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마가복음 8:34
주의 종에게 하신 말씀을 기억하소서 주께서 내게 소망을 가지게 하셨나이다 이 말씀은 나의 고난 중의 위로라 주의 말씀이 나를 살리셨기 때문이니이다
시편 119:49-50
아이들이라, 안 믿는 가정의 안 믿는 부모들의 자녀라, 무슨 일로 이 아이가 못 오고 저 아이도 못 오고, 나는 시무룩하여졌다. 말씀을 준비하고 칠판에 적어 어떻게 하면 이를 바로 알게 할까? 하고 여러 번 생각하였던 게 김샜다. 한 영혼이 천하보다 귀하다는 게 참 이런 것이구나 싶었다. 예배가 시작될 때 설마, 하고 있을 때 중3 아이가 왔다. 정말이지 눈물겨운 일이었다. 처음인데 그렇듯 용기를 내어 나올 수 있었던 게 신기하였다. 아니, 그 한 아이로 온 천하를 얻은 듯 갑자기 마음이 넉넉해지는 것이 이상했다.
주일이면 나는 늘 나도 모르는 나로 인해 놀란다. 내 안에 그리스도의 영이 어찌 나를 움직이시는가, 그 손길이 생생하여서 말이다. 나는 여러 궁리를 한다. 말씀을 도모한다. 전 주에 이어 어떻게 하면 오늘 이 말씀을 아이들의 마음에 잘 뿌릴까 모색한다. 그럼 또 영락없이, 내가 하는 일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게 하시는듯하다. 나의 보람과 긍지가 아니라 예수를 영화롭게 하는 것으로 다시 초점을 맞추게 하시는 것이다.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요 20:22).” 그렇지 않으면 다른 도리가 없는 것이다. 부활 주일, 그 영광의 실체를 알게 하신다. 단지 그렇다는 게 아니라, 부활을 사는 일이었다. 날마다 죽어야 하고 매순간이 다시 살아나는 일이었다. 내가 이처럼 아이들로 인해 속이 타들어갈 줄이야! 그러니 구하는 수밖에.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눅 11:13).”
성령이 아니시면 아무도 주를 알지 못할 일이었다. 아이들이 못 온다는 연락에 시무룩해하다, 오려나 싶어 막연하게 기다리던 중3 아이가 나오자 어떤 안도가 또 놀라운 주의 손길이 나를 감싸고 계신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나오게 하는 게 내 일이겠나? 그 마음을 열어 복음을 받게 하는 일이 내 일이겠나? 그게 아니라 나는 다만 이 애태우는 마음으로도 무던히 이 길을 따라 가는 것이었으니,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막 8:34).”
오늘 말씀은 내가 나를 부인하기 전까지 십자가를 질 수 없음을 다시금 확신하게 하신다. 내가 주를 따르는 것과 주가 나를 따라오게 하시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전혀 별개의 세상이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 1:8).” 그렇구나. 나를 증인으로 삼으시는 것이었다. 하나님에 대하여, 복음에 대하여 알려주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복음을 나타내는 증인으로 사는 이 길이었다.
나오긴 했으나 아이는 어색하여 했고 그러면서도 눈을 마주치고 귀를 기울이는 게 고마울 따름이었다. 같이 점심을 먹고 올라와 아내는 아이를 끼고 앉아 공부를 시켰다. 나는 뒤로 물러나, 오늘 말씀이 내 심정이었다. “주의 종에게 하신 말씀을 기억하소서 주께서 내게 소망을 가지게 하셨나이다 이 말씀은 나의 고난 중의 위로라 주의 말씀이 나를 살리셨기 때문이니이다(시 119:49-50).” 주가 내게 소망을 가지게 하셨다. 내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시다. 끝 날까지 주가 이루셔야 한다. 내가 할 수 없다.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빌 1:6).” 그러므로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9:8).” 내 안에 이는 조바심이나 어떤 초조함으로 애간장을 녹이는 일에 대하여는 내가 지고 가야 하는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라.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 1:24).”
내가 주를 따른다는 것은 이 고난을 내 육체에 채우는 일이다. 이 괴로움을 오히려 기뻐할 수 있는 것은 그것으로 주의 이름을 부르고, 더욱 바라여 주께 나아갈 수 있는 원동력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더 큰 교회를 꿈꾸지 않는다. 더 많은 사람들을 생각할 수도 없다. 당신은 어떤 목회자가 되시겠습니까? 하고 목사고시 때 받은 질문에 나는 어쩌다 그리 답하였다. 내 곁에 두시는 한 영혼을 진심으로, 주의 이름으로 사랑하는 목회자였으면 좋겠습니다. 나는 이 일이 이처럼 고달플 줄은 몰랐다.
아니지, 여느 교회처럼 여러 명의 사람을 동시에 품고 씨름하는 일이었다면 알 수 없었을 마음이기도 하겠다. 나는 연애하는 사람 같다. 내가 이 아이로 이처럼 인해 온 신경이 또 마음이 졸이고 애가 탈 줄이야. 너무 잘해주지 마! 하는 아내의 핀잔에도 나도 내가 이럴 줄 누가 알았겠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라(요 6:47-48).” 부활을 산다는 일은, 이처럼 나는 으깨어져 가루가 되고 짓이겨져 떡이 되어 떼어지는 일이다.
그럴 수 있는 것은,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17:3).” 이제 알기 때문이다. 놓치게 될까 두려워할 줄 아는 일이다. 내가 주를 사랑한다는 일은 포도 열매로 그대로 있는 게 아니라 뭉개지고 으스러져 국물이 되어 포도주로 아이에게 마시움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요 6:53).” 그러므로 내 속에 그리스도의 살과 피가 있다는 것이다.
마음이 쓰이고, 아픈 데 자꾸 손이 간다. 그러라고 그런 아이를 우리 곁에 두시는 일이었으니, 오늘 말씀은 이를 엄히 일깨우신다.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막 8:35).” 내가 어찌 편하자고 구는 마음으로는 어림없는 거였다. 주가 물으신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27).” 누가 뭐라 하든, 다시 물으신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29).” 그때 나의 대답은 분명하였다.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
그 위에 교회를 세우시는 일이었다. 고작 한두 명의 아이들 놓고 씨름하면서, 그래서 때론 면구스럽고 계면쩍어 송구하기도 하지만, 문득 저 한 영혼이 열 고을보다 만 가지 권세보다 귀하다는 것을 알게 하신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6).” 이에 주님은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18).” 그러므로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19).”
이 얼마나 두렵고 떨리는 영광인가. 내게 두신 이 한 날의 사명이 귀하였다. 나는 주의 이름으로 연애하는 사람이라. 내가 저 아이에게 왜 이처럼 속 끓이고 애태우는가, 나도 잘 모르겠으나 분명한 것은 주의 사랑이라. 내가 가지는 마음이 내 것이 아닌 거였다.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사람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2-3).”
부활을 산다는 일은 결코 달가운 일이 아니다. 내가 지레 죽겠다. 빛도 없고 어쩔 땐 쇠귀에 경 읽기라. 이 마음이 다 무슨 소용인가, 싶다가도. 나도 멈출 수 없는 마음이니, 어떤 원리 같은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로부터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었으니 그 마지막은 영생이라(롬 6:22).” 싫으면서 좋은, 좋으면서 힘든, 힘들지만 자꾸 하게 되는, 마음 쓰임이라. 이를 나는 연애하는 마음으로 이해한다. 주가 나를 어찌 사랑하셨는가, 하는 데서 얻은 마음이다.
내가 죽겠는데 나로 살게 하는 마음이었다. 그렇지,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14:8).” 나도 어쩔 수 없는 마음이지 않나. 화딱지가 나서 다시는 돌아보지도 않겠다고 토라져보지만 별 수 없이 내 안에 두시는 마음이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요 7:38).” 저절로 그리 되어지는 것이어서 나는 속수무책이라. 애면글면 주만 바랄 수밖에.
어떤 업적이나 성과가 아니다.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눅 10:20).” 내 안에 두시는 소원이라. 나는 다시 오늘 아침의 말씀을 읊조린다. “주의 종에게 하신 말씀을 기억하소서 주께서 내게 소망을 가지게 하셨나이다 이 말씀은 나의 고난 중의 위로라 주의 말씀이 나를 살리셨기 때문이니이다(시 119:49-50).”
그러므로 “나로 하여금 깨닫게 하여 주소서 내가 주의 법을 준행하며 전심으로 지키리이다(34).” 또한 “나로 하여금 주의 계명들의 길로 행하게 하소서 내가 이를 즐거워함이니이다(35).” 그래서 “내 마음을 주의 증거들에게 향하게 하시고 탐욕으로 향하지 말게 하소서(36).” 곧 “내 눈을 돌이켜 허탄한 것을 보지 말게 하시고 주의 길에서 나를 살아나게 하소서(37).” 이로써 “주를 경외하게 하는 주의 말씀을 주의 종에게 세우소서(38).” 이는 “진리의 말씀이 내 입에서 조금도 떠나지 말게 하소서 내가 주의 규례를 바랐음이니이다(43).”
내가 사랑하는 주의 계명들을 스스로 즐거워하며
또 내가 사랑하는 주의 계명들을 향하여 내 손을 들고
주의 율례들을 작은 소리로 읊조리리이다
주의 종에게 하신 말씀을 기억하소서
주께서 내게 소망을 가지게 하셨나이다
이 말씀은 나의 고난 중의 위로라
주의 말씀이 나를 살리셨기 때문이니이다
(47-50)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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