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나를 괴롭혔으나 나를 이기지 못하였도다

전봉석 2018. 4. 13. 07:14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 말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

누가복음 3:8-9

 

그들이 내가 어릴 때부터 여러 번 나를 괴롭혔으나 나를 이기지 못하였도다

시편 129:2

 

 

 

 

말씀 없이 사는 데는 죄에 대한 책임이 따른다. 다 알면서 그런다.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나니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롬 1:18-19).” 모르지는 않다. 다만 그리 여겨 자신을 묶어두기 싫은 것이다. 그러다 어떤 고통이 신호를 보내고 뇌는 이를 판단하여 경각심을 갖게 하고, 영혼에까지 이르러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돌아보게 한다.

 

아파하는 것을 막아서는 안 된다. 충분히 아팔 수 있도록 시간을 줘야 한다. 너무 일찍 우리는 진통제를 찾듯 ‘괜찮아, 다 잘 될 거야.’ 하는 자아도취에 빠져 버린다. 문득 아이를 대하다가 내가 너무 잘해주려고 하는 마음이나 태도가 일을 그르칠 수 있다는 생각을 하였다. 종일 수업시간에 잤다는 말을 듣고, 늘 늦고 미루고 변명이 많은 그 자체가 중증인 것을 알았다. 스스로 알면서도 그리 내버려두는 데는 막아선다고 될 일은 아닌 것이다. 아파할 줄 알 때 하나님 앞에 나올 용기도 생긴다.

 

새로운 아이들이 왔다. 그 가운데 한 아이를 반장으로 세웠다. 늘 여자애들 틈에서 기를 못 피던 아이였다. 유난히 밝고 명랑하며 아이들을 도우려는 태도가 기특하였다. 한 아이는 거짓말을 입에 달고 산다. 웃자고 하는 말인데 아니면 말고 하는 식이다. 눈 깜짝 않고 능청을 떤다. 외모만으로도 스트레스가 많을 것 같다. 하나님이 여기까지 보내시는 덴 다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나는 요즘 그리 여기며 아이들을 대한다. 일일이 열거하기 뭐하여 아이들에 대해서는 너무 애쓰지 않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나서서 내가 어찌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닌 것이다. 그걸 마치 ‘나만 믿고 따라와.’ 하는 식으로는 감당이 안 된다. 같이 가자. 함께 하자. 중3 아이가 오겠다던 시간을 훌쩍 넘겨 다른 아이들이 다 돌아가고 난 뒤에 왔다. 집에 가 한숨 자고 씻고 밥을 먹고 왔다고 했다. 뭐라 할 말이 없었다. 내가 이런 아이를 어찌 돌이켜 주 앞에 세울까?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걸 새삼 실감하였다. 도저히 가망이 없어 보이는 가운데 참 의지의 대상이 보이는 것 같다. 주를 바람으로 아이를 대한다.

 

예기치 못한 일들을 조성하신다.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요 3:8).” 성령이 하시는 일에 대하여 나는 다만 주를 바라면서 해야 할 일이었다. 아이에 대한 동정과 연민으로는 어림없다. 좀 달라질까 싶다가 오히려 팽하듯 더하는 것 같아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나야말로 마음이 앞서지 않도록 주의해야 할 일이다.

 

아, 그래서 심령이 가난한 자가 되어지는 것이겠구나.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마 5:3).” 내가 어찌할 수 없다는 데 비로소 두 손을 들면서 주의 도우심이 아니고는 말로도 감당이 안 되는 일에 대하여, 애통해하는 것이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4).” 지난 날 나의 어린 시절과 중첩되고 한참씩 주를 멀리하며 등지고 살던 삶에 대하여 돌아보면서, 그 고단함에 대하여. 바동거리던 수고와 애씀에 대하여. 저 아이를 통해 애통함을 배운다.

 

그리하여 온유함이란 주만 바라는 것이었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5).” 내가 위로를 받고 지금 여기, 주 앞에 설 수 있는 땅을 기업으로 얻었으니, 배부를 것이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6).” 만족함이란 주께 향한 것이고 충만함이란 주로 인한 것이다. 내 안에 이는 동정도 주의 것이라.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7).” 내어줌으로 긍휼히 여김을 받는다.

 

이게 맞나? 어떻게 해야 하지? 말씀 앞에 서서, 거울에 비춰 옷매무새를 고치듯 나의 삶을 돌이켜 주를 바라는, 청결이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8).” 돌아보아 나의 어줍음에 대하여 주께 의뢰하는 일이다. 잘해야 하는 일이 아니라, 늘 그 마음에 주를 바라는 것이었다. 화딱지가 나도 내가 아이 앞에서 평온할 수 있는 비결이었다. 아이도 아이 스스로 지금 어쩔 수 없는 것이다.

 

너무 밀착하지는 말자. 아이를 위하고 보듬되 아이를 보지 말자. 그 뒤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보자. 저는 화평이시다.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9).” 그래도 되는 사람처럼 여겨진다 해도 또 다시 용서다. 이해다. 그럴 수 있다는 허용이다. 이는 아이도 아이 스스로 어쩔 수 없다는 걸 인정하는 일이다. 그래서 우리 곁에 보내셨다. 때론 고달프고 역겹기까지 하다.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10).” 내가 느끼는 감정이 단순한 의미 너머의 천국을 바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눈물을 흘리면서도 씨를 뿌리는 일이었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시 126:5).” 어처구니없는 아이의 태도에 주의 인자하심을 되새기게 하신다. 나로 인한 주의 마음이, 사랑이 또한 그러하셨다는 걸 말이다.

 

이것은 역설적으로도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마 5:12).” 그만한 상급이 따르는 일이다. 당장은 가시적인 어떤 성과도 없고 결실도 보지 못하는 일 같으나, 그럼에도 나를 주의 맛을 내는 자리에 두신다. 이 일이 고달프다가도 나로 하여금 오히려 주 앞에 온전할 수 있게 하는 일이다. 팔복을 사는 삶이란 미래지향적인 것으로 어느 훗날 주님 앞에 섰을 때의 나를 연상하게 한다.

 

공부에 지쳐 어깨가 무거운 아이들이다. 안 되니까 더 힘이 들어가고 그래서 지쳐 힘에 겨운 것이다. ‘작년에는 거의 잠만 잤는데, 3학년 되고 오늘 처음 그랬어요.’ 아이의 변명이 우스웠다. 그리곤 지쳐서 오겠다고 한 시간을 돌아서 세 시간은 늦어서 온 것이다. 약속에 대한 개념도, 왜 그래야 하는지에 대한 생각도 없는 아이에게 뭐라 자꾸 나무란다고 될 일은 아니었다. 자는 동안 수업 시간이 바뀌고 쉬는 시간이 몇 차례 지나갔다. 친구들도 선생들도 더는 뭐라 하지 않는다. 그러려니 그저 내버려둘 뿐이다.

 

아이가 느끼는 피로감이 이해가 된다. 하려고 하면 할수록 지치기만 하는 것이다. 무기력증이란 한 것도 없이 고단하다. 잠만 자고 싶다니, 나는 도대체 어디에 호소해야 할까?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13).” 예수님의 말씀은 너무 터무니없다. 이걸 어떻게 내가 준행하며 그 값을 얻을까? 팔복은 기어이 내가 나는 도저히 할 수 없다는 지점에 서게 하신다. 본래 나의 맛이었던 맛을 일깨우신다.

 

내 안의 부패와 마주하게 하신다. 소금에 절이듯 오그라든 영혼으로 숨이 죽었다. 풀이 죽어서는 두 손을 든다. 내가 이런 아이를 어찌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하는 탄식이 절로 나오면서 마음은 가난해지고 나의 애통함은 절실할 수밖에 없으며, 전에는 내가 알아서 할 수 있다던 것에서 놓여나 온유함을 가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긍휼하심을 바람으로 긍휼히 여길 줄도 알고, 화평을 바람으로 화평한 자가 되어 의에 주리고 목마르다. 소금으로 나의 영혼이 먼저 숨이 죽을 때,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14).” 기필코 내 영혼은 빛을 발한다. 기어이 그리 하신다.

 

스스로에게도 일러 주만 바라게 되는 것이다. 그렇지!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15).” 그러듯 다 늦어서 아니 자기 멋대로 굴다, 지금 가도 돼요? 하며 아이가 전화를 할 때 내 안에 알 수 없는 밝음이라니! 성가시고 귀찮은 마음은 맥을 못 추는 것이다. 나의 영혼이 먼저 소금에 절여질 때 화딱지 나던 마음도, 고약하고 괘씸해서 더는 보고 싶지 않던 마음도, 힘에 부쳐 골부리던 마음도 맥을 못 추는 것이다. 숨이 죽었다. 비로소 버무려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 14:8).” 그렇구나. 이를 고백하게 하시는 것이다. “해가 돋고 뜨거운 바람이 불어 풀을 말리면 꽃이 떨어져 그 모양의 아름다움이 없어지나니 부한 자도 그 행하는 일에 이와 같이 쇠잔하리라(약 1:11).” 내 안을 가득 채우고 있던 게 실은 나의 교만이었고 아집이었다는 것을. 내가 주를 바란다는 일은 내 숨이 죽어 비로소 주의 마음이 내 몸에 배는 일이었다. 온통 마음이 아이에게 기우는 것을 경계하신다. 그 또한 옳은 게 아니었다.

 

이미 도끼는 나무 뿌리에 놓였다.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내가 나를 돌아보아 주님과 나의 관계를 바로 하게 하신다. 스스로 자부하지 말자.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 말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마치 내가 주의 일을 한다고 자부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게 없었다. 다만 곁에 두시니, 내가 숨이 죽어 그 축축한 물기가 생수의 강이 되어 흘러나오는 일이었다.

 

그러므로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요 7:38).” 이를 깨달아 회개의 열매를 맺지 못할 때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 가차 없는 것이다. 버려짐은 더 나은 결실을 요구한다. 오늘 말씀 앞에서, 그리하여 나의 실제적인 행함을 돌아본다. “대답하여 이르되 옷 두 벌 있는 자는 옷 없는 자에게 나눠 줄 것이요 먹을 것이 있는 자도 그렇게 할 것이니라 하고(눅 3:11).”

 

막연하고 모호한 사업이 아니다.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행위였다. 다 끝나고 아이들이 돌아갔는데, 지금 가도 돼요? 하는 아이의 말에 ‘어떤 반가움’으로 그래 와! 하고 대답해주어야 하는 일이다. 아이들이 몸서리치는 일은 오늘 우리의 죄를 방증한다. 애고 어른이고, 우리를 괴롭게 하는 것에 대하여 “그들이 내가 어릴 때부터 여러 번 나를 괴롭혔으나 나를 이기지 못하였도다(시 129:2).” 이내 우리는 건드리지 못할 것이다. 나를 이기지는 못할 것이다. “이런 것은 베는 자의 손과 묶는 자의 품에 차지 아니하나니(7).”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다. “지나가는 자들도 여호와의 복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하거나 우리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너희에게 축복한다 하지 아니하느니라(8).” 나의 심령의 가난함과 그 애통함과 의에 주리고 목마름을 저들은 다만 딱히 여기는 일이겠으나,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고전 13:7).” 그럴 수 있는 게 내 안의 그리스도의 영이었다. 사랑이다.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13).”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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