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전봉석 2018. 5. 8. 07:08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요한복음 4:14

 

주께서 내 마음에 두신 기쁨은 그들의 곡식과 새 포도주가 풍성할 때보다 더하니이다

시편 4:7

 

 

 

그러므로 “내가 평안히 눕고 자기도 하리니 나를 안전히 살게 하시는 이는 오직 여호와이시니이다(시 4:8).” 하시는 말씀 앞에 안도한다. 여느 날과 같은 동선을 따라 그 시간에 움직이는 일이 중요하다. 요동하는 세상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서도 말이다. 아이를 오게 할 걸, 하는 후회도 잠깐 들었다. 느지막이 아내가 나와 함께 동네를 산보하다 들어갔다. 왁자지껄 한 날, 나를 평안히 거하게 하심이 감사하였다. 어디든 가고 싶고 또는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은 마음은 여전하였으나, 그건 그거대로 내버려두었다.

 

한 날의 말씀이 그날에 족하였다. “하나님이 보내신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니 이는 하나님이 성령을 한량없이 주심이니라(요 3:34).” 여러 다양한 것으로 붙들고 위로를 삼는 게 인생이겠으나 돌이켜보면 그게 다 허사라. 한 사람의 죄가 사망을 가져왔고 이는 모든 사람에게 그리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롬 5:12).”

 

설마, 하는 안일과 망각을 우리에게 주시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육으로는 첫 사람 아담과 같아서 여전할 수밖에 없겠으나, 영으로는 둘째 사람 예수와 같이 살리심을 입었다. “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이거니와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나셨느니라(고전 15:47).” 어찌됐든 죄의 몸으로 산 자는 살다 그 삶으로 죽음에 이른다. 이에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에 대한 은총에 대하여,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롬 6:6-7).”

 

열심으로 산다고 살지만 그 얻어지는 것은 죽음뿐이라는 데 있어, 오늘 말씀은 우리가 무엇을 구하여야 할지를 분명히 알게 하신다.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 4:14).” 단지 목마름으로 그 힘에 겨운 생에서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샘물을 바랄 수 있는 게 은총이 아니겠나. 천천히 걸어 동네를 멀리 돌아 산보를 하면서 내게 두시는 이 한 생을 무던히 다 하는 일이 곧 충성이려니.

 

곧 “주께서 내 마음에 두신 기쁨은 그들의 곡식과 새 포도주가 풍성할 때보다 더하니이다(시 4:7).” 때론 무엇을 더 갈구하고 그래서 허기져 욕심을 잉태하기도 하지만, 더는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게 하시는 것에 대하여. 그럴 수 있는 오늘의 모든 여건과 환경이 축복이었다. 아이를 생각하다 또 무엇으로 시무룩하다 그 또한 내게 두신 일이라. 문득 그런 생각을 하였다.

 

우리 안에 암 덩어리가 있다면 이를 끄집어낼 수는 이는, 의사를 믿고 그 몸을 맡겨야 한다. 죄성도 그러하여서 내 안에 여전하여서 언제든 자라고 또 퍼지는 죄에 대하여 내가 알어서 자신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닌 것이다. 이를 아침에 읽은 말씀에서 찾았다. “칼을 피한 자들이여 멈추지 말고 걸어가라 먼 곳에서 여호와를 생각하며 예루살렘을 너희 마음에 두라(렘 51:50).” 파괴 없이 죄성은 처리할 수 없다. 구원의 첫 단계는 찢어발겨 파괴가 이루어져야 하는 일이다. 그래서 대부분 처음엔 다 하나님을 거부한다.

 

여태 산다고 살아온 인생을 송두리째 흔드시는 것이다. “너에게 남편 다섯이 있었고 지금 있는 자도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요 4:18).” 내가 의지하고 바라고 붙들며 사는 것에 대한 부질없음에 대하여,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23).” 나름은 예배를 위한 예배로 산다고 살았던 삶에 대하여,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24).”

 

하나님 아닌 모든 다음은 헛되다. 주님의 말씀은 기이하기까지 하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마 10:34).” 칼을 대신다. 내 삶을 송두리째 파괴할 기세다. 그러나 파괴를 위한 파괴는 정작 내 안의 죄성이었다. 내가 의지하고 위로를 삼으며 그것으로 성공을 가늠하려 들던 모든 허상에 대하여. 그런데 선을 이루기 위해 예수님도 파괴를 택하셨다.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3:10).”

 

그럼에도 예레미야 51장의 강렬하고 매서운 파괴는 그 진의가 분명하다. ‘멈추지 말고 걸어가라.’ 이리저리 마음은 휘둘려 하루에도 몇 번씩 좌절을 경험하곤 하지만, 그 ‘먼 곳에서’ 주를 생각함이라니! 주가 계신 곳을 ‘너희 마음에 두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그 우상들을 벌할 것이라 부상자들이 그 땅에서 한숨을 지으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렘 51:52).” 그 앞에서의 안도함이란 저는 나의 치료자가 되시는 것. 내 안의 좌성을 주가 도려내셔야 할 일.

 

이내 “말하기를 여호와여 주께서 이 곳에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이 땅을 멸하여 사람이나 짐승이 거기에 살지 못하게 하고 영원한 폐허가 되리라 하셨나이다 하라 하니라(62).” 그러므로 “너는 이 책 읽기를 다한 후에 책에 돌을 매어 유브라데 강 속에 던지며 말하기를 바벨론이 나의 재난 때문에 이같이 몰락하여 다시 일어서지 못하리니 그들이 피폐하리라 하라 하니라 예레미야의 말이 이에 끝나니라(63-64).” 묵묵히 내 안에 새겨 온전히 주만 바라며 나의 남은 생을 다하기를.

 

구원은 곧 파괴로부터 시작된다. “내가 아무도 못한 일을 그들 중에서 하지 아니하였더라면 그들에게 죄가 없었으려니와 지금은 그들이 나와 내 아버지를 보았고 또 미워하였도다(요 15:24).” 내 안에 이는 죄성의 쓴 뿌리를 바로 아는 게 복이었다. “너희는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없도록 하고 또 쓴 뿌리가 나서 괴롭게 하여 많은 사람이 이로 말미암아 더럽게 되지 않게 하며(히 12:15).” 그것은 극명하여서 “음행하는 자와 혹 한 그릇 음식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없도록 살피라(16).”

 

그럼에도 묵묵히 ‘멈추지 말고 걸어가라’는 말씀과 자신 안의 ‘망령된 것을 살피라’는 말씀이 종일 머리에 맴돌았다. 내 안에 이는 나 자신에 대한 연민이 그것이었고, 누구에 대한 서운함이 또는 서러움으로 자라나는 게 그것이었다. 곧 죄가 죄로 인식되지 않는 한 사람들에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모두가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다’고 여기는 한 병든 영혼은 묘연할 따름이다. 주께 맡기지 않으면 될 일 같다. 남들처럼 살다 그저 남들처럼 죽음에 이르는 게 가장 나는 인생으로 여겨진다.

 

그러면서 늘 무엇을 먹을까, 입을까 염려하면서. 이에 “백합화를 생각하여 보라 실도 만들지 않고 짜지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큼 훌륭하지 못하였느니라(눅 12:27).” 그러므로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마 6:28).” 오늘 아침에 주님은 일러 말씀하신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요 4:34).”

 

곧 오늘 내게 더하시는 양식이 무엇인지,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가를 알게 하신다. “그런즉 한 사람이 심고 다른 사람이 거둔다 하는 말이 옳도다(37).” 그 배후에는 주님이 계신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로 노력하지 아니한 것을 거두러 보내었노니 다른 사람들은 노력하였고 너희는 그들이 노력한 것에 참여하였느니라(38).” 묵묵히 더하신 삶에 감사함으로 충성을 다하는 게 한 날의 삶으로 족한 것이구나. 때론 시큰둥하여 입을 댓 발 물고 시무룩하니 병든 영혼처럼 굴 때도 있지만.

 

진리는 명료하여서,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요일 3:8).” 말씀으로의 파괴는 파괴를 위한 파괴가 아니었다. 복원하여 재생하려는 게 아니라, 전혀 새로운 것으로의 삶이었다. 그렇지! “기쁜 마음으로 섬기기를 주께 하듯 하고 사람들에게 하듯 하지 말라(엡 6:7).” 이에 그러자면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17).” 내 의지나 노력으로 헤쳐 나갈 수 있는 길이 아닌 것이다.

 

그래서 더는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는 생이었다. 전에 즐기던 것으로부터의 해방이다. 죄성은 남았어도 죄를 싫어할 수 있는 속성이 되었다. 여전하여서 근심이 또 걱정이 다른 염려와 함께 나를 쥐고 흔들 때가 허다하다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 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히 4:12-13).”

 

그러므로 “내 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를 때에 응답하소서 곤란 중에 나를 너그럽게 하셨사오니 내게 은혜를 베푸사 나의 기도를 들으소서(시 4:1).” 인생이 어찌나 헛되고 거짓된지(2). 그러므로 하나님은 하나님을 위하여 나를 택하셨고 부르셨다(3). 이를 앎으로 잠잠할 수 있다(4). 주를 의지함이다(5). 곧 “주께서 내 마음에 두신 기쁨은 그들의 곡식과 새 포도주가 풍성할 때보다 더하니이다(7).” 이에 “내가 평안히 눕고 자기도 하리니 나를 안전히 살게 하시는 이는 오직 여호와이시니이다(8).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