 진심을 담아 다음 주일에 보자, 하고 인사를 건넸으나 아이는 그저 풋, 웃음으로 받아넘겼다. 그럴 때 나는 어떤 슬픔이 또 화가 목구멍을 치고 신물처럼 올라온다.
나는 입을 삐쭉거리며 주께 응석을 부렸다. 늘 하는 소리지만 못하겠다, 할 맘이 점점 없어진다, 지겹기만 하다, 그러니 어쩌면 좋아요? 하고. 그래도 다 끝날 시간에 불쑥 그렇게 왔다 가는 게 신기하고 놀라운 일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럼 좀 뭔가 나아지는 기미라도 보여야 하는데. 그런들. 또 얼마 동안의 시간이 지나 다시 했던 말을 또 해야 하는 것인지. 다름 아니라 그럼 그럴수록 나는 자꾸 주만 응시하게 된다. 주 말고 달리 내 속 얘기를 털어놓을 곳도 없다.
이것도 사랑이라면, “하나님이 이르시되 그가 나를 사랑한즉 내가 그를 건지리라 그가 내 이름을 안즉 내가 그를 높이리라(시 91:14).” 내가 주를 바라고 의지하는 것이 사랑이라 말하기에는 나는 너무 초라하고 옹색해서 차마 염치가 없지만. 나는 이제 주밖에 달리 말할 사람도 없다. 침묵할 곳도 없다. 응시할 데도 없다. 돌아와 궁금해 하는 아내에게 잠깐 이야기를 하다 그만두었다. 서로 듣는 귀가 다른 것이다.
그러니 “그가 내게 간구하리니 내가 그에게 응답하리라 그들이 환난 당할 때에 내가 그와 함께 하여 그를 건지고 영화롭게 하리라(15).” 그리 된다. 주께 간구하지 않고는 살 수가 없어서 말이다. 나야말로 방임형인간이 아닌가? 누구보다 나약하고 유약한 이가 아닌가? 푸념조차 성마른 가슴이라 혼자 퉁명스럽기 그지없으나, 그런 나조차 주체할 수 없어서 주께 간구한다. 그리 말씀 앞에 앉을 때 주의 응답은 선명하시다. 나와 함께 하여 나를 건지시고 나를 영화롭게 하시겠다는 것.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주하며
전능자의 그늘 아래에 사는 자여,
나는 여호와를 향하여 말하기를
그는 나의 피난처요
나의 요새요
내가 의뢰하는 하나님이라 하리니
이는 그가 너를
새 사냥꾼의 올무에서와
심한 전염병에서 건지실 것임이로다(1-3)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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