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그의 의를 따라 감사함이여

전봉석 2018. 5. 11. 07:19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않으셨으므로 성령이 아직 그들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

요한복음 7:37-39

 

내가 여호와께 그의 의를 따라 감사함이여 지존하신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하리로다

시편 7:17

 

 

 

죽었다 깨어나도 나는 나를 이기지 못한다. 감당이 안 된다. 아이들의 휘청거리는 모습을 보면 그게 곧 나 같다. 새벽마다 몇 줄 일기를 써서 카페에 올리는 아이가 있다. 저의 넋두리가 예사롭지 않을 때는 마음이 쓰여 힘들다. 이처럼 내 안에 일어나는 ‘생수의 강’은 내 것이 아니다. 나에게서 나오는 게 아니다.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내가 누구 때문에 씨름하는 일을 두고 생각하면 더욱 확실해진다. 부모나 자식보다 더 신경이 쓰이는 어떤 대상에 대하여, ‘그의 의’를 따라 감사함이여!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롬 3:21).” 그 하나님의 의는 율법 외의 한 의인데, 그 나타남이 율법의 증거를 받으신다. 곧 얽매이지 않으나 소홀함이 없고, 행위로 판단하지 않으나 기꺼이 모든 판단에서 자유롭다.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22).” 믿는다는 일,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23-24).”

 

아이의 글에 나는 댓글을 달아 ‘나보다 더 나를 사랑하는 이’에 대하여, 그리하여 나는 이제 나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것에 대하여 말해주고 싶었다. 그 엄청난 값을 주고 사신 바 된 나의 이 자유를 어떻게 하면 알려줄 수 있을까? 부산하고 늘 분주한,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저는 우리 곁에 계셨다. 그리고 외쳐 말씀하신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죽어라 하고 애써 살지만 그 삶이 늘 황폐하기 이를 데 없는, 아이의 저 쓸쓸함에 대하여. 왕따이면서 왕따인 자신이어서 더 애착을 갖는 모순덩어리 아이에게, 믿음으로 그 배에서 생수가 흘러나올 수 있는 것에 대하여.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않으셨으므로 성령이 아직 그들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 성령이 아니시면 어찌 할 수조차 없는 일이어서, 내 안에 이는 조바심이 또 안타까움이 그래서 더욱 주를 바라게 하시는 것인데.

 

우리 자신이 얼마나 추한지. “그들의 입에 신실함이 없고 그들의 심중이 심히 악하며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 같고 그들의 혀로는 아첨하나이다(시 5:9).” 이를 스스로 혐오하면서도 그 애착이 그릇되게 나타나, 자기 고집이 참 세다. 뭐라 하는 누구 말을 들으려하지 않는다. 해야 할 말을 기어코 먼저 해야 한다. 그리고는 우긴다. 어느새 짜증이 올라오고 더는 상종하고 싶지가 않다. 아, 그래서 외톨이구나!

 

거울을 보는 것처럼 내 모습이 보인다. 그 안에 신실함이 없고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라. 혀로 아첨하나 속은 문드러졌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는 말씀 앞에 승복한다.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롬 3:10).” 그래놓고는 내가 옳다고 우겨대는 꼴이라니. 돌아서기 무섭게 어떤 불안이 또 혐오가 불일 듯 하는데도,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11).” 도저히 우리 스스로는 안 되는 일이어서, 아이가 정말 싫은데 싫어할 수 없는 마음을 두시는 일이라.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12).” 혀를 끌끌 차다가고 그게 나와 다름없는 데서 안타까움을 더한다. 그런 나를 값 주고 사신 이가 계셨으니 나는 이제 저의 것이라.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히 9:14).” 그러니 내가 나를 이룰 수 없듯이 내가 저 아이를 변화시킬 수도 구원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다만 내 안에 두시는 이 마음이라.

 

심지어는 불가사의해서 내가 도대체 이런 애를 왜 자꾸 신경을 쓰는가! 마음이 기울어 외면하고 돌아누우려 들면 더욱 출렁거려 살 수가 없으니, 이로써 내가 나를 주장하지 못하게 하심이었다. 내게 더하신 영적인 축복을 누리며 행복하게 살다오라고 이 땅에 남겨두신 게 아니었다. 그렇구나, 기어이 예수님처럼 아버지의 뜻을 바라고 구하며 사는 일이었는데. “예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시며 외쳐 이르시되 너희가 나를 알고 내가 어디서 온 것도 알거니와 내가 스스로 온 것이 아니니라 나를 보내신 이는 참되시니 너희는 그를 알지 못하나 나는 아노니 이는 내가 그에게서 났고 그가 나를 보내셨음이라 하시니(요 7:28-29).”

 

비로소 이 뜻을 알게 하시려고. 기어이 그리하여 나는 스스로 여기 있음이 아니고 나를 보내신 이의 참되심을 알게 하심으로, 아이의 글이 신경 쓰이고 그 말이 또 행동이 마음에 걸려 싫은데도 자꾸 아파서 손이 가는 일이었구나! ‘이는 내가 그에게서 났고 그가 나를 보내셨음이라.’ 결국 오늘도 나의 하루를 더 연장하시는 이유는 예수님처럼 아버지의 종이 되게 하시려고, 그 뜻을 따라 그를 앎으로 그 사랑으로 내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기를.

 

그리하여 하나님의 한 의, 그리스도 예수의 피는 그의 죽으심으로 내가 산 것이니 나로 하여금 주의 속성을 닮게 하시는 것이다. 이게 무슨 말인가, 이해도 어렵고 설명하기도 쉽지 않은데, 그래서 아이에게 향한 내 마음이라. 왕따인 아이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같이 대화를 할 때도 또 어떤 놀이를 할 때도, 아이는 스스로에 대한 애착이 지극히 병적이어서 함부로 자신을 경멸하는 것 같으면서도 그 고집이 어찌나 강한지. 자존감이 낮으면서 자존심이 센 아이라 스스로도 그리 인정하였다. 그런 자신이 너무 싫은 것이다.

 

그 피의 값으로 교회를 사셨다. “여러분은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 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그들 가운데 여러분을 감독자로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보살피게 하셨느니라(행 20:28).” 그곳에 나를 두셨다. 나더러 뭘 어쩌라는 게 아니라, 성령으로 인해 나의 추하고 더럽기 짝이 없는 뱃속 저 깊은 어둠 속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게 하시다니! “남의 말 하기를 좋아하는 자의 말은 별식과 같아서 뱃속 깊은 데로 내려가느니라(잠 26:22).” 그저 남의 말하듯, 남 말하기 좋아하던 나의 손가락질이 더는 아이를 지적하지 못하게 하시는 것이니.

 

저는 주께서 그리스도의 피 값으로 사신 것이라. 저에게도 그리스도의 성품을 덧입히기 원하시는 것이니, 내가 더했던 지난날의 나를 돌아보게 하시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실제 우리는 하나님께 직접 버림받은 경험을 알지 못한다. 굳이 꼽아보라면 처음 사람 아담과 처음 살인자 가인, 그리고 예수를 판 가룟인 유다 정도였을까? 다들 우리는 처음부터 그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에서 출발한 게 아니라 처음부터 진노의 자녀이었다. 그런 우리를 위해 예수께서는 의인으로 죽으신 게 아니라 죄인으로 죽으셨다. 순교나 희생이 아니라, 나의 죄 값으로 대신 죄인 된 몸으로 죽으셨다.

 

그 죄인 된 성자에게서 떨어져 나올 수밖에 없었던 성령의 절규가 참담하다. “제구시쯤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질러 이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마 27:46).” 곧 이는 성자 예수께서 성부 하나님께 대한 절규가 아니라, 성령께서 성자 하나님께 대한 절규다. 그래서 우리는 결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순교로 정의할 수 없다. 저는 죄가 없으신 죄인의 몸으로 우리 모두의 죄 값을 치르신 것이다.

 

더는 죄와 함께 할 수 없으셨던 성부께서 타락한 사람을 에덴에서 쫓아내실 수밖에 없으셨던 것처럼,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는 성자 예수의 타락을 성령은 이내 함께 하실 수 없어 쫓아내실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 절규가 오늘을 살면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지고 가야 하는, 교회의 사명이지 않겠나?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 1:24).”

 

이를 지고 나를 좇으라, 하신 게 제자의 사명이었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 16:24).” 단지 숙명론적으로 가난을 질고를 운명으로 여기며 이 지긋지긋한 삶을 다하는 따위를 일컬어 ‘자기 십자가’라 말씀하신 게 아니다. 그 정도의 것이라면 안 믿는 사람들도 그러고 산다. 묵묵히 순응하며 더 열심히 최선을 다해 성실하게 사는, 자기 십자가꾼이 있다. 그런 게 아니다.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눅 14:27).”

 

여기서 자기란 더는 내가 아니다. 내 안에 사는 그리스도라.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요 14:20).” 이는 권고가 아니라 명령이다. 사명인 것이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15:4).” 나는 저 아이가 참 싫은데, 싫어서 너무 싫어서 신물이 다 올라올 지경인데도 내 배에서 나오는 이 생수의 강은 나를 주체할 수 없게 하는 것이었으니.

 

아, “내가 여호와께 그의 의를 따라 감사함이여 지존하신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하리로다(시 7:17).” 내 의가 아니었다. 나의 노력이나 수고와 애씀이 아니었다. 내가 노력한다고 될 일이 아닌 것이다. 저절로 그리 되어지는 것에 대하여, “이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엡 1:12).” 그렇구나! 이 아침 말씀 앞에서 나는 다시 고개를 끄덕거리며 나를 누구보다 끔찍이 사랑하시는 그 사랑의 증거를 확신할 수 있다. 곧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지 아니하되 나를 미워하나니 이는 내가 세상의 일들을 악하다고 증언함이라(요 7:7).”

 

부디 “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공의롭게 판단하라 하시니라(24).” 그래서 기도한다. “나의 방패는 마음이 정직한 자를 구원하시는 하나님께 있도다(시 7:10).” 그러므로 “내가 여호와께 그의 의를 따라 감사함이여 지존하신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하리로다(17).”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