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아셀 지파 바누엘의 딸 안나라 하는 선지자가 있어 나이가 매우 많았더라 그가 결혼한 후 일곱 해 동안 남편과 함께 살다가 과부가 되고 팔십사 세가 되었더라 이 사람이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주야로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섬기더니 마침 이 때에 나아와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예루살렘의 속량을 바라는 모든 사람에게 그에 대하여 말하니라
누가복음 2:36-38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길을 걷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시편 128:1
참 안 됐다, 싶은 때가 있다. 모처럼 친구와 통화를 하다 문득 그런 생각을 하였다. 저의 새언니란 사람은 기껏 믿음이 있고 신앙을 가졌다는 이인데 ‘아들애 때문에’ 조그만 호프집을 차렸다고 했다. 이래저래 말썽만 부려 어려서부터 소년원을 들락거리던 아이였다. 얼마 전에는 자청하여 정신과 치료를 받을 정도로 불안장애가 있었다. 출소하여 여전히 놀고 있으니 같이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아서 그리하였다고 했다. 나름 아들의 흥미(?)를 맞추려고 했던 것일까? 왜 하필! 나는 뭐라 말을 하려다 그만두었다.
믿는다는 이나 안 믿는 이나 그 생각의 정도가 참 안 됐다. 그저 아이가 사회에 잘 적응하였으면 하는 마음이었을 텐데. ‘아이가 행복하다면 그것으로 충분해요.’ 무슨 신파조 고백 같으나, 내 안에 늘 눌린 돌덩이처럼 자라잡고 있는 한 아이엄마의 고백이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었다. 남편과는 거의 별거 중이었다. 새벽예배도 나가고, 나름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던 이라 종종 아이 문제로 여러 차례 통화를 한 적이 있다. 그런데 녀석이 대학을 아랍어과로 가더니, 카이로로 유학을 가고 돌아와 한국 이슬람서원에서 정식으로 이슬람교도가 되었다. 다소 특이하게 굴던 아이였다. 아이의 고집에 나 역시 혀를 내둘렀다. 나는 아이엄마를 걱정하다 통화를 하였을 때, 저의 말은 가관이었다.
아이를 위해 호프집을 차렸다니! 본래 학원을 하던 이였는데 아이가 할 게 없을 것 같아 그리 궁리를 하였던 모양이다. 기껏 없는 돈을 끌어다 투자를 하였는데 차려놓고 보니 아이가 싫다면서 일에 관여하지 않는 것이다. 종종 느끼는 것이지만 우리의 궁리가 우리를 수렁으로 몰아넣는 꼴이다. 잘 될 거라 여겼던 게 올무가 되었다. 애는 애대로 엇나가고 아이엄마는 되레 그 일에 쫓겨 교회를 작파하였다. 혼자 사는 친구는 조카아이 일로 상심이 컸다.
오늘 말씀에서 시므온과 안나를 마주하면 우리의 변덕스러움이 얼마나 큰 죄일 수 있는가를 알게 된다. 안나는 결혼 후 일곱 해만에 남편을 잃어 과부가 되었다. 팔십사 세가 되었다고 하니 족히 육십 년을 혼자 산 셈이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지만 여자가 혼자 산다는 게 그리 녹록한 일이 아니다. 아이 외할머니는 혼자가 된 엄마가 자기 때문에 재혼도 못하고 고생한다며 자신을 괴롭힌다고 했다. 아이들은 매번 모르는 것 같지만 다 알고 있다. 엄마의 폭력적인 언사도 문제지만 할머니의 구박으로 인해 아이는 거의 미칠 지경이다.
좀 나을까 하여 이혼을 했던 게 당사자는 물론 아이들까지 멍들게 하였다. 안나는 어떻게 혼자가 된 몸으로 그 삶을 온전히 보전할 수 있었을까? “이 사람이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주야로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섬기더니” 그 비결은 주를 경외함이었다. “마침 이 때에 나아와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예루살렘의 속량을 바라는 모든 사람에게 그에 대하여 말하니라.” 구세주를 맞이할 수 있었던 영광이다(눅 2:36-38).
나이 많은 시므온의 고백으로 들어보자.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하니(30-32).” 그렇구나.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길을 걷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시 128:1).” 다른 더 좋은 길은 없다. 좀 나아질까 하여 궁리하여 차린 일이 호프집이고, 그저 아이가 행복하다면 그게 기독교이든 이슬람이든, 하나님이든 알라이든 무슨 상관이겠나, 싶은!
되든 안 되든 나는 아이에게 편지를 썼다. 공황으로 인해 전철을 못 탄다고 하니 그럼 전화로 하자. 학기 중이라 광주에 있는 녀석에게 하루 공강인 날과 좋은 시간을 정하라고 하였다. 같이 성경을 읽자고 말이다. 싫다고 할 줄 알면서도 단도직입적으로 그리 권하였다. 엊그제 보낸 성경이 도착하였다. 녀석은 월요일이 좋다고 했다. 오후 두 시로 시간을 정했다. 전화로라도 성경공부를 시작하기로 한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다른 더 좋은 수가 없었다.
그리고 우리 중3 아이는 화요일 글방에 혼자 오는 날로 하여 요한복음을 한 장씩 같이 읽기로 했다. 읽고 풀어주고 질문하는 방식으로, 나는 기도노트에 날짜를 쭉 열거하고 나의 소망을 주께 아뢰었다. 얼추 가을쯤이면 매주 한 장씩 읽는 요한복음이 끝난다. 이번 추수감사주일 때는 아이들에게 학습세례를 줄 수 있기를. 그리고 이어서 에베소서와 빌립보서와 골로새서를 같이 읽으면, 내년 부활주일 때는 세례를 줄 수 있을 거였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막 9:23).”
혼자 일정표를 짜다가 그리 마음을 주시는 걸 두고 정말 그랬으면 참 좋겠다, 하는 심정으로 앉았다가 나도 모르게 눈물이 핑, 돌았다. 내 안에 이는 알 수 없는 감정이 나의 바람을 간절하게 하였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주의 음성이 들리는 듯하였다. 거짓말처럼 ‘그런 아이들’만 온다. 친구도 그리 표현하면서 혀를 내둘렀다. 어른들 때문에 아이들이 병드는 세상이다. 한 녀석은 아버지를 어찌나 미워하는지, 그 복수가 자신을 망가뜨리는 거였다. 두들겨 맞아도, 심한 욕설과 비하로 모멸을 당하면서도, 아빠가 자기 때문에 힘들어하게 하는 게 복수라고 생각했다. 그러지 말라고 한들, 뭐라 달래고 어른들. 중2, 고약한 시기다.
얜 또 더 어려운 게 그 엄마가 교회 신자라. 아버지도 나름 교회를 다녔던 이다. 아이의 기억에는 교회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가 가득하다. 주일에 나오라 하면 자신들 다니는 교회가 따로 있다고 하고, 그럼 그 교회라도 가라 하면 엄마 아빠도 요즘은 안 나간다고 말한다. 말이 샌다. 한참을 말해봐야 흘리고 듣질 않는다. 저에게 더는 가소로운 것이다. 하다못해 놀러오라고 해도 싫단다. 우리의 선의를 뭔가 꿍꿍이가 있는 것으로 해석한다. 당최 이런 아이는 감당이 안 된다. 보면 참 신기한 게 교회를 다닌다는 부모가 더 안달이다. 극성이다. 아이들 숨통을 조인다. 애들은 부모에 대한 혐오를 하나님의 치부로 돌린다.
친구는 한숨을 길게 내쉬며 언제 한 번 조카를 좀 보여주고 싶은데, 하고 말끝을 흐렸다. 그러는 중에 본인은 도자기 모임 사람들과 점심 약속이 있어 나가는 길이란다. 안 믿는 이와 동거를 하고, 안 믿는 이들과 어울려 신세 한탄을 안주로 막걸리 한 잔 곁들여 회포를 푼다. 저들은 가정주부라 낮 시간밖에 그럴(?) 시간이 없다나. 이 무슨 난센스퀴즈도 아니고! 여태 신앙에서 벗어난 언니 걱정을 하며 그 조카 아이 일로 기도를 부탁하던 게 우스갯소리처럼 되었다. 모두가 저마다의 신앙으로 산다.
안 믿는 이들은 오히려 두려워할 줄도 알고, 고마워할 줄도 아는데 믿는다고 여기는 이들은 그저 그러려니 여긴다. 자신도 다 안다는 식이다. 해봤다. 자신도 그리 산다. 그리 이해하면서 세상과 하나님을 버무려 마음의 평안을 도모한다. 아들애가 행복하다면 그것으로 족한 것이다. 뭐라 한들! “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 심하게 되느니라(눅 11:26).” 무서운 일이다.
부디 나의 오늘이 아이들에게 해가 되지 않기를. 아는 체 말고, 나는 좀 나은 체 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내가 받은 은혜를 족한 줄 알고 아이들을 대하자. 나는 종종 두렵다. 행여 나로 인해 주님과의 관계가 모호해질까봐. 나서서 어찌 마음 쓴 것이 나의 공로로 치부될까봐. 고마운 사람 정도로 만족하는 일이 될까봐. 잘 자라가기를. “예수는 지혜와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 가시더라(눅 2:52).”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장성하신 믿음의 분량에까지 자라가기를.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엡 4:13).” 나는 다만 내게 주신 선물의 분량대로 준행하자.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나니(7).” 의사는 아니지만 내가 환자인 걸로, 결코 나는 모범이 될 의인이 아니지만 은혜를 입은 죄인으로. 아이들에게 나를 닮으라는 게 아니라 최소한 나처럼은 되지 말라고.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의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살전 5:23).”
주가 친히 하신다. 하셔야 한다. 내가 나서서 될 일이 아니었다. 나는 다만 시므온처럼 또는 안나처럼 성전에 머물며,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길을 걷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시 128:1).”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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