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말씀은 능하지 못하심이 없느니라

전봉석 2018. 4. 11. 07:19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하지 못하심이 없느니라

누가복음 1:37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되도다

시편 127:1

 

 

 

잃어버린 것 하나의 의미가 아니라 그 중요한 전부의 의미다. 아흔아홉을 두고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찾는 목자나, 잃어버린 동전을 찾는 여인이나, 집을 나간 아들을 기다리는 아버지나, 찾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을 대변한다. 누가복음 15장을 읽고 있을 때 아이가 왔다. 전날의 아이 글을 보여주고, 읽고 쓰고 싶은 내용을 써보라고 하였다. 얼마쯤 시간이 지났을까. 아이가 써두고 간 글이 마음을 어렵게 했다. 왜 내게 이 아이를 두시는가, 생각이 많아졌다.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말씀을 되새겼다.

 

유독 부모의 싸움이 심하게 일면, 그 말끝에 자신에 대한 언급이 있어 죽고 싶었다. 자신이 태어난 것이 저들에게 짐이 된다고 여겼다. 죽고 싶다는 생각을 여러 번 하였고 어디서 어떻게 죽어야 할까를 구체적으로 생각하였다. 말할 사람이 아무도 없었고 언니의 침묵은 어릴 때의 든든한 아군을 잃은 것 같았다. 말을 하고 싶은데 말을 할 사람이 없고, 어느새 무슨 말을 하고 싶었는지도 모르면서 속은 답답하여 자주 위경련을 호소했다.

 

아이의 글은 마음이 아팠다. 나는 어찌 할 수 없어 답답하였다. 잘해준다고 될 일이 아니었다. 글에 뭐라 답을 해주어야 하는데 할 말이 없었다. 아이와 성경공부를 시작해야겠다. 중간고사가 끝나면 시작하려고 했던 게 별 의미가 없는 것이다. 그럼 어떻게 무엇에 대해 말씀을 나누어야 할까? 혼자 생각이 많았고 마음은 어려웠다. 찾으시는 하나님.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기다리시는 아버지.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하지 못하심이 없느니라(눅 1:37).”

 

오늘 말씀 앞에서 마음을 새로 다진다. 아이에게 맞도록 말씀을 준비해야겠다. 달리 어떻게 다가간들 나의 연민으로나 동정으로는 해결이 될 게 아니다. 오히려 아이의 마음이 내게 전이되어 나는 가슴이 답답하다. 단지 좋은 사람이 되어주라고, 잘해주라고 나에게 보내신 게 아닐 거였다. 아이가 돌아갔다가 다시 왔다. 두어 시간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면서 나는 더욱 마음이 굳혀졌다. 말씀밖에 답이 없겠다. ‘말씀은 능하지 못하심이 없다.’

 

곧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되도다(시 127:1).” 그렇지! 내가 한다고 될 일도 아니며 나는 그저 나 하나 건사하는 일에도 벅찬 사람이다. 성경공부 교재를 만들어야겠다. 마음이 어렵고 외로운 아이였다. 아둔한 게 아니라 무뎌져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는 것이다. 혼자 자취하며 약물을 의존하고 있는 아이의 문제도 마찬가지였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씀을 가지고 어떻게 할 수 있는, 주가 주시는 마음에 지혜를 구하였다. 나는 내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느끼면서 더더욱 말씀뿐임을 확신한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능력이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롬 1:16).” 이를 부끄러워할 게 없는 것은 이 말씀이 내게 소망이라.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5:5).” 당장 죽고 싶어 하는 아이들에게 이 무슨 한가한 일이겠나!

 

아이와 이런저런 얘길 나누면서 더욱 확신하게 되는 것은 단순히 들어주고 위로하고 다독이며 격려한다고 될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여전히 처박혀 은둔형 외톨이로 지내는 녀석에서 성경만 보냈다고 다 된 일이 아니다. 아이와는 서신으로 주고 받는 형태의 성경 읽기와 말씀 묵상을 같이 해야겠다. 내가 할 일이 아니다. 나는 감당이 안 된다. 아이들의 극에 달한 표현이 나를 숨 막히게 한다. 실제 어디서 어떻게 죽을까 찾아보고 다녔다고 하니, 그런 말을 글로나마 적어내는 게 용기이기는 하였다.

 

쓸모없는 존재라고 느끼는 것이다. 어쩌다 잉여가 되었다. 없어지면 그만이라는 생각이다. 어떻게 해야 하나? “그러므로 너는 내가 우리 주를 증언함과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딤후 1:8).” 말씀이 나를 향해 주장하신다.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야 한다. 그럴 때 복음과 함께 고난도 받는다. 대관절 내가 왜 이런 아이들 때문에 힘에 부쳐하는가! 내 안에 두시는 안타까움이 또 절망이 주의 말씀을 의뢰하게 하는 것이다.

 

“이로 말미암아 내가 또 이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함은 내가 믿는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내가 의탁한 것을 그 날까지 그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12).” 다른 더 좋은 수가 없다. 죽이 되던 밥이 되던 성경으로 하자. 같이 읽고 풀어가며 주께 의뢰하자. 내가 감당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매일 같은 말만 되풀이 되는 격이라, 아이에게 무슨 말을 한들. 그저 잘해주는 것으로는 근본적인 해결을 이룰 수 없다. 지레 내가 지친다. 내가 믿는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내가 의탁한 것을 그 날까지 그가 능히 지키실 것이다.

 

내 마음과 내 육신의 일을, 나아가 장래의 어떤 소망에 대하여도 내가 감당할 수는 없다. 주께 의탁한다. 아이를 내 곁에 두신 이유겠다. 다른 일을 볼 수 없다. 아이의 글을 읽고 나는 다만 물어보고 그 정황을 이해할 따름이다. 아버지와의 오랜 반목과 상대적으로 유약한 엄마에 대한 보복심리가 아이를 옴짝달싹 못하게 하였다. 위로를 구할 대상이 아닌 것이다. 그때 누구를 사랑하고 보기 좋게 버림을 받으면서 공황이 왔다고 여긴다. 글의 90%가 그 여자아이 이야기다. 그리움이 절절하다. 한데 그건 단지 불씨였을 뿐 저의 마음은 바짝 마른 상태였다. 내가 아이를 분석한다고 될 일이 아니다.

 

말씀을 보냈으니, 어떻게든 같이 읽고 같이 대화를 나눌 수 있기를 주께 구한다. 어제 그 중3 아이와는 더 미루지 말고 당장 시작해야겠다. 아침마다 건너오는 노인과의 대화에도 어떻게 하면 말씀으로 이끌까? 내 아무리 궁리를 해도 답이 없다. 어제는 전날에 마신 술 이야기를 하다 갔다. 말이 고픈 사람처럼 저는 늘 자기 말만 하다 간다. 하나님은 대체 왜 이런 시간들을 허용하게 하시는 것일까? 말씀을 어떻게 접목시켜야 할까? 이 또한 내가 찾을 수 있는 답이 아니었다.

 

복음은 하나님의 능력이다. 되든 안 되든 말씀으로 대처해야 하는데, 노인은 노인대로 자기 말에 심취해서 너스레를 떨 듯 말을 하다가고, 아이는 어렵사리 입을 열었으나 해답 없는 고민으로 속앓이만 가중시킬 뿐이다. 저기 지방대학에 가 있는 녀석은 더더욱 말할 것도 없고. 직장 타령을 하며 동거남에게 의존하며 살아가고 있는 아이는 또 어쩌면 좋을까? 초등학교 5학년짜리 아이가 겪는 불안도 심각하여 결국은 여자아이들과 같이 하던 글방 시간을 떼어놓았다. 이 모든 게 부모들 문제라. 더 올라가 죄의 삯이다.

 

노인은 어릴 때 부모 없이 홀로 자수성가하듯 살아온 날들이라 그 완고함이 말할 수 없이 강하다. 안 해 본 일이 없을 정도로 산전수전 다 겪어온 사람이라, 하나님에 대하여도 할 말이 많은 위인이다. 영생이 가소로운 것이다. 짧게는 십여 분 길게는 한 시간 가까이 저는 날마다 건너와서 차를 한 잔 하며 이 말 저 말을 떠벌인다. 본인도 왜 내게 이런 말을 하는가 모르겠다며 지나온 날을 털어놓곤 한다. 처가 쪽의 믿음의 뿌리가 저에게는 대수롭지 않을 따름이다. 저들 삶이 오히려 지지리 궁상이니 말이다.

 

함정이다. “그 후에 말씀하시기를 보시옵소서 내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셨으니 그 첫째 것을 폐하심은 둘째 것을 세우려 하심이라(히 10:9).” 다분히 종교적인 행습이 저를 바꿀 수는 없다. 거룩은 도모할 일이 아니다. 나보다 열다섯은 족히 많은 양반이 구구절절 뭘 그렇듯 자신의 날들을 풀어내어 동의를 얻고 싶은 것인가. 교회니까. 목사니까. 저는 강하게 거부하면서도 어려워하며 묻지도 않은 자기 말에 빠져버렸다. 아이들 또한 그럴 것이어서 단지 죽고 싶다는 말이 습관적인 것이겠나. 폐하려하심과 세우려하심이 동시적으로 이루어지는 것 같다.

 

먼저는 기도다. 답이 없다.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그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받으리라(약 5:15).” 저는 그저 하는 일이 잘 되길, 또한 남은여생이 좀 더 윤태하기를 바라나, 나는 저의 병든 영혼을 두고 주께 아뢴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요 15:7).” 다만 나는 구할 뿐이다. 기도노트에 아이 이름을 적고, 노인의 사연을 적어 주께 건넨다. 나의 말은 도와주세요, 하는 바람이다.

 

어떻게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어서 말이다. 되레 저들 눈에 딱하고 안 된 이가 나일 텐데. 내가 무엇으로 주어져 저들을 돌이킬 수 있을까? “나는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여호와 앞에 결단코 범하지 아니하고 선하고 의로운 길을 너희에게 가르칠 것인즉(삼상 12:23).” 주께 아뢰고 구하는 길밖에. 말할 수 있게 하심으로 내가 전하여야 할 것은 말씀인 것을. 아이들에겐 대놓고 성경을 읽자, 할 수 있겠으나 이 노인은 어쩌면 좋을까?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마 6:6).” 나는 말할 수 없어 더욱 더 은밀하다. 노인은 떠들고 나는 주의 이름을 부른다. 아이는 푸념하고 나는 주께 고한다. 나의 심령이 좀 더 강하여야 할 텐데, 나 역시 안정제를 삼키며 주 없이 살 수 없음을 아뢸 뿐이다.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무릇 나의 소망이 그로부터 나오는도다 오직 그만이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원이시요 나의 요새이시니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시 62:5-6).”

 

오늘 말씀은 그 답을 제시한다. “주께서 하신 말씀이 반드시 이루어지리라고 믿은 그 여자에게 복이 있도다(눅 1:45).” 말씀이 반드시 이루어지라는 확신이 복이다.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하지 못하심이 없느니라(37).” 곧 주가 하셔야 한다. 주께서 세우지 않으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다.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되도다(시 127:1).” 내가 하는 게 아니었다.

 

다만 “너희가 일찍이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의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2).” 주께 나를 의탁함이여.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롬 8:24-26).”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