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라
요한복음 6:47-48
여호와여 내가 수척하였사오니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여호와여 나의 뼈가 떨리오니 나를 고치소서
시편 6:2
손으로 글씨를 써서 그 의미를 새롭게 두다보면 자음과 모음은 새로워서 그 내포하고 있는 뜻을 더한다. 이로써 마음을 다하는 하루였다. 성경을 읽고 본문을 묵상하다, 주초부터 설교원고를 다루고 있었다. 다들 너무 바쁜 날들인데 나만 이래도 되나 싶게 한가하고 여유로운 것인데, ‘의인이 하나도 없다’는 말씀 앞에서 한참을 머물러야 했다. 요즘들 관심을 두는 캘리그래피처럼 한 자 한 자 글자를 공책에 적고 또 한참을 들여다보는 일은 놀랍다.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롬 3:10).” 이 간단한 명제 앞에 나는 속수무책이다. 일찍이 다윗도 토로하였다.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는도다 그들은 부패하고 그 행실이 가증하니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살피사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다 치우쳐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시 14:1-3).” 어쩌면 우리는 떡을 먹고 배부름으로 주를 찾는 게 아닐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요 6:26).” 당장의 일에 연연할 수밖에 없는 일상에서 조금은 떨어져 앉아 주를 바랄 수 있는 게, 글씨 쓰는 일인 것 같았다. 붓펜을 사다 공책에 적어보면서 놀라웠던 것은 그 의미가 확장되는 것이었다. 읽지 않으면 보고 쓰게 하는 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노인은 여느 날 같이 건너와 이런저런 말을 두서없이 하였다. 늘 보면 말이 고픈 생이다. 거리를 걷다보면, 삼삼오오 모여 주저리주저리 말에 끊이지 않는 데 놀라고는 한다. 단지 자기의사를 전달하는 것뿐 아니라, 본능적으로 자신을 변호하고 남을 헐뜯는 데도 능하다. 그런 점에서 두서없이 이어지는 말은 조심스럽고 싱겁다. 그냥 그러다 마는 말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것 같은데 보면 그 사람에 대한 느낌이 또는 그 깊이가 고스란히 남겨진다. 글자로 성경 말씀을 쓰면서 새삼 그리 생각하였다. 눈으로 보고 소리로 읽을 때와는 달랐다.
“각기 물러가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 없으니 한 사람도 없도다(시 53:3).” 그러니까 나 역시 다를 바 없다는 데서 두려운 일이다.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롬 3:11-12).” 하는 말씀 앞에 서 있다 보면 발가벗겨진 듯 부끄럽다. 어쩌다 보면 대체로 말을 듣는 자 쪽인데, 나도 저렇겠구나! 하는 생각에 지레 겁이 난다.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13-15).”
이를 글자로 옮겨 적다보니 그 가운데 내가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듯하였다. “그들의 입에 신실함이 없고 그들의 심중이 심히 악하며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 같고 그들의 혀로는 아첨하나이다(시 5:9).” 두렵건대 우린 얼마나 아무 생각 없이 말을 하곤 하는지. 난무한 일회용용기처럼 쓸 때는 편한데 뒤처리가 난감하다. 미세먼지는 물론 플라스틱용기들이 이제 우리 삶을 위협하는 것은 다반사다. 여기저기 버려진 것들이야 그나마 눈에라도 띄니 다행한 일이지만, 말이란 흩어져 주절거린 것에 절반도 주워갈 수가 없으니 난감하다.
이 모든 건 단 하나의 이유였다. “그들의 눈 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롬 3:18).” 곧 “악인의 죄가 그의 마음속으로 이르기를 그의 눈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빛이 없다 하니(시 36:1).” 누구와 이야기를 하다 저의 거침없는 말 속에서 나는 두려웠다. 저의 그런저런 사연이 아니라 나 역시 다를 바 없다는 데서 말이다. 결국은 ‘하나님의 한 의’가 아니면 도무지 당해낼 재간이 없는 일이었다.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롬 3:21).”
이는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22).” 믿음으로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다. “그러므로 상속자가 되는 그것이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되나니 이는 그 약속을 그 모든 후손에게 굳게 하려 하심이라 율법에 속한 자에게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에게도 그러하니 아브라함은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4:16).” 즉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10:4).” 그러므로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분이신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그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12).”
이처럼 말씀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나의 불안은 잠잠해진다. 종일 들어앉아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아이들을 대하는 일은 복되다. 옆 사무실 노인은 그런 나를 딱하게 여기고, 나는 저의 바쁜 일상을 딱하게 여긴다. 아이는 나의 말을 싱겁게 여기고 나는 아이의 수고로움을 싱겁게 여긴다. 기어이 아이엄마는 멋대로 굴며 아이를 대하기로 하였는가. 더는 우리가 다가갈 수 없는 자리에서 아이를 생각하였다. 그렇듯 시간은 흘러 얼마나 더 지나서야 주를 돌아보게 될까?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갈 2:16).” 말씀 안에 길이 있다. 여러 번 되뇌어 그 의미를 좇다 글자로 옮겨 적으면서 마음은 진정되고 그것까지도 주께 맡겨야 하고 내려놓아야 하는 데 마음을 둔다.
돌아오는 길에 아이를 만났다. 나는 사과를 사들고 가다 하나를 건네 아이에게 주었다. 다른 여러 말이 필요한데 나는 속으로 주의 이름을 불렀다. 그 외로움이 또 배회가 안타까웠으나 더는 내가 임의로 다가갈 수 없는 거리여서 속수무책이었다.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 받는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골 3:12-14).”
말씀을 글자로 옮겨 적으며 그 의미를 가져와 마음에 새기는 일이 새로웠다. 문득 스치는 아이를 생각하고 저의 일을 떠올리다 늘 생활에 일어나는 이런저런 일들에 대하여,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하시는 말씀이 더욱 크게 들려오는 것이다. 서로를 용납하고 피차 용서하라는 말씀을 머금은 글자다. ‘하나님의 한 의’는 매순간을 채우신다. 내 안에 두시는 믿음이 아니라면 나는 무엇으로 주를 바랄까?
뭐라 한들 도대체 들려지지 않는 말씀에 대하여, 그럼에 나를 저의 곁에 두시는 까닭은 말씀이 되라는 의미였다. 내가 어떻게 해서, 그 행위로는 당해낼 수 없는 일들에 대하여 더욱 더 주만 바라게 하시려고. 그러니 다만 우리가 할 수 있는 정도면 충분한 거야. 나는 아내에게 말해주다 그게 나를 두고 하시는 말씀인 것을 알겠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히 11:1).” 암담할수록 그 의미는 뚜렷하였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라(요 6:47-48).”
말씀을 먹음으로 충분한 생명이었다. 나는 주께 아뢴다. “여호와여 내가 수척하였사오니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여호와여 나의 뼈가 떨리오니 나를 고치소서(시 6:2).” 누구에게 바라고 어떤 일에서 보람을 찾을 게 아니었다.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요 6:33).” 자꾸만 다른 무얼 찾으려드는 것은 이것으로 족할 수 없는 ‘다오 다오 함이다.’ “거머리에게는 두 딸이 있어 다오 다오 하느니라 족한 줄을 알지 못하여 족하다 하지 아니하는 것 서넛이 있나니(잠 3:15).”
그러니 주가 말씀하신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요 6:35).” 곧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39).” 그것은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40).” 이 무슨 뜬구름 잡는 소리인가, 하여 사람들은 떠나간다.
“그 때부터 그의 제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떠나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66).” 저들도 제자였다. 따른다고 따르는 삶이었고, 구주로 삼아 살고자 하던 거였다. 딱 이 시점에 “예수께서 열두 제자에게 이르시되 너희도 가려느냐(67).” 주께서 물으시는 것이다. “또 너희가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마 10:22).” 이때 베드로의 고백이 내 것이기를.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요 6:68).” 아멘.
'[묵상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너희가 참으로 자유로우리라 (0) | 2018.05.12 |
---|---|
그의 의를 따라 감사함이여 (0) | 2018.05.11 |
성전을 향하여 예배하리이다 (0) | 2018.05.09 |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0) | 2018.05.08 |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0) | 2018.05.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