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너희를 아버지께 고발할까 생각하지 말라 너희를 고발하는 이가 있으니 곧 너희가 바라는 자 모세니라 모세를 믿었더라면 또 나를 믿었으리니 이는 그가 내게 대하여 기록하였음이라 그러나 그의 글도 믿지 아니하거든 어찌 내 말을 믿겠느냐 하시니라
요한복음 5:45-47
오직 나는 주의 풍성한 사랑을 힘입어 주의 집에 들어가 주를 경외함으로 성전을 향하여 예배하리이다
시편 5:7
스스로 아니라, 하는 것을 행하는 일이 흔하다. 남을 정죄하면서 자신을 허용하는 경우다. “내가 너희를 아버지께 고발할까 생각하지 말라.” 본문의 말씀이 그리 읽힌다. “너희를 고발하는 이가 있으니 곧 너희가 바라는 자 모세니라.” 옳다, 그르다, 판단하는 그 율법적인 자세로써 자신을 다스리고 남을 판단하려든다. 그러나 “모세를 믿었더라면 또 나를 믿었으리니” 율법 이전에 그리스도 예수께서는 있었다. “이는 그가 내게 대하여 기록하였음이라.” 어쩌면 우린 우리가 벌린 입으로 심판을 받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러나 그의 글도 믿지 아니하거든 어찌 내 말을 믿겠느냐 하시니라.” 하시는 오늘 말씀이 그 근거다(요 5:45-47).
아브라함도 다윗도 모세도 바로 이 복음의 원리를 알고 있었다. 구원의 기초는 복음이고, 복음의 중심은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믿음으로다.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파기하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롬 3:31).” 바울의 증언이 오늘 예수님의 말씀과 같은 맥락이다. 율법 이전이나 이후나, 예수님 이전이나 이후나, 말씀은 우리 곁에 계셨고 이를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갈 바를 알지 못하면서도 나아갔고, 다윗은 주를 경외할 수 있었으며, 모세는 순종할 수 있었다.
구약시대와 신약시대는 결코 다르지 않다. 구원은 행위가 아니라 믿음이었고, 믿음은 행위로써가 아니라 순종으로써 이루어졌다. 제사보다 순종이다. “사무엘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삼상 15:22).” 이는 율법보다 앞선다. “네가 내게 돌로 제단을 쌓거든 다듬은 돌로 쌓지 말라 네가 정으로 그것을 쪼면 부정하게 함이니라(출 20:25).” 나의 행위가 오히려 부정하게 함이다.
“또 거기서 네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 곧 돌단을 쌓되 그것에 쇠 연장을 대지 말지니라(신 27:5).” 쇠 연장을 댈 수 없다. “너는 다듬지 않은 돌로 네 하나님 여호와의 제단을 쌓고 그 위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 번제를 드릴 것이며(6).” 있는 그대로, 다듬지 않은 돌로 하나님 앞에 제단을 쌓는 것이다. 곧 나의 어떤 노력이나 행위로는 율법을 이룰 수 없다. 이는 파기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세우는 일이다.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파기하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롬 3:31).”
율법은 다만 죄를 알게 하는 초등 선생이다.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라(갈 3:24).” 나는 이와 같은 말씀을 나의 생활 중에 고스란히 배운다. 내 노력으로는 아이를 사랑할 수 없다. 아내는 급기야, ‘거지같아서 못 해 먹겠다’고 푸념을 하였다. 너무 경우가 없다. ‘상실한 마음’ 그 자체다. 애고 애 엄마고 무지하기는 매한가지다. 욕지기가 올라온다. 꼴도 보기 싫다. 어디 멀리 도망가 따로 살았으면 싶다. 도대체 이런 걸 왜? 하는 울화가 치민다. 그런 누구를 욕하다 그게 나와 다를 바 없음에서 좌절한다.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구원을 얻었다면, 실제 저의 행위가 그처럼 순종적이기만 하였던가? 다메섹에서 데려다 기른 몸종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대신하려 했다. 이후 아내의 몸종 하갈에게서 난 자식으로 상속자를 삼으려고도 했고. 그런 그를 위롭다 하신 건 저의 행위가 아니다.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롬 4:2).” 그리스도가 오시기 몇 천 년 전의 믿음이다. 태초부터 계셨던 말씀으로다.
율법이 주어지고 500년 후를 살았던 다윗도 알고 있었다.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 마음에 간사함이 없고 여호와께 정죄를 당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시 32:1-2).” 이를 바울은 다음고 같이 정리하였다.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복에 대하여 다윗이 말한 바 불법이 사함을 받고 죄가 가리어짐을 받는 사람들은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하지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롬 4:6-8).”
그러니 율법 이전이나 이후나 구원의 원리는 같다. 성경은 구약이나 신약이나 통일성과 일관성과 응집성을 갖는다. 오늘 아침 예수님의 말씀도 그와 같다. 결국은 우리 자신을 고발하는 것은 우리 자신이 두둔하고 사는 율법이다. “내가 너희를 아버지께 고발할까 생각하지 말라 너희를 고발하는 이가 있으니 곧 너희가 바라는 자 모세니라 모세를 믿었더라면 또 나를 믿었으리니 이는 그가 내게 대하여 기록하였음이라 그러나 그의 글도 믿지 아니하거든 어찌 내 말을 믿겠느냐 하시니라(요 5:45-47).”
말씀을 들으려 하지 않는 데야 별 수 있겠나? 나는 아이에게 싫증이 난다. 질려버리겠다. 퐁당퐁당 자기 말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는 아이를 나는 어찌 건져낼 수가 없다. 가령 밤에 잠이 안 온다며 불면을 호소한다. 그러면서 학교에서 수업 시간에 자고 피로감을 호소하며 초저녁에 선잠을 잔다. 그래놓고는 새벽까지 잠이 오지 않는다며 투덜거리는 것이니, 아이나 어른이나, 얘나 쟤나 죄의 결이 다르지 않다. 자기 사랑에 빠져 있다. 자신숭배로 몰두한다. 원하는 걸 한다. 좋은 게 최고다. 뭐라 해도 들으려 하지 않는다.
생각 같아서는 오지 말라고 하고 싶은데, 어떻게 또 그러나. 경우가 없기는 그 부모들이 더한 거여서 애써 거두고 마음을 두었던 게 모두 허사라. 아내는 결국 제멋대로인 아이와 그 부모의 경우 없음에 혀를 내두르며 거지같아서 못해 먹겠다며 화를 냈다. 그러게. 얘 하나를 건사하고 사랑으로 대하는 일이 이처럼 거지같은데, 거지같아서 도저히 주의 사랑을 운운하고 주의 마음으로 건사하기란 불가능하기만 한데. 아, 그냥 이 꼴 저 꼴 안 보고 어디 멀리 도망쳐버리고 싶다. “나는 말하기를 만일 내게 비둘기 같이 날개가 있다면 날아가서 편히 쉬리로다 내가 멀리 날아가서 광야에 머무르리로다 (셀라)(시 55:6-7).”
그러니 그저 일상을 사는 게 순종이라. 이와 같은 순종이 그 어떤 제사보다 낫다는 말씀 앞에 나를 낮출 따름이다. 공들여 애쓴들 고마워할 줄 모르고, 고마워하기는커녕 너무들 자기 생각만으로 사람을 취급하니, 아내의 속도 문드러지기는 매한가지겠다. 우리는 가정예배를 드리며 그래서 주의 이름을 부른다. 주님, 하고 길게 날숨을 내뱉는 우리 속을 어찌 모르실까. 너무 애쓰지 말자. 우리의 애씀이 도리어 우리를 교만하게도 하고 또는 실의에 빠져 주님을 의심하게도 한다. 제단의 돌을 쪼지 말자. 쇠막대로 고르려하지 말자.
행위로써가 아니라 믿음으로라는 말씀 앞에서 안도한다. 누가 우리 속을 알까? 나도 내 행위를 감출 수가 없다. 어르고 달래고, 어떻게 하면 주를 바라게 할까? 제아무리 궁리를 한다 한들. “그러므로 너희는 변명할 것을 미리 궁리하지 않도록 명심하라(눅 21:14).” 우리의 구원은 그리스도의 완성된 사역 위에서 이루어진다.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 같이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요 5:21).”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면서도 주를 바라고 주의 말씀을 붙들고 나아갔던, 아브라함처럼.
이내 저가 자신의 아들 이삭을 주 앞에 바칠 수 있기까지, “아브라함이 그 땅 이름을 여호와 이레라 하였으므로 오늘날까지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 하더라(창 22:14).” 그 하나님을 알고 있었다. 믿음이란 자라나는 것이어서 오늘 우리에게 더해지는 환멸과 실의와 낙심이, 아이에 대한 실망과 미움과 싫증이, 궁극적으로는 그래서 달리 주밖에 의지할 수 없다는 것을 다시금 깨닫게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오직 나는 주의 풍성한 사랑을 힘입어 주의 집에 들어가 주를 경외함으로 성전을 향하여 예배하리이다(시 5:7).” 사람이 먼저가 아니다. 나도 나를 먼저 할 수 없다. 제단의 돌을 다듬어서는 어림없다. 쇠 연장을 대서는 안 된다. 결국은 피다. 피의 제사가 아니고는 너나 나나 어림없다. 아브라함은 사흘 길을 걸어 모리아 산으로 향해 갈 때, 그의 마음을 가늠해보면 아찔하다. 몇 천 년 후에 그 곳에서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피를 흘리고 돌아가실 것에 대하여 저는 알지 못했다. 대속이 아니면 아무 소용도 없다는 것을 저는 알았다.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나니(롬 1:18).” 내 안에 여전한 나의 쇠 연장이 문제겠다. 어떻게든 뭐라도 해야 한다는 나의 수고가 나를 지치게도 한다. 아이를 두고 안달을 하는 이 내 마음이 문제이지 않겠나? 늙은 아브라함은 그 긴 여정을 제물로 바쳐야 하는 아들을 이끌고 무슨 생각을 하며 걸어갔을까? 머잖은 훗날, 천 년 후에 다윗의 성전이 건축되었던 그곳에서, 이천 년 후에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것을 저는 알지 못하면서도 이내 약속으로 얻은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기 위해 걸어갔을 그 긴 여정에 대하여.
나는 자꾸 안달이 나서 살 수가 없다. 좀이 쑤시고 애간장이 타서 견딜 수가 없다. 그러느니 다 꼴 보기 싫어서, 어디로든 훌훌 떠나버리고만 싶은 심정으로, 나의 오늘은 이내 그 자리! 모리아 산에 서 있는 게 아니겠나? 다시 이천십칠 년이 지난 지금의 그 자리에 말이다. 우리는 어쩌면 바로 그 모리아 산을 향하여 나아가는 것이다. 이내 마음은 꼬꾸라지기 일보직전인데도 한 발 한 발, 하루하루를 더하며. 그럼 더욱 선명해진다. 우리가 붙들 것은 ‘여호와 이레’라.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
“그러나 주께 피하는 모든 사람은 다 기뻐하며 주의 보호로 말미암아 영원히 기뻐 외치고 주의 이름을 사랑하는 자들은 주를 즐거워하리이다(시 5:11).”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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