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전봉석 2018. 4. 21. 07:28

 

 

 

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누가복음 11:9-10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에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

시편 137:1

 

 

 

구하라, 하실 때 구할 수 있는 자가 복이다. 그런 사이, 내가 네게 무엇을 줄꼬? 하고 물으시는 주의 음성이 내 것일 때가 귀하다. “기브온에서 밤에 여호와께서 솔로몬의 꿈에 나타나시니라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네게 무엇을 줄꼬 너는 구하라(왕상 3:5).” 구하라, 해도 구할 수 없는 무리로 살아가는 일은 불쌍하다. 공연히 부담스럽고 그래서 그냥 그렇다는 소리로 들리는 것은 불행하다. 주가 말씀하신다. 구하라.

 

이에 “누가 주의 이 많은 백성을 재판할 수 있사오리이까 듣는 마음을 종에게 주사 주의 백성을 재판하여 선악을 분별하게 하옵소서(9).” 나는 솔로몬이 구한 ‘듣는 마음’을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으로 이해하였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5-8).”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심으로 십자가에 죽으시기까지의 마음은 웬 일인가? 솔로몬이 구하였던 듣는 마음은 저들이 주의 백성이기 때문이었다. 그 백성은, 자신을 내어주어 죽기까지 사랑하신 우리를 향한 사랑이었다. 그리고 이제 우리에게도 그 마음을 품으라고 하신다. 내게 두시는 마음으로 어떤 속상함, 내내 마음에 걸리는 일에 대하여. 내가 왜 저 아이 때문에 속을 끓이나 했더니 바로 그 때문이었다. 아내는 그냥 두라고 하지만 나는 아무래도 먼저 사과를 하고 그래도 애들 마음을 풀어줘야 할 것 같았다.

 

참 희한한 일이다. 구한다는 게 이제는 전의 것과 사뭇 다른 것이다. 날 위해 구하던 일이 듣는 마음을 바라듯 ‘저 아이’를 위한 게 되었다. 내심 마음이 무거운데 그게 또 신기하여서 자꾸자꾸 돌아보곤 한다. 뭘 꼭 그럴 거까지, 그럼 괜히 애들한테 호구가 될 텐데. 아내는 내가 아이들에게 먼저 사과하는 것에 대해 그리 말하였다. 그래. 더는 정주지 말아야지. 거기까지, 딱 선을 긋고 대해야지. 하고 생각한다고 해서 되는 마음이 아니어서 말이다.

 

설교원고를 작성하면서도, 점심을 먹으러 오고 가는 길 위에서도 나는 내 마음이 왜 이처럼 무거운가 생각하였다. 오후께 약사아이가 카톡을 했다. 병원약사들 앞에서 첫 강의를 하고 얻은 수입을 첫 열매로 삼아 교회로 보낸다는 내용이었다. 마치 까먹고 있던 나의 역할과 글방이 교회였다는 것을 잊고 있던 사람처럼 어떤 부끄러움이 먹물처럼 번졌다. 속상하고 답답했던 마음이 설마 아이들로 인해 자존심이 상했던 것은 아닐까? 하고 생각하니 송구한 마음이 들었다. 예수님이야말로 빈번히 무시당하시면서도 저들 가운데 계시지 않았던가.

 

그런 이가 이르신다. “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눅 11:9-10).” 대체 난 지금 무얼 구하고 있는 것일까? 내가 기분 상하고 상처 받은 것을 위로 받기를 구하고 있었던가. 아니면 두고 보자, 하는 심정으로 어떤 앙금을 가지고 있으려던 건 아닐까?

 

기어이 다 잃고 난 뒤에야 울을 것인지.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에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시 137:1).” 미루고 꺼려하던 마음을 외면하지 않았다. 아니 그것이 계속 쓸리고 까여 내 속이 아려서 견딜 수가 없었다. 아이들이 다시 오고 안 오고는 다음 문제였다. 되바라지고 괘씸한 것도 중심 문제가 아니었다. 어쨌든 그 아이들이 여전히 내 안에서 볶이고 쓸려 견딜 수가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위로는 아니 정신이 번쩍 들게 하시는 일은 참으로 기묘하다. 그저 외면하고 돌아앉아 있으려는데, 첫 강의를 하고 얻은 수입을 주의 이름으로 보내오다니! 맡은 자로서 내가 구할 것이 무엇인가를 바로 한 방 먹이시는 것 같았다. 아, “네 몸의 등불은 눈이라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만일 나쁘면 네 몸도 어두우리라(눅 11:34).” 바로 보지 못할 때 단지 못 보는 눈의 문제로 그치는 일이 아닌 것이다. 그것으로 내 온 몸은 어둠에 갇힌다. “그러므로 네 속에 있는 빛이 어둡지 아니한가 보라(35).”

 

어떤 서운함이 또 기분상한 마음이 정작 주 앞에 나의 부끄러움을 드러나게 하시는구나. 그러므로 “네 온 몸이 밝아 조금도 어두운 데가 없으면 등불의 빛이 너를 비출 때와 같이 온전히 밝으리라 하시니라(36).” 우울한 마음으로 설교원고를 작성하려니까, 갑자기 본문이 너무 길어서 허둥대고, 두 이야기가 서로 엉겨서 흔들리고, 왜 이처럼 기쁨이 없는가 했더니 그래서였다. 더 이상 나로 하여금 죄의 속성에 굴복하지 못하게 하시는, 내 안의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었다.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롬 6:6).” 나름 잘나가던 글방 선생으로 지내던 때와는 다른 것이다. 그때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렇게 끊어내고 단호하게 꾸짖어 돌려보내는 게 옳다고 생각했다. 그것을 아이엄마들도 또 아이들도 ‘멋지게’ 여기던 때도 있었다. 뭔가 다른 것이다. 할 만큼 하다 안 되면 가차 없이 끊어내던 일이다. 한데 지금은 그 가지가 내 가지가 아니었다는 것. 쳐내도 내가 쳐내는 게 아니라는 걸.

 

내 안에 살리는 영이 계시다는 증거였으니,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생령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고전 15:45).” 주의 마음을 품고 산다는 일은, “그러나 먼저는 신령한 사람이 아니요 육의 사람이요 그 다음에 신령한 사람이니라(46).” 곁에 두시는 이들에 대하여 아무튼 내가 그 증거가 돼야 하는 일이었다. 이를 알게 하시려고 어제 그렇게 속을 볶으시었나. 그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예수께서 이르시되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요 14:9).”

 

저들이 또한 나의 작은 예수였다는 것.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니라(막 9:37).” 이처럼 말씀이 나를 이끄시는 게 신기하다. 막연하였던 마음이 왜 그런가, 선명하여졌다. 결국 나는 하나님과의 연합이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엡 4:13).”

 

그러니 이제부터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저절로 그리 자꾸 마음이 쓰이는 일에 대하여는 그 주도권이 주께 있음이다. 내 것이 아닌 것이다. 아내는 더 우습게 보일지 모른다고 했지만 나는 어쩔 수 없어서 각각 문자를 넣었다.

 

생각이 나서, 자꾸 마음이 쓰여서 그리 하고 차라리 욕을 먹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어쨌든 또 애들이지 않나. 문득 어느 우화 한 편이 떠오른다. 결혼을 늦게 하여 늦게 본 아이를 한 선비는 그저 오냐오냐만 했더랬다. 수염을 당기고 머리를 치고 장난을 걸어도 허허 웃으며 다 받아준 것이다. 하루는 귀한 이가 와서 엄중한 자리였는데, 아이가 평소처럼 장난을 걸고 예의 없이 굴던 것이다. 이 놈! 하고 뭐라 꾸짖어 야단을 쳤더니, 대뜸 이 아이가 선비의 뺨을 치며, 왜 그래? 오늘 따라! 하였더란다.

 

내가 딱 그 꼴이지 싶다. 그러게. 내게 가장 큰 문제는 과도한 감정이입이다. 그러지 말아야지, 선을 그어야지. 하는데 그게 또 이런저런 아이의 딱한 사정 때문인지 오냐오냐만 했던 것이다. 참 어렵다. 한 사람을 대하는 일은 그의 전부를 마주하는 일이다. 평생 살아온 저의 성질도 못난 근성도 또는 악한 기질도 보듬는 일이다. 그게 어찌 같은 사람으로 감당이 되겠나? 결국은 또 주의 마음이라. 내게도 ‘듣는 마음’을 주소서, 주께 구한다. 내 안에 듣는 저 아이들의 마음이 결국은 주의 백성이고, 그처럼 사랑하신 주의 자녀가 아닌가.

 

그러므로 이 아침, 주의 마음을 구한다.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눅 11:10).” 반드시 그러하심을.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13).” 성령이 아니고는 나는 감당할 수 없는 마음이어서. “그러므로 네 속에 있는 빛이 어둡지 아니한가 보라(35).”

 

곧 나의 길은 빛에 거함이었다.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엡 5:8).” 그것도 내가 내 의지나 힘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이어서,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요 14:10).” 일일이 카톡을 하고 먼저 사과를 하면서, 나의 못나고 아둔함을 주께서 용서하시고 그럼에도 선한 길로 인도하여 주시기를.

 

아,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시 51:10).” 이에 주께서 날 위해 기도하신다. “곧 내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그들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요 17:23).”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