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전봉석 2018. 5. 7. 07:16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만일 하늘에서 주신 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

요한복음 3:27, 30

 

구원은 여호와께 있사오니 주의 복을 주의 백성에게 내리소서 (셀라)

시편 3:8

 

 

 

곧 “하나님이 보내신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니 이는 하나님이 성령을 한량 없이 주심이니라(요 3:34).” 하는 세례 요한의 증거에 귀를 기울여본다. 저의 신앙은 뚜렷하였다. 주는 흥하여야 하고 우리는 쇠하여야 한다. 우리가 흥하여 할 때 주의 영광은 쇠한다. 이런저런 일로 마음이 어려운 일에 대하여는, 그것으로 주를 바람이라. 성령이 계시면 본연의 선한 양심은 살아난다. 주를 바란다. 성령 없이 예민한 자는 정신병자가 된다. 우리의 영은 병들 수 있어도 파괴될 수 없다.

 

하나님이 내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신 생령이 된 그것이다. 지금은 이게 무슨 소린가 싶다가도, “이를 놀랍게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5:28-29).” 부활의 때가 온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은 우리가 스스로 다스릴 수 없다. 아니, 하나님께서 다스리실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나무 그늘에 숨는다.

 

행여 나에 대한 권리 행사는 죄를 끌어들일 뿐이다.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롬 5:12).” 그런 맥락에서 오늘 요한의 제자들이 자신들의 권리를 침범하는 예수님의 일에 대해 경계하자, 세례 요한의 주장은 분명하였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예배를 예배하는 시대다. 주일을 주일하는 일이 흔하다. 찬양을 찬양하고 전도를 전도하는 경우는 다반사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에 어려움을 토로하면서 그저 주일을 지키고 찬양을 한다. 저마다 천국을 운운하지만 하나님의 나라를 선호하지는 않는다. 저마다 우리는 그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면서 하나님을 믿는다고 한다. 바로 그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삶이란 얼마나 척박하고 인위적인지 모른다. 스스로의 만족을 찾아 예배를 하고 주일을 지키고 찬양과 기도로 자신의 위로를 삼으려 하는 것은 아닐지.

 

니고데모가 예수님 앞에 나왔다. 그는 바리새인 중에 하나였다. 유대인의 지도자라. 아무래도 남들 이목이 신경 쓰였는가보다. 그는 밤 시간에 왔다. 예수님의 행적에 대해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는 고백을 하면서, ‘우리가’ 하는 시선으로 아뢴다. 막연한 것이다. 그러면서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2).” 하고 확신한다. 예수님은 거듭남에 대하여 요구하신다.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7).” 그저 좋은 시절을 보낼 때는 모른다. 적당하다고 여겨 살만한 때는 알 수 없다. 결코 자신의 죄를 인정할 수 없는 때이다.

 

그런 가운데 예수의 가르치심은 분명하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3).” 바로 볼 수 없는 까닭은 거듭나지 않아서이다. 이를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전할 때 다음과 같이 정의하였다. “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이거니와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나셨느니라(고전 15:47).” 거듭난다는 것은 더 이상 선한 양심에 걸려 죄의 속성을 따를 수 없는 일이다.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롬 6:6-7).” 더는 죄의 종으로 살지 못한다. 예전에 즐기던 것을 결코 바랄 수도 달가워할 수도 없는 일이다. 내 안에 이는 여러 생각들이 누구로 인해 또 어떤 무엇을 향해 일렁거리는가를 보면 그 속의 역사를 짐작할 수 있다.

 

그렇지. 거듭남이란 영의 속성을 회복하는 일로써 더는 땅의 일에 휩쓸리지 않는 것이다.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생령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 그러나 먼저는 신령한 사람이 아니요 육의 사람이요 그 다음에 신령한 사람이니라(고전 15:45-46).” 이는 내 안에 이제 함께 거하시는 하나님의 영을 바로 보고 알게 한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요 14:9).”

 

그저 예배를 예배하는 예배가 되지 않기를 위해. 주일을 다만 주일하는 것으로 그치는 주일이 되지 않기를. 누구를 향한 마음이 다만 아쉬움으로 그치고 마는 게 아니었기를. 그러기 위해서도 더욱 주와 연합해야 하는 삶이어야 했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엡 4:13).” 나오지 못하는 이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답답하다가도 누군가의 기도와 후원으로 오늘도 나를 이곳에 세우시는 주의 뜻을 행한다.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14).” 당장의 일로 징징거리는 어린아이와 같지 않기를. 나아가 더는 사람들의 관점과 그 시선에 연연하여 교회를 섬기는 일이 없도록.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는 따위의 일에서 말이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요 3:7-8).”

 

성령으로 되어지는 일에 있어서 나는 다만 주를 바랄 따름이다. 주께서 임의로 인도하신다. 애써 이제 좀 어떤 성과가 있으려나, 하고 기대하던 마음에 여지없이 실망을 안기신다. 혹시나 하는 기대는 나뿐만이 아니었던가보다. 아내도 우 사장 아버님이 함께 나아와 예배드릴 수도 있겠다, 하고 기다렸던가 보다. 이와 같은 안달이 더러 우리를 실망시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그와 같은 실망으로 우린 다시 주를 바란다. 서로 다른 존재에 대하여는 우리가 나서서 이를 개선하거나 물릴 수 없다. “무릇 흙에 속한 자들은 저 흙에 속한 자와 같고 무릇 하늘에 속한 자들은 저 하늘에 속한 이와 같으니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 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이의 형상을 입으리라(고전 15:48-49).”

 

그러므로 사람을 보고 아이에게 기대를 걸고 어떤 누구에게 희망을 품는 일은 어리석다. 다만 주를 바라볼 뿐이라. 이 땅의 모든 아름다운 것은 지나간다. “주께서 죄악을 책망하사 사람을 징계하실 때에 그 영화를 좀먹음 같이 소멸하게 하시니 참으로 인생이란 모두 헛될 뿐이니이다 (셀라)(시 39:11).” 이를 바로 아는 게 지혜라. 그러므로 주를 경외한다. 어제 아침에 붙든 말씀처럼, 그렇지!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섬기고 떨며 즐거워할지어다(2:11).” 그럴 수 있는 게 복이었다.

 

그럴 수 있는 자로 세우신 게 은총이다. 그리하여 누구를 또 어떤 한 영혼을 품고 주 앞에 엎드릴 수 있는 일에 대하여, 오늘 주님은 이를 분명히 말씀하신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요 3:3, 7).” 그러기까지 고통 없이 거듭남이란 없다. 그 고통은 내가 여전히 세상을 사랑하는 속성에 의해 싸우고 씨름해야 하는, ‘상실한 마음’ 때문이다.

 

본래 그 마음은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는 마음이었다. 여전하여 우린 은연중에 하나님 없는 하나님의 나라를 꿈꾼다. 예배를 위한 예배를 좇아가는 격이다. 잘 차려 입고 좋은 공연을 보러, 멋진 연설을 들으려, 그리하여 마음의 위로를 도모하는 정도에서. 행여 우리의 예배가 그러하지 않기를. 나의 바람이 나의 소원을 이루는 데 있지 않기를. 함께 찬송하면서 자꾸만 눈시울이 붉어졌던 것은 그 때문이었다. 나는 정말 저 아이의 영혼을 주의 마음으로, 주의 사랑으로 사랑한 것이 맞는 것일까? 하는 부끄러움으로.

 

내 안에 이는 속상함이 단지 어떤 거절에 따른 자존심이 상한 게 아니었기를. 온전히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 주가 주를 내어주신 데 따른 분명한 진리는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17).” 그러므로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18).”

 

그럼 내게 필요한 자세가 무얼까? 오늘 세례 요한은 이를 일깨운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30).” 이를 거꾸로 바라는 마음에서 서러움도 일고 속상함도 더해져 어쩌면 나의 눈물이 나를 위하고 더하려는 마음에서는 아닐는지. 그러므로 다른 수 없다. “하나님이 보내신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니 이는 하나님이 성령을 한량 없이 주심이니라(34).” 주의 성령을 한량없이 주시기를. 그리하여 하나님의 말씀만을 하는 사람으로 살다 낭의 남은 생을 다할 수 있기를. 부디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30).”

 

그러므로 이제 나로 하여금 “천만인이 나를 에워싸 진 친다 하여도 나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리이다(시 3:6).” 이는 분명하여서 “구원은 여호와께 있사오니 주의 복을 주의 백성에게 내리소서 (셀라)(8).”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