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부터 일이 일어나기 전에 미리 너희에게 일러 둠은 일이 일어날 때에 내가 그인 줄 너희가 믿게 하려 함이로라
요한복음 13:19
나는 오직 주의 사랑을 의지하였사오니 나의 마음은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
시편 13:5
‘일이 일어나기 전에’ 곧 예수를 잃게 될 때가 오나니, 사느라 정신이 팔려서 또는 안이함으로 그저 다 그렇지 뭐! 하는 심정으로 인해. 불현듯 찾아온 고통으로 ‘내가 그인 줄 너희가 믿게 하려 함이로라.’ 믿는다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한 사람이 주의 이름을 부르며 주 앞에 나아올 수 있다는 게 얼마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인지. 열여덟 살 된 딸아이가 자해를 하다 급기야 정신병원으로 들어갔다. 앞서 받아온 약을 털어 먹고 장세척을 한 뒤 사나흘 입원해 있던 것이 퇴원 후 이틀 만에 다시 자해를 시도한 것이다.
다급하여 우연처럼 내게 연락을 하였고, 통화를 하다 답답하였던지 차를 몰고 달려왔다. 자기 이야기에 함몰된 인생이었다. 우선은 한 시간 가까이 이 말 저 말 말이 고팠던 사람처럼 그간의 근황을 쏟아놓았다. 어떻게 하면 좋겠냐고 물으면서 이내 또 자기 이야기로 이어져 나오는 게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변명뿐이었다. 이 모든 일은 너를 큰 소리로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이다. 그전에 ‘그 일’에서 너를 부르셨는데 너는 설마, 하였고 다음에 또 ‘그 일’에서 너를 다시 부르시는데 또 외면하였다. 급기야 이제 네게 가장 소중한 것을 두고 부르신다. 말해주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하나님 쪽으로는 이야기를 이어가고 싶지 않아했다. 그에 따른 장황한 자기 생각을 펼쳐놓았고, 나는 저를 보며 서른여덟 해 앓고 있던 베데스다의 병자를 생각하였고, 수가 성 사마리아 여인을 떠올리기도 하였다. 구구절절 말이 많다. 나름의 지식과 상식을 동원하여 말씀을 다른 쪽으로 돌리려고만 했다. “우리 조상 야곱이 이 우물을 우리에게 주셨고 또 여기서 자기와 자기 아들들과 짐승이 다 마셨는데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크니이까(요 4:12).” 어려서부터 알고 있던 자신의 신앙을 자부하였다.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20).” 나름의 종교적인 신념(?)을 내세우며 뭐라 이르는 말을 쳐내었다. 너와 너의 신랑부터 주 앞에 다시 나와라. 아이는 병원에 입원시킨 겸 잠깐 잊고 당장이라도 너부터 나와라. 나의 말은 겉돌 듯 먹히지 않았다.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5:7).” 한참을 또 구구한 변명이 이어졌다.
아!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롬 1:21-23).” 딱이구나. 우리가 그러고 살았구나. 저는 신랑의 쥐꼬리만한 월급을 어떻게 살뜰히 모아 건물을 두 채 장만하였는지, 물론 그게 은행에서 반은 대출을 받아, 어쩌고저쩌고. 이어지는 저의 말에 나는 지쳤다. 들으려 하질 않는구나. 자기 말만 우선이구나. 속단하고 뭐라 예단하여 그리 넘겨짚는 게 습관이구나.
아이가 왜 숨이 막혔을지 알 것 같았다. 그렇다 해도 아니라 한다. 아니라 하는 그 말을 하는데 또 한참을 다른 말들로 허비했다. 다급하게 응급신호가 들어왔는데도, 저는 쩔쩔매면서 엉뚱한 소리나 이어가는 것이다. 오늘 아침 말씀 앞에 선다. “지금부터 일이 일어나기 전에 미리 너희에게 일러 둠은 일이 일어날 때에 내가 그인 줄 너희가 믿게 하려 함이로라(요 13:19).” 나름은 신앙이 있다. 자신은 믿기는 한다고 했다. 그러다 급히 무슨 계약 건으로 잔금을 받아야 해서 돌아가야 한다고 해서, 같이 잠깐 기도하자고 하자 손을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직 아니라는 것이다. 자신은 단계적으로 천천히 하는 사람이라고 했다.
저가 돌아가고 어떤 신물이 올라왔다. 한 영혼이 돌이켜 주를 바란다는 게, 그래서 온 천하를 얻는 것만큼 귀하다고 하시는가? 나는 급 피로감이 몰려들었다. 통화로 삼십여 분 말한 것까지 포함해서 도합 네 시간의 쏟아낸 말들 가운데, 자기변명과 속단과 예단과 완고함으로 그리 열심히 살아왔다는 자기 이야기가 전부였다. 정작 아이가 입원하기 얼마 전에 괴물을 봤다는 것. 어떤 어두운 그림자 같은데 그렇게 자기에게 화를 낸다는 것. 그리고 또 다른 이야기를 한참하다, 입원하고 난 뒤 그 괴물이 오히려 얌전해졌다는 것을. 아이가 그러더라는 것을 깜빡 잊었다는 듯 대수롭지 않게 말하였다.
정신과 의사 선생은 아이가 투영한 무의식의 자아로 설명하였고, 또 다른 심리상담가는 내담자가 끌어들인 어린아이라고 설명하였다. 나는 지금의 이 일은 영적으로 풀어야 할 일임을 알았다.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고전 2:14).” 나는 개인적으로 신비적인, 그래서 겁을 주려는 식의 해석은 피하였다.
저들의 말에, 그 정도로 해석할 수밖에 없는 것이어서 그냥 들었다. 한데 다들 이해가 안 가는 게 아이가 입원을 해서 그 ‘검은 그림자’ 또는 ‘괴물’이 아주 얌전해지고 조용해졌다는 말에서는 각각 이해하지 못했다. 그저 그러려니 생각하였다. 저는 그게 이해가 안 된다고 하였다. 갇혀 있는데, 그럼 더 발광을 해야 할 텐데 왜 조용하다는 걸까? 나는 그것이 틈을 노리는 사탄인 것을 알았다. 왜 그가 조용해졌는가 하면 나름 성과를 냈기 때문이다. 이룬 것이다.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것이다. 굳이 그 안에서 발광을 할 일은 없었다.
저의 목표는 단 하나, 하나님이 주신 삶을 하나님 없이 살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과 가까워지는 것을 가장 경계한다. 이를 위해 그 이상의 끔찍한 일도 또는 너무 지극히 일상적인 평온함도, 성공과 명예도 얼마든지 더해준다. 저는 우리가 이 땅에서 잘 살고 성공하여 행복을 누리는 따위에는 관심도 없다. 그것으로 하나님 없이 살 수 있다면 얼마든지 풍요를 선사한다. 돕는다. 우리 안에 만족을 더하는 것이다. 나는 아이의 지금 그런 상태를 그리 이해하였다. 그리고 이를 말해주는 데 있어 자칫 이상하게 흐를까봐 경계하였다.
당장 주의 이름을 부르고 그 앞에 도우심을 바라라고, 이는 아이의 문제가 아니라 너의 문제라고 일러주었다. 아이는 병원에서 조금 더 치료를 받게 하고 너와 신랑이 먼저 예배에 나오라고 일렀다. 그런데 저는 한사코 그런 식의 접근은 처음부터 너무 부담스럽다며 차츰, 단계적으로 하겠다고 하며 돌아갔다. 뭐라 한들. 정말 듣지 않는다. 나야말로 내 의지나 힘으로는 할 수 없다는 걸 느꼈다. 오히려 저는 ‘조금’ 이해를 얻고 도움이 됐다며 너털웃음을 지으며 돌아갔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면서도 강화에 있는 전원주택으로 계약할까, 구월동에 있는 조그만 상가를 계약할까? 하고 내게 물었다. 기가 찰 노릇이었다.
농담으로나 듣던 이들의 실태가 이런 것이겠구나. “롯이 나가서 그 딸들과 결혼할 사위들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이 성을 멸하실 터이니 너희는 일어나 이 곳에서 떠나라 하되 그의 사위들은 농담으로 여겼더라(창 19:14).” 어떤, 아주 강한 벽에 부딪치는 것 같았다. 한나절 느닷없이 전개된 저의 이야기에서 죄의 완강함이 어떤 것인지 알았다. 한 영혼이 주께 돌아서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한 사람이 주 앞에 나오기가 얼마나 불가능한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며 고하여 구하고 아뢸 수 있는 게 얼마나 큰 은총인지 알았다.
하나님 아버지, 하고 주의 도우심을 바라자. 하는 내 말에, 나는 한 번도 하나님 아버지 하고 불러본 적이 없는 것 같은데? 하고 저는 퉁명스럽게 말하였다. 아뿔싸. 그야말로 괴물이 따로 없구나, 싶었다. 그러면서도 저는 하나님을 나름 잘 안다. 믿는다. 어떤 의연함은 있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정작 그 다급함을 본인들만 모른다. 신랑은 무기력하고 이이는 드세었으니, 아이의 벼랑 끝은 외로움뿐이었다. 당장 뭐라 하고 아이를 데려올지, 그럼 아이가 또 어떨지, 그러지 말고 무슨 일거리나 봉사 같은 거 없어? 하면서 저는 또 앞섰다.
말이 겉도는구나. 아무리 일러 뭐라 한들, 성령께서 건드시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겠구나. 나의 말로는 어떤 설득도 기대도 이룰 수 없는 것임을 깨달았다. 뭐라 자꾸 지껄여대는 통에 ‘너 맘대로 해!’ 하고 나는 두 손을 들었다. 어떻게 오게 하든, 다른 델 데려가든, 뭘 어쩌든.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기도뿐이었다. 새삼 절감하였다. 하나님이 하시지 않으면 모든 게 허사라는 걸 말이다. 내가 안달해서 될 일도 아니었다. 그런 와중에도 잔금을 언제 받고 어디를 또 계약을 하는지, 따위의 일을 내게 설명할 필요는 없는데.
두려움은 내 몫인가. “주의하라 깨어 있으라 그 때가 언제인지 알지 못함이라(막 13:33).” 지금 내가 저이와 논쟁을 할 일은 아니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눅 21:34).” 참다못해 아이가 아니라 네 문제다! 하고 일러주었는데도 저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자신은 괜찮다는 것이다. 여태 잘 살았고, 인생 뭐 있냐는 식이다. 나는 저를 보고 정색을 하며 말했다. 지금 네 딸이 그 심정이야! 그 지경이어서 병원에 입원까지 했다! 자기 몸을 찢고 스스로에게 고통을 가한다! 지금 딱 네 말들을 되풀이 하면서 말이다! 어때, 괜찮냐? 넌 멀쩡한 것 같은데 영혼을 자해하고, 아이는 몸부림치며 그 부모 앞에서 자해를 한다. 아직도 모르겠냐?
저의 안색이 좀 달라졌던가? 기어이 전부를 잃고서야 주의 음성이 들리려는가. 더 큰 일을 꾀고 있는 ‘검은 그림자’의 미소를 본 것 같았다. 살다보니 살아서 사느라 주를 잃을 때도 있을 것이나, 오늘 주님은 말씀하신다. “지금부터 일이 일어나기 전에 미리 너희에게 일러 둠은 일이 일어날 때에 내가 그인 줄 너희가 믿게 하려 함이로라(요 13:19).” 돌아가기에 앞서 잠깐 기도하자는 말을 한사코 미뤄두면서 ‘나중에’ 하는 저의 태도에서 알았다. 아이 속의 괴물이 실은 그 엄마였구나. 무기력한 그 아버지였구나. 스스로 몸을 그어대며 아우성치는, 오히려 그 영혼의 괴로움을 호소하는 소리였구나.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있는 게 없어 주의 이름을 되뇌었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실족하지 않게 하려 함이니(요 16:1).” 오늘 다윗의 기도를 되뇐다. “나는 오직 주의 사랑을 의지하였사오니 나의 마음은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시 13:5).”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며 그의 앞에 도우심을 바라고 의지할 수 있는 게 복이었구나.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요 15:11).” 마음이 어렵고 심란하여 나는 돌아가는 아이에게 다시 문자를 하였다. 위하여 기도할 것을. 곧 다시 오라고 하며. 그럼에도 하나님은 너를 사랑하신다고.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보낸 자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13:20).” 부디 나는 아둔하고 미련하여 더는 어찌 저를 설득할 수 없음을. 이해와 타협의 문제가 아니라 속죄와 영접의 문제인 것을.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나를 영원히 잊으시나이까 주의 얼굴을 나에게서 어느 때까지 숨기시겠나이까(시 13:1).” 부디 나에게 보이는 것이 저에게도 들려지기를.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이는 주께서 내게 은덕을 베푸심이로다(6).”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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