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우리 하나님은 거룩하심이로다

전봉석 2018. 3. 13. 07:50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마태복음 16:24

 

너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을 높이고 그 성산에서 예배할지어다 여호와 우리 하나님은 거룩하심이로다

시편 99:9

 

 

 

내가 바라고 생각했던 메시아가 아니다. 그리스도라 하면 그리 힘없이 죽으실 수는 없다. ‘그리 마옵소서.’ 나 역시 그처럼 대답하며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올라가 죽으시고 살아나실 것을 말씀하신다. 그러자 베드로는 항변하며 그럴 수 없음을 고한다(21-22). 죽임을 당하시는 것에 시선이 집중됐다. 제 삼일에 살아나실 것에 대하여는 들리지도 않았다. 말씀 앞에 가만히 있자니 그게 나 또한 다르지 않겠다, 생각되었다. '그리 마옵소서.'

 

부활을 알지 못할 때 죽음은 그저 승리가 아닌 패배의 것으로 여겨진다. 이를 알게 하시는 이가 나로 하여금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이십니다', 하는 고백을 하게하셨음에도 나는 당장 죽음만을 염두고 두고 있는 것이다. 고통이 어렵고 직면한 현실이 구차하여 그 너머의 복된 소식을 생각할 겨를이 없다. 나도 주께 고한다. ‘듣는 마음을 주소서.’ 솔로몬의 이 기도에 하나님은 기뻐하셨다(왕상 3:9).

 

듣는 마음을 달라는 저의 기도가 주의 마음에 들었고(10), 이에 하나님의 지혜를 부어주셔서(28), 이내 넓은 마음을 이루게 하셨다(4:29). 아침에 말씀을 읽다 나는 저가 부러웠다. 듣는다는 것은 순종을 의미한다. 믿음은 가만히 있는 게 아니라 순종하는 일이다. “이는 아브라함이 내 말을 순종하고 내 명령과 내 계명과 내 율례와 내 법도를 지켰음이라 하시니라(창 26:5).”

 

나는 요즘 치료약을 쓰면서 불안은 오히려 가중되고 빈번하게 위경련까지 일어 어렵다. 모처럼 동기 내외가 왔는데 몸이 좋지 않아 미안하였다. 오늘 아침에도 식은땀이 줄줄 흐르고 호흡이 가쁘고 어지러워, 말씀 묵상을 하다 도로 들어가 누워야 했다. 내 몸 하나 건사하며 사는 일이 이처럼 힘에 부쳤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 16:24).” 그럼에도 주를 따르라는 말씀으로 들린다.

 

나는 할 수 없으나 주께서 하게 하시는 게 사역이다. 산다는 일은 주신 바 그 안에서 온전히 주를 바라고 섬기는 것이 아닐까? 그러기를 바라고 주만 따라 살기를 원하지만, 내가 나를 잘 알듯이 나는 자주 실의에 빠진다. 그럼에도 나도 솔로몬처럼 기도하고 싶다. 저에게 듣는 마음을 주소서. 순종하는 삶을 허락하소서. “이르시되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들어 순종하고 내가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 중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라(출 15:26).”

 

오늘은 아무래도 병원에 가서 이러한 상황을 알려야겠다. 내게 더하신 날들을 어찌 살아드려야 주를 기쁘시게 할 수 있을까? 듣는 마음을 바랐던 솔로몬의 마음이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마음을 더욱 알고자 하는 것이 아니었을까? “이는 여호와께서 행하신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한 바로다(시 118:23).” 나는 나 자신도 알지 못하는 것을 하물며 누굴 겨누어 생각하고 판단할 수 있겠나. 어제는 또 누가 '미투' 가해자로 지목되자 구구한 변명을 늘어놓았다.

 

옛말에 ‘입을 열어 모든 의혹을 없애는 것보다 침묵을 지켜 바보로 보이는 것이 낫다.’고 하였다. 내가 사는 삶은 주의 사신으로서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를 통하여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 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청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고후 5:20).” 먼저는 하나님과 화목할 때 내게 더하시는 날 동안 주를 나타내고 증거 할 수 있을 거였다. 오후께 누가 와서 말하기 어려운 자신의 지난날을 들려주었다. 나는 다만 저의 말을 들으며 내 뒤에 계신 주를 바라며 하는 소리이겠거니 생각하였다.

 

그렇다. 나는 저 앞에 하나님 대신 앉아 있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누가 나를 대할 때 함부로 굴지 못하게 해야 하는 까닭도 나의 삶은 주의 사신으로서 여기에 두셨다는 것. 두신 이가 나를 지키시고 보호하실 것을. 그러므로 “너희의 단장은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하지 말고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벧전 3:3-4).”

 

이 어려운 몸을 잘 달래면서 가는 길. 허락하신 날까지 이제 나의 남은 생이 온전히 주께 유용하기를. 부디 나의 어려움이 저들에게 하나님을 우습게 여기는 계기가 되지 않기를. 자꾸 나는 내가 제일 어려운데, 그래서 주의 이름을 부르며 누구를 생각하고 주의 도우심을 바란다.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하고 물으실 때(마 16:13), 사람들이 뭐라 하든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15).” 하실 때에 나도 주께 고백하고 싶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16).” 이를 알게 하신 이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시다(17). 주는 말씀하신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18).” 교회를 이루어가게 하시는 이가 오늘 이와 같은 말씀 앞에 나를 붙들어 세우시고 물으시는 것 같다. ‘너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나는 너에게 누구냐?’ 그러할 때 ‘주는 나의 주인이십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하는 고백 위에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할 교회를 세우시는 것이다.

 

이는 곧 ‘천국의 열쇠’를 내게 주심과 같아서 내가 누구를 생각하고 저를 위해 기도할 수 있는 능력이 거기 있었다. 연신 주의 이름을 부르며 ‘도와주세요. 함께 해주세요. 붙들어주세요.’ 하는 말을 되뇌는 동안 나는 나를 위해 그리 기도하다 또 누구를 위해 비는 것이다.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19).” 그리고 이어서 하신 말씀이구나. 마치 그러려면, 하고 그 방법을 알려주시는 것처럼.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24).” 내가 나를 부인한다는 게 과연 가능한 일일까? 자아를 이겨내는 일이 그처럼 쉬운가. 결국은 주를 알면서 주의 뜻을 알지 못해, ‘주여 그리 마옵소서.’ 하는 자리에 빠지기 일쑤니까. 내가 주를 따른다는 것은 나를 부인하고 내게 두신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일이었다. 곧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25).”

 

위경련이 일어 식은땀을 줄줄 흘리며 마른 호흡을 뱉어내면서, 나는 주의 도우심을 바라며 의지하고 구하여, 주의 긍휼하심 앞에 엎드리는 것이다. 은총이 아니면 살 수가 없다. 나는 두렵고 떨린다. “여호와께서 다스리시니 만민이 떨 것이요 여호와께서 그룹 사이에 좌정하시니 땅이 흔들릴 것이로다(시 99:1).” 저는 나의 구주 나의 주관자이시다. “주의 크고 두려운 이름을 찬송할지니 그는 거룩하심이로다(3).”

 

그러므로 “너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을 높여 그의 발등상 앞에서 경배할지어다 그는 거룩하시도다(5).”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