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릴리에 모일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인자가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매우 근심하더라
마태복음 17:22-23
여호와는 선하시니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고 그의 성실하심이 대대에 이르리로다
시편 100:5
변화 산에 있을 때엔 좋았는데, 주님은 우리를 데리고 내려오신다. 베드로는 너무 황홀하고 좋아서, “베드로가 예수께 여쭈어 이르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만일 주께서 원하시면 내가 여기서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님을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리이다(마 17:4).” 하였으니. 그렇듯 때론 글방에 있어 혼자 있는 시간이 좋을 때도 있다.
그럴 때면 여지없이 현실로 나를 이끄신다. 몸이 아프다는 건 참 고단한 일이다. 병원에 들러 치료약을 바꾸고 의사의 설명을 듣고 돌아오는 길이 서글프기도 하였다. 딸애는 너무 빠듯하게 바쁜 하루 일과에 녹초가 되고, 아내는 아이들뿐 아니라 학부형들에게까지 시달리며, 다들 사는 게 고단하다. “말할 때에 홀연히 빛난 구름이 그들을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시는지라(5).”
주님만 바라고 의지하고 좋아서 그렇게 살고 싶은데, 현실은 그야말로 극성이다. “주여 내 아들을 불쌍히 여기소서 그가 간질로 심히 고생하여 자주 불에도 넘어지며 물에도 넘어지는지라 내가 주의 제자들에게 데리고 왔으나 능히 고치지 못하더이다(15-16).” 어쩜 이렇게 자고나면 또 새로운 근심과 걱정이 우리를 엄습하는지. 발버둥 쳐도 소용이 없는 것처럼 때론 그저 사느라 기진하여 맥을 못춘다. “이 때에 제자들이 조용히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우리는 어찌하여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19).”
현실 앞에 늘 좌절하기 일쑤라. 조금은 의연하고 담대하였으면 좋겠는데, 뭄뚱이 하나 건사하는 일조차 힘에 부쳐 쩔쩔매는 통에, “갈릴리에 모일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인자가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매우 근심하더라(22-23).” 내가 아는 복음과 달리 삶에 있어 나는 무력하기 짝이 없다. 죽임을 당하신다니! 부활을 살지 못할 땐 죽음 이편의 생활로도 기진맥진 죽을 맛이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것.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신다’는 감상적인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죽이시더라도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그가 나를 죽이시리니 내가 희망이 없노라 그러나 그의 앞에서 내 행위를 아뢰리라(욥 13:15).” 이와 같은 절대적인 정의 앞에 무릎을 꿇리시는 것 같다.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요일 4:8).” 곧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7).” 하나님이 사랑이심을 안다.
그 사랑은 나를 위해 아들을 내어주시까지 한 사랑이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롬 8:32).” 하는 말씀을 읽고 있을 때, 속은 울렁거리고 머리는 아프고 어깨와 허리, 무릎 도대체 온 몸뚱이가 아우성을 쳐대듯 괴로울 때였다. 소파에 누워 등을 지지다 스르르 잠들기도 하였던. 날은 누렇게 가라앉아 하루 종일 어둑하였고 덕분에 몸까지 마음까지 짓눌리던 하루였다.
그럼에도 오스왈드 챔버스의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을 펼쳐 읽으며 위로가 되는 것이었으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오후께 아이가 문자를 주었다. 휴가를 나와 금요일 오전에 오겠다는 거였다. 반가움에 얼른 답을 하고 기분이 한결 나아지는 걸 이상히 여겼다. 죽음 이편에서 살아야 하는 날들이 고달프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부활을 살게 하시려는 오늘 본문의 말씀을 알겠다. “이르되 내신다 하고 집에 들어가니 예수께서 먼저 이르시되 시몬아 네 생각은 어떠하냐 세상 임금들이 누구에게 관세와 국세를 받느냐 자기 아들에게냐 타인에게냐(마 17:25).”
사는 날 동안 무던히 감내해야 하는 것에 대하여, 그것으로 우리를 거룩으로 인도하시는 것이다.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르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히 12:14).” 주신 날 가운데 저들 가운데서 화평과 거룩을 실천하는 일. 이는 내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 주께서 그리 사랑을 확증하신 일이기도 하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
나름 힘에 부치게 열심을 다하지만, 그것이 곧 하나님이 우리에게 부여하신 속성을 찾기까지 하는 것이었으니.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롬 6:23).” 하나님의 은사를 받은 자로서 사는 일은 사망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으로의 삶이다. 부활을 알지 못하고 감당하지 못할 때는 제자들도 근심하였다. 부활은 죽고 난 뒤의 일이 아니라 살면서 이내 살아내는 현실인 것을 말이다. 이를 알기까지 하나님은 참고 또 기다리신다.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벧후 3:9).” 나는 종종 사는 일이 두려운데 성경은 이를 넘어 주의 나라를 살게 하신다. 몸이 아파서 일그러진 마음 가운데도 이와 같이 말씀으로 찾아오시고 붙드시는 것이다. 나의 나약함과 어려움을 알면 알수록 주밖에 의지할 수 없음을 알게 하신다.
그렇게 하루를 지내놓고 보니 또한 견딜만하였다. 그와 같은 힘도 더하셨다는 걸 알게 된다. 새로 받은 약은 며칠 미루기로 하였다. 속을 좀 달래고 다시 시도를 해야겠다. 몸은 단순하여서 잘 달래고 어르면 또 금세 나아질 것이다. 딱 그만큼 받아들일 건 받아들이고 그렇게 다독이면서 사는 일이겠거니. 둘러앉아 가정예배를 드리면서 딸애가 간구하는 나의 영육간의 강건함을 위한 기도에서 은혜를 받았다. 이미 족한 것들이 참 많았다. 우리로 하여금 이와 같이 주를 바라며 의지할 수 있게 하신 것만으로도!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으며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를 통하여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 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청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5:18-21).”
이로써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 먼저는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심이었다. 어렵고 힘든데, 분명히 괴롭고 답답한데, 그럼에도 주는 사랑이시라는 데서 눈을 떼지 못하게 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그 사랑으로 해결되지 않을 문제는 없다. 극복할 수 없는 어려움은 없다. 용서 받지 못할 죄는 없다. 그 사랑은 너무 크고 위대하여서 내기 이해할 수 있는 범주의 내용이 아니다. 어떻게 감당이 안 되는 사실이다.
그래서 욥의 고백이 늘 귀하다. “그가 나를 죽이시리니 내가 희망이 없노라 그러나 그의 앞에서 내 행위를 아뢰리라(욥 13:15).” 그가 나를 죽이실 것처럼 힘들게 한다. 더는 희망이 없다. 그러나 그렇다 해도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그의 앞에서 내 행위를 아뢰리라. 주를 바랄 수 있게 하시는 게 은총이었다. 좋은 환경, 괜찮은 결과가 축복이 아니라 그렇지 못한 결과 앞에서도 주를 바랄 수 있는 것이 은혜였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는 너희의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자신을 세우며 성령으로 기도하며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신을 지키며 영생에 이르도록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을 기다리라(유 1:20-21).” 먼저는 나를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세우신다. 그래서 성령으로 기도하게 하신다. 내 입술은 늘 투덜거리는데 마음으로 바라는 것은 항상 주의 긍휼하심이다. 이로써 자신을 지켜 영생에 이르게 하신다. 곧 내가 나를 지켜야 할 이유가 분명한 것이다. 주를 바라며 주를 의지한다는 건 때론 가혹한 현실이니까 간절할 수 있었다.
기어이 변화 산에서 데리고 내려오신 이유였다. 만약에 그 상태 그대로 예수께서 승천하셨다면 어땠을까? 베드로의 소원대로 그 가운데 안주함으로 산을 내려오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예수의 죽으심도 부활도 없었다면 이 땅에서의 구원은 그대로 사라지는 게 아니겠나. 주님은 내가 환상에 젖어 사는 걸 원치 않으신다. 말씀이 좋으나 그 말씀으로 삶을 살기를 원하시지 그 황홀경에 빠져 막연한 즐거움에 빠지는 게 다가 아니다. 사는 게 일이다. 그 일이 사역이다. 주신 몸뚱이로 그 현실에서 귀신들을 마주하고 패역한 세대와 맞닥뜨리면서도 사는 게 사명이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롬 8:35).” 무엇도 우리를 이제 그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39).” 때론 내 몸 하나 건사하는 일에 쩔쩔매고 또 똑같은 신음에 빠져 허우적거리기 일쑤지만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37).”
곧 “여호와는 선하시니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고 그의 성실하심이 대대에 이르리로다(시 100:5).” 아멘.
'[묵상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주는 한결같으시고 (0) | 2018.03.16 |
---|---|
내가 주께 찬양하리이다 (0) | 2018.03.15 |
우리 하나님은 거룩하심이로다 (0) | 2018.03.13 |
새 노래로 여호와께 찬송하라 (0) | 2018.03.12 |
기쁨을 뿌리시는도다 (0) | 2018.03.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