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전봉석 2018. 5. 16. 07:28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귀히 여기시리라

요한복음 12:26

 

여호와여 도우소서 경건한 자가 끊어지며 충실한 자들이 인생 중에 없어지나이다

시편 12:1

 

 

 

주를 섬긴다는 것은 그를 따르는 일이고, 그를 따른다는 것은 그가 계신 곳에 그와 함께 있는 일이고, 이제 주를 섬김은 아버지께 귀히 여김을 받는 일이다. 말씀을 여러 번 되뇌어 다시 음미한다. 주를 섬긴다는 것은 우리 곁에 두시는 ‘싫은 일’ 그러니까 ‘이상한 아이’를 맡아서 주의 마음으로 마주 대하는 일이다. 주가 그 아이로 계심이다. 아이엄마는 아이가 그만둔 것으로 분명히 못을 박았다. 뭐라 더 설명할 게 아니었다. 그런데 아이는 그 시간에 왔다. 공부를 하겠다고 온 것은 아니고, 배가 고프다며 라면을 끓여달라는 거였다.

 

어처구니없어 하면서도 아내는 아이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귀히 여기시리라.’ 하는 말씀을 음미한다. 막연한 소리가 아니라 실전이다. 전투는 언제나 내 안에서 벌어진다. 싸움이다. 속상하기도 하고, 어이가 없기도 하고, 처량하고 한심하기도 한 것이! 어느 아이엄마는 자기 자식에게 이 새끼 저 새끼 했다고 아이를 그만 보내려고 했다나? 자기 집에서는 절대 그런 소릴 쓰지 않으며 자기 아이는 어디서 절대 그러는 아이가 아니라면서. 한데 그 말을 어찌 가서 그리 옮겼는지는 알 수 없으나 아이의 영악함이 치가 떨린다. 그렇다고 대대거리며 아이를 흉보고 같이 옳고 그름을 따질 수도 없고.

 

참 가지가지라. 가정예배를 드리기에 앞서 우리는 더 말을 잇지 못하고 주 앞에 내어놓는다. 주를 섬긴다는 일은 ‘좁고 협착한 길’로 가는 것인데, 다 들여다보인다. 그 속이 빤하다. 징글징글한 일상의 현장에서 때론 토악질도 올라오고 말로다 형용할 수 없는 불쾌함과 짜증이 들끓기도 한다. 같이 뭐라 하자니 그럼 또 애가 뭐가 되나싶어서, 입을 꾹 다물고 있자니 속에서 천불이 나고. 자존심도 상하고. 영악하고 되바라지기 이를 데 없는 아이에게서 정나미가 떨어지고. 같이 웩웩거리지 않고는 지나기가 참 좁디좁은 길목이다.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마 7:14).” 우리는 우리 힘으로 짊어질 수 없는 ‘자기 삽자가’로 주의 이름을 부른다.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마 10:38).” 생각 같아서는 다 물리고, 그만 돌아가게 하고, 더는 상종도 하지 않으면서 살고 싶다. 이것도 싫다 저것도 싫다 하면서 이 아이는 대체 왜 온 것일까? 그럼 네 속을 써봐. 뭐가 그렇게 싫은지 나열하듯이 써. 아이에게 원고지를 주고 정말이지 나 몰라라 하고 있었다.

 

아이는 무려 열여섯 가지나 ‘자기 자신이 싫은 점’을 나열하였다. 하아, 이거 참. 그런데 그 내용이 모두 내 것이었다. 친구가 너무 많아서 끊어야겠다고 하면서 외로움을 호소하고. 자신의 게으름과 미뤄둠과 무기력함과 열등감과 억울함을 가감 없이 써내려갔다. 잠깐 시간에 무려 천육백 자를 쓴 셈이니, 글을 끌어가는 힘도 나쁘지 않았다. 내가 읽을까? 네가 말로 할래? 하고 묻자 아이가 나더러 읽으란다. 소리 내어 읽으며 아이를 살폈다. 저도 스스로를 어쩔 수 없는 일이어서 시무룩하니 듣고 있었다.

 

“나는 그의 명령이 영생인 줄 아노라 그러므로 내가 이르는 것은 내 아버지께서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니라 하시니라(요 12:50).” 말씀 앞에 사무치는 마음을 어찌 말로다 표현할까? 나는 저녁에 아내가 뭐라 하며 그처럼 아이와 아이엄마와 있었던 일을 이야기를 할 때, 글방에서 아이가 썼던 내용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주의 명령은 영생이라. 나는 아이에게 실질적인 방법을 제시했다. 정말 낫고자 하느냐? 서른여덟 해를 앓고 누워있는 병자에게 예수님이 왜 그렇게 물어보셨는지 알 것 같았다.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먼저 규칙적인 생활을 하라고 일렀다. 그러저러 해서 뭐가 어떠니 해도 아랑곳하지 말고 ‘일어나라.’ 하는 의미에서였다. 때로 나는 ‘그냥’ 한다. 이처럼 말씀 묵상을 하면서 뭔가 대단한 각오와 결의와 기대를 품고 있는 게 아니다. 습관을 좇아! 나는 아이에게 이를 말해주고 싶었다. 다음은 글을 쓰라는 것이었는데 자꾸 미룬다느니, 까먹는다느니 하면서 자신을 핑계하고 그럴 수밖에 없는 주변 이야기가 늘어져서 말이다. ‘네 자리를 들고.’ 즉 문제를 해결하려고만 할 게 아니라 그대로 인정하고, 그러는 게 또 자기 자신임을 분명히 알면서.

 

‘걸어가라.’ 하는 말씀에서 함께 가자, 하고 내가 기어이 주의 이름 앞에 무릎 꿇고 두 손을 들 수밖에 없었던 것을 상기하였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변명과 핑계와 사무침을 떠안고 살아가고 있는지 모른다.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요 5:7).” 낫고자 하느냐? 하고 주가 물으시는데 우린 왜 이처럼 구구한 변명의 소리를 늘어놓는 것일까?

 

넌 네 자신이 싫다고 하지만 실은 싫은 네 자신을 너는 놓기 싫은 거야. 한심하고 답답한데 그 한심하고 답답한 이유들 때문에 너는 게으를 수 있고, 책임을 회피할 수 있고, 미뤄두는 무기력을 즐길 수 있으며, 결국은 자기와의 싸움을 외면할 수 있는 거야! 나는 외면하지 않고 아이의 마음에 명중하기를 기도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8).” 우리는 우리의 현실을 딛고 살아야 한다. 그 현실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면서 동시에 자신이 펼쳐놓은 자리이기도 하다.

 

하루 이틀 있었던 일이던가, 이게?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래된 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6).” 정말 그게 힘들기는 한 거니? 하고 물었던 나의 물음은 그런 의미였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하고 물으시는 주의 음성이 내게 향하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우리 안에는 안이함이라고 하는 변명이 또 핑계가 얼마나 교묘하게 자리 잡고 있는 것인지! 자존감이 낮다고 스스로도 판단하면서 자존심이 상하면 그 꼴을 못 견뎌한다. 기껏 싸구려고 만들어놓고 싼 값에 대접 받는 건 싫은 거다.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딤후 3:5).” 앞서 말세의 때에 고통당하는 모습에 대하여 그것이 온통 우리 하루를 지배하고 있는 게 아니던가? “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모함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배신하며 조급하며 자만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1-4).” 이러한 속내는 싹 다 감추고 경건의 모양으로만 살고 있으니!

 

정작 죽겠는 것은 자기 자신인데, 그런 자기 자신을 변화시킬 마음은 없는 것이다. 그 핑계로 저는 자기만의 혹성에서 사는 것이다. 어린왕자에 나오는 여러 별의 주인공들처럼, 저 혼자 있으며 명령하고 다스려 호통 치려는 임금 된 자나, 열심히 연구하되 가본 적인 한 번도 없는 어느 지리학자나, 술이 깨면 그런 자신이 부끄러워 다시 술을 찾는 어느 혹성의 술주정뱅이나, 아무도 없는 길을 비추었다 껐다 하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가로등 켜는 사람이나. 그러한 우리에게 오늘도 주님은 물으시는 것이다. 네가 정말 낫고자 하느냐?

 

자기네는 집에서 ‘이 녀석’ 하는 정도의 욕도 안 한다며 아내에게 어떻게 이 새끼 저 새끼 할 수 있냐며 아이 말만 듣고 뭐라 따지듯 묻는 아이엄마에게, 그 경건의 모양이 아이의 반듯한 외모와는 달리 표독스럽고 영악하며 입에 담을 수 없는 욕설을 자랑삼아 하고 다니는 아이를 아이엄마만 모른다. 정말 모르는 것인지 한사코 외면하려는 것인지. 한데 저이가 또 교회를 그처럼 열심히 다닌다네? 하며 혀를 끌끌 차는 아내 앞에서 나는 왜 내가 부끄러웠는지 모르겠다. 기어이 하나님의 진노가 임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에 대하여.

 

“여호와께서 또 말씀하시되 시온의 딸들이 교만하여 늘인 목, 정을 통하는 눈으로 다니며 아기작거려 걸으며 발로는 쟁쟁한 소리를 낸다 하시도다(사 3:16).” 환장한다. 된통 자기 멋에 겨운 시절을 살고 있는 것이다. 교만하여 빳빳이 들고 섰는 목과 안 그런 척 하면서 욕정으로 이글거리는 눈빛과 용쓰듯 아기작거리며 수고하고 애써 스스로 쟁쟁한 소리를 내며 살아가는 하루하루의 날들이라니! 나는 주께 기도하기를 우리 마음으로는 감당이 안 된다는 것을 고하였다. 아이가 얄밉고 아이엄마가 한심해서 욕이 자꾸 나온다. 같이 멱살을 잡고 그 잘난 면상을 한 방 날려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고 고백하였다.

 

이렇게 싫고 싫은 나를 어떻게 주님은 그처럼 사랑하실 수 있었을까? 이어지는 변명과 말도 안 되는 항변에 꾸역꾸역 그럼에도 자기 핑계를 일삼은 이 고약하고 역겨운 사람을. 나는 아이에게 말하길, 그래서 기도해. 나는 나를 어쩔 수가 없어서. 내가 너를 어쩔 수가 없어서. 한심하고 답답해서. 이를 내게 알게 하시는 분께 도움을 구한다. 용서를 구한다. 긍휼하심과 주의 은총을 바란다. 그렇지 않고는 결코 나는 나를 이길 수 없어서 말이다. 넌 너를 이길 수 있겠니? 맘먹으면 맘먹은 대로 되디? 나는 그래서 주님, 하고 두 손을 든다.

 

주께서 우리의 이와 같은 죄책을 담당하셔야 한다. 나는 그 앞에서 아무런 변명도 할 수가 없다. 어떤 수고와 노력으로도 해결될 수 없다. 반드시, 기어코 구원이 필요하다. 누구도 자신의 선으로, 경건으로 알아서 구원을 도모할 수는 없다. 실제 나는 그렇다. 실수로, 모르고 짓는 죄가 아니었다. 얼마나 교묘하고 기이하기까지 한지 모른다. 나의 고의적인 죄들이 말이다. 아이에 대한 미움이, 싫고 싫은 마음이 미움으로 자리하면서도 아닌 척, 나는 너그러운 척, 아이의 마음을 다 이해하는 사람처럼 군다. 나에게는 희망이 없다. 나는 아이에게 고백하였다. 그래서 나는 구원이 필요하다. 주님이 아니시면 살 수가 없다. 맞다. 나는 유약하고 더럽다. 치사하고 악랄하다. 나는 내 스스로 나의 죄책을 메울 수 없다.

 

이에 대하여 로마서의 주제어는 간단하였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롬 1:16).” 나는 내가 아는 복음을, 그 주님을 아이에게 말해주고 싶었다. 우리가 절대 거부할 수 없는 복음의 희망에 대하여(3:21-4:25). 그리스도 이후에 출생한 우리들에게나(3:21-30), 그 이전에 살다간 사람들에게나(31- 4:22), 이전 이후 두 세대 모두에게나(4:23-25). 안 믿는 자들의 죄에 대하여든(1:18-2:16), 믿는다고 하는 우리들의 죄에 대하여든(2:17-3:8).

 

낮 동안에 말씀을 준비하고 묵상하던 내용이 내 안에서 살아 역사하시는 것을 느꼈다. 그래서 우리를 여기에 두시는 거야. 저 아이를 우리에게 보내신 것이고, 그런 아이엄마를 붙이시는 거야. 억장이 무너지고 때론 신물이 올라와도, 그들보다 하나도 나을 게 없었던 우리들에게 오늘 또한 이와 같은 사명을 맡기신 거야. 이처럼 우리는 할 수 있는 게 없어서 가정예배를 드리며 기도할 줄 모르는 아이들과 그 가정을 위해 기도하였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향하신 주의 은혜가 크고 크도다 크시도다.

 

오늘 아침, 주님은 일러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귀히 여기시리라(요 12:26).” 그런 우리를 아버지가 귀히 여기실 것을 말씀하신다. 나는 주께 고하여, “여호와여 도우소서 경건한 자가 끊어지며 충실한 자들이 인생 중에 없어지나이다(시 12:1).” 그러나 “여호와의 말씀은 순결함이여 흙 도가니에 일곱 번 단련한 은 같도다(6).”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