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는 그의 몸을 그들에게 의탁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요
요한복음 2:24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섬기고 떨며 즐거워할지어다
시편 2:11
사람 속을 누가 알겠나. 천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더니, 나는 아이의 거절에 상처를 받았다. 종교적인, 그래서 예배는 부담이 된다는 거였다. 여태 왜 우리가 같이 함께 가자, 하였는지 말하고 위하고 더하였던 마음이 수포로 돌아간 것 같았다. 순간 어떤 서운함이 또는 실망이 마음을 엄습했다. 징글징글한 마음이었다. 예수 때문이 아니면 내가 이런 아이를 대체 왜 공들여 마음을 다해야 할까? 마음을 다잡는 일이 쉽지 않았다. 그래 알았어, 하고 인정하고 말아야 하는지. 그래도 다시 붙들고 이어가야 할 마음인지.
음력으로 아내 생일이기도 하여 딸애가 점심을 산다며 같이 나왔다. 아이는 돌아가고 내내 마음이 어려웠다. 이게 그러니까, 나는 이런 마음이 늘 익숙하지가 않다. 혼자 짝사랑하는 것 같기도 하고, 연애하는 마음 같기도 하고, 실연을 당해 슬픈 마음인 것 같기도 하고. 도대체 이런 마음을 어찌 설명하여 알게 할 수 있겠나. 말 수가 줄고 혼자 시무룩하여 괜히 슬펐다. 오늘 말씀이 그런 대목일까?
“또 사람에 대하여 누구의 증언도 받으실 필요가 없었으니 이는 그가 친히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셨음이니라(요 2:25).” 그래서 주님은 저들에게 의탁하지 않으셨던 것일까? “예수는 그의 몸을 그들에게 의탁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요(24).” 저 많은 사람들이 표적을 보고 주를 믿었으나, “많은 사람이 그의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그의 이름을 믿었으나(23).” 말이다.
괜히 또 일을 그르친 것 같고, 나는 뭐만 하면 이렇게 다 망쳐놓기만 하는 것 같고. 어떤 슬픔보다 거절감이 주는 공허는 큰 것이다. 내 안에 이는 이 모든 마음이 혹시 그릇된 것은 아닐까? 자꾸 또 사람에게 기대를 거는 게 말이다. 이쯤 말했으니 알아들었으려니, 이렇듯 신경 쓰고 마주대하는 마음이 잘 전달되었으려니, 하는 어떤 희망이 또 여지없이 나를 무너뜨렸다. 순진한 것인지 아니면 이 또한 교만은 아닐는지.
바람이 따뜻하게 불어오던 날, 나는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을 비껴지나가며 혼자 우울하였다. 말이 없자 아내와 딸애가 자꾸 또 신경을 썼다. 둘이 장을 보는 동안 한쪽 의자에 앉아 물끄러미 사람들을 보았다. 사람들. 이 지긋지긋한 군상들. 대체 이것이 뭐라고 주님은 그처럼 사랑하시는 것일까? 어쩌면 내가 자꾸 아이를 책임지려는 마음, 어떻게 해주고 싶어 하는 마음이 고결해보이지만 교만한 것이었다.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히 9:14).”
성령이 아니시면 아무 것도 아닐 수밖에 없는 것에 대하여. 그 어떤 고결함도, 숭고함도, 희생도, 헌신도, 자기를 불사르게 내어주는 마음도 거짓되다는 것을. 자꾸 내가 나서서 위하고 대하여 마치 아이를 구원하고자 하는 마음이 문제였을까? 대체공휴일인 월요일에도 아이만 괜찮다면 오라 하여, 다음 토요일에 있을 백일장을 대비할 거였는데. 한 시간 가까이를 늦어서 온 아이를 한심하게 여기지 않고 위하여 또 이해하고 응원하는 마음이려 수고하였는데. 어쩌면 나의 이와 같은 애씀이 오히려 주의 하시고자 하는 일을 훼방하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이 지독하고 모호하며 감상적이고 편애하는 마음이 지레 나를 걸려 넘어뜨리기까지, 성령의 주도하심이 없는 착하고 의로운, 예의바르고 성실한, 그 모든 수고와 애씀이 되레 예수를 두 번 죽이는 일이었다. 하나님이 주도하지 못하게 하는, 나의 그 어떤 마음도 죄였다. 종일 아이를 두고 생각하다, 그러고 있는 내 자신에게 화가 날 정도였으니. 대체 그 애가 뭐라고 그처럼 내 마음이 질질 끌려가듯 해야 하나 싶어서 말이다. 그와 비례하여 아이의 거절은 아팠다.
주께서 다시 회복시켜야 하실 일이었다. “내가 전에 너희에게 보낸 큰 군대 곧 메뚜기와 느치와 황충과 팥중이가 먹은 햇수대로 너희에게 갚아 주리니(욜 2:25).” 어쩌면 아이에 대한 연민이 나로 하여금 자꾸 먼저 나서게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면서 내가 이렇게 대할 수 있는 게 마치 나의 너그러움인 것처럼. 혹은 마땅히 행해야 할 그리스도인의 희생이나 사랑은 되는 것인 양. 그런데 우리의 마음이 그처럼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는 덴 그 영혼의 문제이었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일이 아닌 거였다.
애써 아이를 다독여 마치 나는 여전하다는 걸 보여준 일은 잘한 것 같다. 생각 같아서는 욕을 한 바가지 해주고 다신 얼씬도 못하게 하고 싶었으나, 어쩔 수 없는 일에 대하여. 주가 하셔야 할 일인 것을 되새긴 것은 잘한 일이다. 금세 또 싫증을 내고 그래서 억지로 하듯 곧 또 그만둘 게 빤하다 해도, 무던히. 그렇지, 이런 상황에서도 또한 요구하시는 것이 있었으니 바로 그 무던함이었다.
오게 하신 이가 남게 하셔야 하고 남게 하신 이가 같이 하게 하셔야 할 일이었다. 그러는 동안 나의 마음은 지극히 사소한 것이어서 혼자 설레고 또 기대하며, 기도하며 또 소망하다 영락없이 우리의 공든 탑은 무너지고 또 무너지는 것이었으니. 나의 앞서는 마음이 주의 일을 그르치는 게 될 수 있겠다. 괜한 친절과 너무 나서는 마음이 주의 걸음을 더디게 할 수 있겠다. 아니 이 일이 성령을 훼방하는 일이 될 수도 있겠구나, 하는. 혼자 앉아 이런저런 생각으로 안달이 끊이지 않는 마음으로 생각하였다.
나의 기도와 가르침과 어떤 증거와 희생하는 마음이 되레 하나님의 생명을 막을 수도 있겠다! 결코 좋은 게 좋은 게 아니다. 그런 식으로 우리 안에 있는 죄가 호락호락하지 않다. 사람의 속은 사탄의 그것보다 지독하다. 뭐라 하는 이보다 말리는 이가 더 고약할 수 있는 것처럼, 나의 기도는 괜한 공명심을 유발하고, 그에 따른 가르침을 자신의 지론으로 삼으며, 말씀을 근거한다고 하지만 그 증거는 아주 주관적이며 지엽적인 것이 되어서, 한껏 애쓰고 수고하여 희생한다는 마음이 오히려 주의 마음을 앞서는 결과를 낳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결코 내가 자랑할 게 아무 것도 없는 것이다.
문득 고린도전서 13장을 떠올리며 암송하다 그 의미가 말해주었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이 얼마나 고상하고 위대한 일이겠나만, 정작 주의 마음이 아니면,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그렇지. 되레 더 요란하고 시끄러운 소동에 지나지 않는 것을.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이 얼마나 위대하고 놀라운 일인가? 한데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성경의 진리는 분명하였다.
그 놈의 나의 노력이 나를 눈멀게 할 수 있다. 주를 더는 바라지 못하게 할 수 있다. 하나님 없는 헛것을 구할 수 있다.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그 모든 선행이 도리어 그 어떤 악행만 못지않을 수 있으니,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 하나님의 마음이 아닌 하나님 같은 마음은 우상이었다. 내가 아이를 생각하고 어떤 끌림이 실은 홀림이어서 내 안에 추구하고자 하는 나의 의였는지도 모른다. 내가 이만큼 널 위해 애쓰고 마음을 더한다고 하는 과시 같은.
그게 아니었다. 주의 마음은 허비였다. 다음에 이어지는 말씀은 그것을 의미한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4-7).” 내가 아는 마음으로는 허비밖에 달리 비슷한 의미로 이해할 수가 없다.
내가 얘한테 이런 말을 해서 뭐하나. 이런 마음이면 무슨 소용이 있나. 이런들 달라질 게 무언가. 숱한 허비와 허비로 버려지고 또 버려지는 마음이어서, 그저 오래 참고, 온유하고, 자랑하지 않으며, 교만하지 않고. 무례하지 않게 유익을 구하지 않으며, 성내지 않고 악한 생각을 않고. 오로지 진리와 함께 기뻐하는, 그러니까 아이의 모습이나 반응에 기뻐하고 보람을 느끼는 게 아니라 진리와만 기뻐하는. 그럴 때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딜 수 있는 일이었다.
이, 아침. 새롭게 나를 말씀 앞에 앉히시는 이유였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환호에 그 호의적인 태도에 자신을 의탁하지 않으셨다. 마음을 두지 않으셨다. 기대하지 않으셨다. 왜냐하면 그 속을 다 아시기 때문이다. “또 사람에 대하여 누구의 증언도 받으실 필요가 없었으니 이는 그가 친히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셨음이니라(요 2:25).” 나도 내 안에 있는 것이 아이를 위하고 사랑하는 마음인 줄 알았다. 그런데 보다 친절하게, 그리하여 아이가 나아지고 달라지는 것을 기대하는 단순함이었고 나아가서는 나의 빤한 공명심이었다.
나의 악함을 주가 아신다. 나는 모른다. 아니 외면하여 모르는 척한다. 아닌 척 내가 먼저 고상을 떤다. 아, 그러니 이 속을 어쩌면 좋을까?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고전 13:11).” 얼마쯤 지나야 나는 좀 장성하여 어린아이 같은 이 마음의 일을 버릴 수 있을까? 아무런 소용도 없을 것 같은, 이 희미하고 막연한 마음에 대하여.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12).” 나조차 내 속을 다 알 수 없는 일이었으니.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13).” 오직 주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었다. 다만 기도할 뿐이라.
내게 두시는 이 마음의 출처는 그것이었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롬 8:26-27).” 아이로 인해 나의 연약함을 더욱 깨달아 알 수 있는 것이었으니, 결코 내가 저 아이의 마음을 붙들 수도 돌이킬 수도 변화시킬 수도 없는 일인 것에 대하여.
기도하게 하신다. 곧 진정하고 참된 즐거움에 대하여 알게 하신다.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섬기고 떨며 즐거워할지어다(시 2:11).” 오직 주만 의뢰하며, 경외함으로. 섬기고 떨며 즐거워할 줄 알게 하시려고. 그리하여 나의 허튼 연민이 또는 봉사나 희생이 결코 하나님의 생명을 막는 일이 되지 않도록 하시려고. 오늘 말씀은 이를 주목하게 하신다. “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도다(7).” 그러므로 “내게 구하라 내가 이방 나라를 네 유업으로 주리니 네 소유가 땅 끝까지 이르리로다(8).” 아멘.
'[묵상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0) | 2018.05.08 |
---|---|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0) | 2018.05.07 |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0) | 2018.05.05 |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 (0) | 2018.05.04 |
당일에 서로 친구가 되니라 (0) | 2018.05.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