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506 주일
로마서 2:17-21
의지하며 자랑하며
2:17 유대인이라 불리는 네가 율법을 의지하며 하나님을 자랑하며
2:18 율법의 교훈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알고 지극히 선한 것을 분간하며
2:19 맹인의 길을 인도하는 자요 어둠에 있는 자의 빛이요
2:20 율법에 있는 지식과 진리의 모본을 가진 자로서 어리석은 자의 교사요 어린 아이의 선생이라고 스스로 믿으니
2:21 그러면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네가 네 자신은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도둑질하지 말라 선포하는 네가 도둑질하느냐
들어가는 말
믿음에 대해, 스스로 확신하면 신념이 되고 되물어 자신을 쳐 복종시키면 하나님의 의가 된다. 이에 따른 성경의 본은 바울의 경우이다.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고전 9:27).” 이 두려움은 불신에 의한 것이 아니다. 곧 하나님에 대한 불신이 아니라 자신의 연약함에 대해 인정하는 것이다. 스스로 자신의 믿음을 자부하는 자에게서는 결코 볼 수 없는 자세이다. 곧 우리가 크게 오해하는 것 중 하나는 믿음이 마치 자신의 것인 줄 안다. 믿는다는 것을 스스로의 자유의지에 의한 선택으로 보는 것이다. 그래서 때론 ‘믿어주는 일’로 착각한다. 성경은 분명히 말씀하시길, 믿음은 선물로 주신 것으로 그 값은 전적인 은혜이지 우리가 이룩한 그 어떤 결과가 아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 2:8).” 곧 우리가 늘 명심해야 할 것은 누구의 설득에 의한 이해도 아니고 어떤 남다른 체험에 의한 깨달음도 아니다. 스스로의 결의와 각오로 이루어진 것도 아니며 전적인 나의 자유의지에 의한 선택도 아니다.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행 2:38).” 성령으로 생겨나 내 안에서 주도하시는 것이 믿음이다. 그러므로 믿지 못하는 건 당연하고, 믿는 일보다 믿지 않는 일은 타당하다. 훨씬 설득력이 있다.
“그 날에 네가 내게 범죄한 모든 행위로 말미암아 수치를 당하지 아니할 것은 그 때에 내가 네 가운데서 교만하여 자랑하는 자들을 제거하여 네가 나의 성산에서 다시는 교만하지 않게 할 것임이라(습 3:11).” 주가 하신 일이지 내가 이룬 게 아니다. 주께서 나의 교만을 제거하신 일이고 나의 확신이 되신 일이다.
지난 주일에 우리는 스스로 그럴 수 없는,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진노 아래 놓여있음을 확인하였다. 이는 복음을 듣는 자이거나 이를 거부하는 자이거나, 믿는 자이거나 믿지 않는 자이거나, 성경을 알거나 성경을 모르거나 똑같이 우리는 모두 죄인이다. 곧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으로 우리는 이 땅을 산다. 누구라도 예외는 아니다. 육을 입고 사는 동안 행여 자신을 확신하는 일만큼, 스스로를 쳐 복종시켜야 할 일이지 그 수고와 노력으로 이루어지는 게 믿음이 아니다. 오히려 믿는다고 믿는 자신의 믿음을 확신과 신념으로 바꿔 자신의 깨달음으로 두려할 때 영락없이 우리는 ‘불의로 진리를 막는’ 일을 하게 돼 있다. 왜냐하면 이에 그 믿음 또한 자기 의로 삼으니, 믿음도 우상이라. 우리의 믿음이 우리의 영혼을 해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날마다 자신은 죽는다고 고백하였다.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 15:31).” 자신을 쳐 복종시키지 않으면, 날마다 살아나는 ‘그 무엇’이 우리 안에 있었으니 곧 우리 안의 ‘상실한 마음’이라. 정녕 우리의 믿음이 오히려 그 마음으로 하나님 두기를 싫어할 수도 있다는 사실 앞에 두려워할 줄 알아야 한다. 곧 스스로 확신할 때, ‘그 깨달음’을 신념으로 삼으려 할 때,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롬 1:28).”
그 증거는 뚜렷하였다.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29-31).” 내 안에는 이와 같은 마음이 없다고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 그러니 교회를 다닌다고 해서, 스스로를 믿는 사람이라고 하여, 스스로 그리스도인으로 여긴다면, 저는 하나님을 모르고 자신의 의로 의롭게 사는 이보다 악하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우리는 결코 저들보다 더 나은 바 없다. 우리는 결코 올바른 삶을 삶으로 구원을 이룬 게 아니듯이 믿음이 그리 주어진 게 아니다. 그리고 스가랴 선지자의 증언처럼 왜 오늘 날 우리를 이런 상황 가운데 그대로 두시는가를 확인하여야 한다. “내가 곤고하고 가난한 백성을 네 가운데에 남겨 두리니 그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의탁하여 보호를 받을지라(습 3:12).” 곧 우리가 사는 이유는 분명하여서, 첫 번째 우리를 여기에 두시는 까닭은 ‘곤고하고 가난한 백성’들 가운데 우리를 두신 것이다. 두 번째는 우리들로 하여금 저들로 하나님의 이름을 의탁하고 보호를 받을 수 있도록 하는, 증인으로 삼으신 것이다.
1. 왜 그래야 하나?
첫째, 우리는 말씀을 맡은 자들이기 때문이다.
“범사에 많으니 우선은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음이니라(롬 3:2).”
그러므로 우리가 구할 것은 충성이다.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고전 4:2).” 충성은 때로 억울하고 납득이 안 되는 가운데서도 묵묵히 준행함이다. 자신의 의견을 낼 수 없다. 명령에 따라야 한다. 왜 그래야 하는지, 회의와 갈등 앞에서도 말이다. 이는 받은 자의 철칙이다. “알지 못하고 맞을 일을 행한 종은 적게 맞으리라 무릇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요구할 것이요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달라 할 것이니라(눅 12:48).” 그걸 몰랐으면 몰라서 심판이 따르고, 알았으면 알고도 행하지 않음으로 책임이 따른다. 그러므로 “맡은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양 무리의 본이 되라(벧전 5:3).”
둘째,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알고 분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율법의 교훈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알고 지극히 선한 것을 분간하며(2:18).”
성경을 모르는 거나 부정하는 자는, 스스로 자신의 판단과 기준으로 그 자신이 비판하고 정죄하던 것으로 심판에 놓인다. 성경을 알고 이를 받은 자로서는 더 엄밀한 판단과 기준으로 심판을 받는다. 누가 누굴 판단하는가?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누구를 막론하고 네가 핑계하지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롬 2:1).” 우리는 다 안다. “이런 일을 행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진리대로 되는 줄 우리가 아노라(2).” 흔히들 말하길 ‘그러다 벌 받아!’ 하는 따위의 말처럼.
그러므로 스스로 물어보라. “이런 일을 행하는 자를 판단하고도 같은 일을 행하는 사람아, 네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줄로 생각하느냐(3).” 감히 주의 은총이 아니고는,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이 풍성함을 멸시하느냐(4).” 그런데 오히려 “다만 네 고집과 회개하지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5).” 이를 우리는 분간할 줄 안다. 두려워할 줄 안다. 앎으로 아는 만큼 자신을 쳐서 복종시키는 것이다.
셋째, 우리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자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유대인이라 불리는 네가 율법을 의지하며 하나님을 자랑하며(17).”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또한 우리는 본질상 진노의 자녀들이었다.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엡 2:3).” 그런데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4-5).” 결코 우리가 어떤 수고와 노력으로, 애씀과 힘씀으로 얻은 게 아니다. 그런 이가 누가 누굴 판단하랴! 우리는 이제 우리의 허물과 죄로 낙심하고 실망하는 자리에 거하는 게 아니라, 주를 의지할 수 있고 이를 자랑으로 삼을 수 있다. 내 의가 아니라 주의 의로 말미암은 것을 자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2.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첫째, 저들을 인도하는 빛이 되어야 한다.
“맹인의 길을 인도하는 자요 어둠에 있는 자의 빛이요(19).”
이는 우리가 사는 이유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마 5:13).” 먼저가 소금이다. 나의 빳빳하던 아집과 고집이 제풀에 꺾여 절여져야 하고, 부패를 방지함으로 나의 그릇됨이 정지 돼야 한다. 저들에게 그 맛을 다해야 한다. 또한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14).” 그러므로 우리의 행실은 숨겨질 수 없는 것이다.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15).”
그러니 이를 누가 달가워할까? 그리스도인으로 안 믿는 사람들과 잘 어울리면서 아무렇지 않고 오히려 저들로부터 환영을 받고 존경을 입는다면, 이는 심각하게 돌아봐야 할 문제다. 부패한 데 따른 소금은 지독하여서 거부함은 거의 적개적이다. 어둠에게 빛이란 그 존재를 몰아내는 일이어서 어둠의 강한 저항은 당연한 일이다. 곧 우리는 세상으로부터 천대와 멸시를 받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이지 저들의 환영과 칭찬을 듣는 일은 분명히 이상한 일이다. 스스로 내세워 자랑으로 바꾸었거나, 꾸며서 저들의 기호에 맞추었거나! 그럼에도 그 맛을 잃지 않고 소금으로써 사람들의 찬사를 받고 무던히 산 위에 있는 동네를 밝히는 빛으로 역할을 다하고 있다면, 잠깐 돌아볼 필요가 있다.
둘째, 우리는 곧 어린아이의 선생이다.
“율법에 있는 지식과 진리의 모본을 가진 자로서 어리석은 자의 교사요 어린 아이의 선생이라고 스스로 믿으니(20).”
직접적으로도 우리는 지금 어린아이들의 선생으로 살고 있다. 실은 믿는 사람들이란 영적으로 어리석은 자의 교사이고 어린아이의 선생이 된다. 저들 앞에서 진리의 모본이 되는 교사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남들 같이 어리석은 가운데 거하는 게 아니라, 때론 고리타분하다는 소리를 듣고 때로는 답답한 인사로 취급을 받으면서도, 저들의 선생이 되어야 한다. 이는 스스로 그리 여기는 바가 아니라 주께서 우리에게 두신, 맡기신 일이다.
3. 그런데 무엇이 문제인가?
첫째, 다른 사람은 가르치면서 자신은 가르치지 않는다.
“그러면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네가 네 자신은 가르치지 아니하느냐(21).”
그런데 이를 대수롭지 않게 여길 때, 저들과 다를 바 없이 어리석은 데 거할 때, 그러면서 누굴 가르치고 훈계하고 판단하고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우리는 비판을 받을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마 7:2).” 이 얼마나 고달픈 일인가는, 실전에 있어야 한다. 좁은 길로 들어가야 안다. 큰 길에서는 모른다. 사는 게 전쟁이다. 날마다 싸움이다. 꼴 보기 싫고 정나미 떨어지는 가운데서도 우리는 우리의 헤아림으로 주를 닮아야 하는 일이다. 곧 “또 이르시되 너희가 무엇을 듣는가 스스로 삼가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며 더 받으리니(막 4:24).”
그러므로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눅 6:38).” 이게 그렇게 스스로는 안 되니까, 우리는 날마다 매순간 사람들 앞에서가 아니라 주님 앞에서, 말씀 붙들고 씨름하고 몸부림치는 것이다.
둘째, 자신이 말한 것을 자신이 도둑질하는 경우다.
“도둑질하지 말라 선포하는 네가 도둑질하느냐 간음하지 말라 말하는 네가 간음하느냐 우상을 가증히 여기는 네가 신전 물건을 도둑질하느냐 율법을 자랑하는 네가 율법을 범함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느냐(21-23).”
우리는 입바른 소리로 누굴 잘 가르치고 뭐라 비난하고, 힐난하며 원망하기는 잘하면서, 정작 자기 자신에게는 아무렇지도 않게 구는 일. 이는 주의 시간을 도둑질 하는 일이고, 주의 마음을 흘리고 다니며, 주의 사랑과 은혜를 허비하는 일이다. 안 그런 척, 위선을 떨고 시치미 뚝, 떼는 게 영적으로 간음하는 자이다. 자신의 유익을 탐하고 남의 것을 도둑질하는 일이다. 우상을 가증하게 여기면서 우리 또한 어떤 요행을 바라고 행운을 구하며, ‘운빨’을 운운하며 기대한다. 이는 우리가 율법을 어김으로 하나님을 모독하는 일이다. 믿는다고 하는 이들이 자기의 유익을 구할 때, 사회의 지탄은 고스란히 교회로 향하고 하나님을 모독한다.
4. 그 결과로 나타나는 현상은 무엇인가?
첫째, 하나님의 이름이 모독을 당한다.
“기록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 때문에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는도다(24).”
둘째, 믿는 자가 안 믿는 자보다 악하다.
“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이르시되 이것이 곧 예루살렘이라 내가 그를 이방인 가운데에 두어 나라들이 둘러 있게 하였거늘 그가 내 규례를 거슬러서 이방인보다 악을 더 행하며 내 율례도 그리함이 그를 둘러 있는 나라들보다 더하니 이는 그들이 내 규례를 버리고 내 율례를 행하지 아니하였음이니라(겔 5:5-6).”
나오는 말
오늘 말씀을 다시 읽으면서 말씀을 정리하자. “유대인이라 불리는 네가” 여기서 유대인인 믿는다는 자들을 일컫는다. 그런 우리가 “스스로 믿으니 그러면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네가 네 자신은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도둑질하지 말라 선포하는 네가 도둑질하느냐”
그럼 우리 믿는 자들은 어찌 행해야 할까?
1. 하나님은 산 자의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에게는 모든 사람이 살았느니라 하시니(눅 20:38).” 이에 호흡이 있는 자는 주를 찬양한다. “호흡이 있는 자마다 여호와를 찬양할지어다 할렐루야(시 150:6).” 혹시 자기 안에 날마다 쳐 복종시킬 자신이 없다면, 그래서 날마다 죽고 또 죽여야 하는 자기 싸움이 없다면, 이는 결코 영적으로 살아 있는 자가 아니다.
2. 우리의 기도는 권리가 아니라 의무다.
“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막 9:29).” 그러니 우리가 그럼 그 일을 감당할 수 있겠나? 노력하고 애쓰면, 악으로 깡으로 이룰 수 있는 게 믿음이고 구원이라면, 이 또한 어찌 하나님의 은혜라 할 수 있겠나? 아무리 애쓰고 또 수고해도 도저히 어찌 감당이 안 되는 일이어서, 우리가 구할 것은 기도뿐인 것이다. 이는 의무다. 영적인 생존을 위한 필수다. 호흡이 있는 자마다 기도한다. 기도는 주께 향하는 전적인 찬양이다.
3. 우리의 교회도 그 사명이 기도다.
“내가 곧 그들을 나의 성산으로 인도하여 기도하는 내 집에서 그들을 기쁘게 할 것이며 그들의 번제와 희생을 나의 제단에서 기꺼이 받게 되리니 이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이 될 것임이라(사 56:7).” 결코 우리의 노력으로는 이룰 수 없는 일에 대하여, “우리가 잉태하고 산고를 당하였을지라도 바람을 낳은 것 같아서 땅에 구원을 베풀지 못하였고 세계의 거민을 출산하지 못하였나이다(사 6:18).” 이에 주의 도우심만을 바라고, 의지하며 자랑하는 것이 기도요, 찬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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