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주의 이름을 아는 자는 주를 의지하오리니

전봉석 2018. 5. 13. 07:36

 

 

 

제자들이 물어 이르되 랍비여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요한복음 9:2-3

 

여호와여 주의 이름을 아는 자는 주를 의지하오리니 이는 주를 찾는 자들을 버리지 아니하심이니이다

시편 9:10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으로, “궁핍한 자가 항상 잊어버림을 당하지 아니함이여 가난한 자들이 영원히 실망하지 아니하리로다(시 9:18).” 어려움을 겪는 게 평안하기만 한 것보다 낫다. 그러나 어려움만 붙들고 씨름하는 일도 위태로운 것이어서 ‘너무 오래 문을 두드리고 있으면 사탄이 와서 문을 열어줄 수도 있다.’ 그러니 성경의 기본 원리는,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되돌아보아라 이 두 가지를 하나님이 병행하게 하사 사람이 그의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전 7:15).”

 

그런데 그런 가운데서 “지나치게 의인이 되지도 말며 지나치게 지혜자도 되지 말라 어찌하여 스스로 패망하게 하겠느냐(16).” 또는 “지나치게 악인이 되지도 말며 지나치게 우매한 자도 되지 말라 어찌하여 기한 전에 죽으려고 하느냐(17).” 곧 우리의 지나친 수고와 애씀이 또는 경건과 엄숙함이 우리 영혼을 눈 멀게 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에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을 보라 하나님께서 굽게 하신 것을 누가 능히 곧게 하겠느냐(13).”

 

그러므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일이란 기뻐할 수 있을 때 주의 이름으로 기뻐하고 곤고하고 힘들 때는 주의 이름으로 돌아보는 일이다. 이를 오늘 시편은 “여호와여 주의 이름을 아는 자는 주를 의지하오리니 이는 주를 찾는 자들을 버리지 아니하심이니이다(시 9:10).” 우리는 이제 안다. 사는 날 동안 어떤 일이 어디서 어떻게 터질지 누가 알겠나?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그 모든 사건 사고의 배후에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 그러므로 오래된 격언처럼 너무 오래 문을 두드리고 있으면 오히려 사탄이 와서 문을 열어줄 수 있다.

 

주께 의뢰하지 못하는 기도도 마찬가지다. 그 응답이 주의 것이 아닐 수도 있다. 이 일이 무엇 때문인가, 할 때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하는 주의 말씀이 분명하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곧 그리스도시라.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 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4).” 주가 우리 곁에 계심을.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5).” 이를 듣고 삶으로 살아서 실행할 수 있는 것이 복이었다.

 

싫증나고 싫어서 아이가 돌아간 뒤 생목이 올라오는 것인데도 다시 아이를 권하고 위하여 마음을 다독이게 하시는 일. 어디 백일장에 나가는 일을 마치 날 위해 하는 것인 듯 퉁명하여서 그 태도가 맘에 들지 않았다. 완성된 글을 써보게 할 시간이 없어서 주어지는 주제로 개요작성을 하는 일을 여러 번 연습시키려 했는데 엉뚱하기는, 뭐라 설명을 하면 그게 뭐 어때서요? 하는 태도라, 아참 못마땅하다. 관두고 그냥 돌아가라 하는 말이 여기까지 올라오는 걸 토닥여 보냈다. 그래놓고는 비도 오는데 잘 하고 오겠지, 하고 종일 신경이 쓰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 것이 아니다. 이 마음은 내 마음이 아니다. 돌아보면 아이도 어쩔 수 없는 일이라 배배꼬인 그 속을 본인도 어찌 주체할 수 없는 일이다. 퉁명스러움은 어색하고 쑥스러워서 그러는 것일 테고, 아무렇지도 않게 거짓말을 하는 이유는 정직했을 때 겪을 난처함을 두려워하는 까닭이겠다. 이처럼 오히려 아이와 같이 있지 않을 때, 내 안의 이해와 동의는 또한 나를 진정시킨다. 돌아오지 않고 있는 탕자도 문제지만 집에 남아 아버지 일을 한다고 하는 첫째도 문제였다. 문득 그런 생각을 하였다.

 

우리 안에 고약한 심보는 나와 같은 자를 찾으려 하고, 나와 같지 않은 그 누구도 나 자신을 가르치지 못하게 자꾸 신경을 쓴다. 그래서 하나님은 더 ‘나 같은 아이들’로 내 곁에 두신다. ‘나 같은 사람들’로 나를 괴롭히신다. 유난을 떨며 뭐라 판단하고 싫증내다보면 영락없이 저의 그런저런 면면이 실은 내 것이었다. 나 또한 다르지 않다는 걸, 저 아이를 보면 거울처럼 보여지는 것이다. 신기한 일이지만 여전한 방황은 되풀이 되었다.

 

십대들은 그 신체가 자라고 변화하는 것처럼 저의 종교적인 취향도, 선호하는 사람에 대한 인상도, 기질도, 전혀 영적이지 않은 엉뚱한 상상도 그저 주먹구구식이다. 자신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도 못하는 것인데, 가만 보면 그게 또 십대여서만 그런가싶다. 성령의 주도하심이 아니고는 하나님의 일을 바로 알기란 불가능한 것임을 오늘 본문을 읽으며 묵상한다. 저가 누구 탓인가, 하고 생각하는 나에게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일을 나타내심’에 대하여 다시 생각하게 하시는 것이다.

 

‘저런 아이’를 마주하고 ‘저런 사람’을 대하고 있을 때, 참된 생명의 역사는 중보기도였다. 날 위한 기도는 종종 나를 걸려 넘어지게 한다. 그런데 내가 ‘나 같은’ 저 아이를 위해 기도하는 일은 돌이켜 나를 향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저 아이를 붙들 수 있는 가장 절호의 기회는 나의 중보가 그치지 않게 하는 것이다. 생각나게 하시고, 마음이 쓰여 자꾸 되돌아보게 하시는 일은 다 그런 이유에서였다. 누군가 날 위해 기도하였던 것처럼.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가 그에게 기도할 때마다 우리에게 가까이 하심과 같이 그 신이 가까이 함을 얻은 큰 나라가 어디 있느냐(신 4:7).”

 

그러므로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최선의 최선은 주를 의뢰하며 주께 고하는 일. 나는 싫증이 나고 그래서 아이가 참 싫을 때도, 그래서 주께 아뢰는 것. 입을 씰룩거리며 내 안에 이는 어떤 서운함이나 원통함을 주께 아뢰다보면 어느새 저 아이에 대해 안타까움이, 그러므로 나에 대하여 주께서 간과하셨던 죄를 떠올리게 되며 송구할 따름이라. 길이 참으시는 중에 나를 오늘에까지 인도하시고 이로써 주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시는.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롬 3:25).” 먼저는 길이 참으심이다.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이 풍성함을 멸시하느냐(2:4).” 그게 아니었다면 오늘의 나는 물론이고 저 아이로 인해 속상해하는 마음조차 얻지 못하였을 것이라. 나를 인도하사 나를 회개하게 하심을.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으로 내가 사는 것임을.

 

다음은 그 모든 나의 죄를 간과하심인데,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1:22-23).” 그러고 살던 나였지 않았나? 결국은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3:23).” 그 당연한 절망과 멸망의 자리에서 건지심이다. 곧 “어느 나라가 그들의 신들을 신 아닌 것과 바꾼 일이 있느냐 그러나 나의 백성은 그의 영광을 무익한 것과 바꾸었도다(렘 2:11).” 나보다 무례한 삶을 산 자가 어디 또 있을까!

 

이를 간과하심이다. “자기 영광을 풀 먹는 소의 형상으로 바꾸었도다(시 106:20).” 하나님을 안다고 하고 믿는다고 하면서도 풀 먹는 소의 형상으로 삼아 나로 인하여 하나님의 이름이 모독을 당하게 하던 삶이었다. 이를 간과하심이라니! 간과함이란 그런 것이어서, 어떻게 나의 죄와 허물을 대수롭지 않게 대강 넘기실 수가 있을까?

 

이는 결국 주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하심이다. 곧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얼마나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빌 1:8).” 나의 심장을 그리스도 예수의 심장으로 바꾸시는 일이었다. 내 마음이 주의 것으로, 주의 마음이 되지 않으면 ‘나 같은 아이’를 나는 도무지 사랑할 수 없음을. 이런 나를 나에게 증인으로 세우신 데 대해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게 만드신다. 아이를 싫어하다, 돌아서면서 욕지기가 올라오다가도 그런 나를 주께서 사랑하심으로, 간과하시는 나의 죄악 됨에 대하여.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아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내가 이제 ‘나 같은’ 저들에게 화목 제물로 세우심을 받는 일이었다. “형제들아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가고자 한 것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너희 중에서도 다른 이방인 중에서와 같이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로되 지금까지 길이 막혔도다(롬 1:13).” 바울 사도의 그 열심이 그로 인한 것이었겠다. 곧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신 것이요 그의 기뻐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엡 1:9-10).”

 

저 아이보다 뭐가 나아서, 저 사람보다 뭔가 좀 나은 게 있어서 오늘 나에게 저들을 붙이시는 게 아니었다. 이제 그 뜻의 비밀을 아는 까닭이었다. 주께서 나를 어떻게 사랑하셨는지. 내 죄를 어찌 여기며 대수롭지 않게 여겨주시지. 그 은혜가 무엇인지. 그 비밀을 최소한 나는 잘 알고 있지 않던가?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는, 도저히 누구에게도 용서를 구할 수조차 없는 죄악 됨에 대하여, 이를 간과하시기 위해 주께서 결국 화목 제물이 되어주셔야 했던!

 

이를 밝히 보게 하시는 하루였다.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더라(요 9:7).” 그리하여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5).” 그러니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 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4).” 싫증이 나고 짜증이 올라와 아이를 더는 돌보고 싶은 마음이 없어질 때에도, 때가 아직 낮이다. 보내신 이의 일을 해야 한다.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갈 3:1).” 할 말이 없다.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우리로 하여금 인내로 또는 성경의 위로로 소망을 가지게 함이니라(롬 15:4).” 대체 내가 누굴 보고 골을 낸단 말인가. 인내로 성경의 위로로 소망을 가지게 하신다. 돌아보아 내가 어떠했던가를 알게 하심으로, 형통할 때 찬송하고 곤고할 때 기도하는 일이다. 이 모든 일의 주관자는 하나님이시라. 저는 결코 선을 이루지 않으신 적이 없었다. 돌아보면 나의 삶이 내게 증거한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8:28).” 그러했고 그러하며 그러할 것이다.

 

고로 “내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감사하오며 주의 모든 기이한 일들을 전하리이다(시 9:1).” 나를 주 앞에 서게 하신 이 일보다 기이한 일을 나는 알지 못한다. “내가 주를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지존하신 주의 이름을 찬송하리니 내 원수들이 물러갈 때에 주 앞에서 넘어져 망함이니이다(2-3).” 그러므로 “여호와여 주의 이름을 아는 자는 주를 의지하오리니 이는 주를 찾는 자들을 버리지 아니하심이니이다(10).”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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