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요한복음 11:25-26
터가 무너지면 의인이 무엇을 하랴
시편 11:3
주가 물으신다. ‘이것을 네가 믿느냐?’ 주는 부활이시고 생명이시다. 주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주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 된다. 이를 듣는 자의 입장에서 다시 받으면,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 14:8).” 이때 우리의 고백은 베드로의 것과 동일하고,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6).”
오늘 본문에서처럼 마르다의 고백과도 같다. “이르되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요 11:27).” 곧 이를 아는 것은 알게 하시는 이의 것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마 16:17).” 이와 같은 고백 위로 교회를 세우신다.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18).”
이로써 그 사명은 돌아가서 그 복음을 전하는 일이다. “이 말을 하고 돌아가서 가만히 그 자매 마리아를 불러 말하되 선생님이 오셔서 너를 부르신다 하니(요 11:28).” 이는 곧 천국의 열쇠가 우리에게 주어진 터이고, 하늘과 땅에서 풀고 매는 권세를 주신 것이다.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마 16:19).”
오늘도 이 아침 주께서 물으신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 11:25-26).” 혹시나 여전히 주춤거리고 있지는 않는지. ‘~하다면’ 하는 식으로 가정하여 대답을 늦추고 있지는 않은지. 이미 그 답은 우리 앞에 놓였으니 주가 여기 계시는데도 말이다.
“마르다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21).” 똑같은 의문이 생겨나는 일이다. “마리아가 예수 계신 곳에 가서 뵈옵고 그 발 앞에 엎드리어 이르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하더라(32).” 마르다나 마리아나, 저들과 다를 바 없는 오늘 내 안의 서운함이나 어떤 의구심은 여전하여서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하는 식의 자괴감에 시달리기는 매한가지다. 이에 대한 예수님의 생각은 엄연히 다르다. “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을 너희를 위하여 기뻐하노니 이는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그에게로 가자 하시니(15).”
감정적인 것은 결코 진짜 믿음이 아니다. 이를 오늘 다윗은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터가 무너지면 의인이 무엇을 하랴(시 11:3).” 의인이 의로운 까닭은 주의 뜻을 나타냄이다. 그러므로 “여호와는 의로우사 의로운 일을 좋아하시나니 정직한 자는 그의 얼굴을 뵈오리로다(7).” 의로움과 정직함은 그 ‘터’ 위에서다. 주께서 의로우심이 전제다. 의로우신 이가 죽어간다는 데도 미적거리셨다. 더 머무르다 오셨다. “나사로가 병들었다 함을 들으시고 그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유하시고(요 11:6).” 그와 같은 미적거림도 또한 외면까지도 의로움이다. 의로움과 정직함의 근원적인 터다. ‘터가 무너지면 의인이 무엇을 하랴?’
자신의 의로 도취되고 그 정직함으로 스스로 인정받길 원하는 것으로는 어림없는 소리다. 그 기준이 아닌 것이다. 이에 ‘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을 기뻐하노라.’ 두 자매의 말대로 주께서 거기 계셨다면 죽지 않았을지 모르겠으나,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 믿음이란 참으로 묘한 것이어서 스스로 규정할 수 있는 그런 가치의 기준이 아니다. 어디 기독교 신문에 실린 글을 읽었다. 한 친구가 예수를 부정하는 대목의 실화다.
그의 친구가 있었다. 저는 할렘가 갱단에 들어가고 싶었다. 저들 앞에서 우쭐하며 자신의 존재감을 높여야 했다. 어느 늦은 밤길, 한 여성이 피로한 걸음으로 퇴근을 한다. 저들은 그녀를 강간하고 살해하면 갱단에 입단할 수 있다고 제안했다. 저는 슬그머니 달려가 그녀 머리에 두건을 씌우고 흠씬 두들겨 팼다. 다른 갱단들이 달려들어 주저하는 저를 보란 듯이 밀치고는 강간을 했다. 그러자 저도 용기를 내어 강간을 했다. 다 같이 흡족해하며 누워있던 여인의 두건을 벗겼다. 그녀는 저의 어머니였다. 저는 괴로움에 자신의 머리를 쏘아 자살을 했다. 갱단들이 여인을 죽이고 도망쳤다.
과연 이 이야기 속에서 하나님은 어디 있느냐는 게 저의 항변이었다. 참으로 끔찍한 내용이 아닐 수 없다.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롬 1:28).” 이와 같은 항변으로 나 역시 오랜 시간을 머뭇거리며 외면하고, 돌아서서 부정하기를 얼마나 집요하게 오랜 시간을 그러하였던가. 과연 ‘그럴 때’ 하나님은 어디 계셨나?
만일 그때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하는 원망과 조롱이 한데 뒤섞여 올라온다. 어찌 이 가운데서 선을 운운하고 의로움을 나타낼 것인가? 마음이 답답해지는 내용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런 가운데서도 이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선하시다.’는 결론을 가지고 생각을 이어갈 수 있겠다. 갱단인 저들에게 그와 같은 일은 비일비재하다. 청년이 자살하여 죽지 않았다면, 그래서 갱단이 됐다면 저는 아마도 몇 번은 더 그와 같은 일을 저질렀을 것이다. 참으로 악한 듯 하나 사람은 더욱 더 악할 수 있다.
급하면 자녀도 먹는다. “자기가 먹는 그 자녀의 살을 그 중 누구에게든지 주지 아니하리니 이는 네 적군이 네 모든 성읍을 에워싸고 맹렬히 너를 쳐서 곤란하게 하므로 아무것도 그에게 남음이 없는 까닭일 것이며(신 28:55).” 어떻게 그럴 수 있어? 하면서 지금은 고상을 떨지 모르겠으나, 그 까닭은 엄연하였다. “너희가 이같이 될지라도 내게 청종하지 아니하고 내게 대항할진대 내가 진노로 너희에게 대항하되 너희의 죄로 말미암아 칠 배나 더 징벌하리니, 너희가 아들의 살을 먹을 것이요 딸의 살을 먹을 것이며(레 26:27-29).”
어떻게 그럴 수 있어? 하고 혀를 끌끌 차며 판단하고 비난하는 그 비난으로 우리 자신은 심판을 받을 것이다. “우리가 드디어 내 아들을 삶아 먹었더니 이튿날에 내가 그 여인에게 이르되 네 아들을 내놓아라 우리가 먹으리라 하나 그가 그의 아들을 숨겼나이다 하는지라(왕하 6:29).” 가슴을 쥐어짜며 원통해하고 괴로워하나 그보다 더한 일도 스스로 자행할 수 있는 게 인간이라. 인간은 결코 그 스스로는 선할 수 없다. 의로울 수 없다. ‘터가 무너지면 의인이 무엇을 하랴?’
우린 마치 부당하고 옳지 않은 데 따른 것을 하나님께 돌리며 원망한다. 실은 그 마음에 하나님을 모시기 싫어하면서, 상실한 그 마음대로 살았으면서! 그러다 새삼 “아픈 것과 종기로 말미암아 하늘의 하나님을 비방하고 그들의 행위를 회개하지 아니하더라(계 16:11).” 이것이 사람이다. 터 없는 의로움이었다. 나름 옳다고 여기는 것들의 허상에 대하여,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나의 모든 판단과 기준을 십자가에 못 박아버릴 수 있기를. 때론 우리가 이해하고 상식적으로 알 수 있는 범위 너머의 일들에 대하여도, 하나님은 선하시다. 의로우시다. 이 기본 명제를 붙들지 않으면 답이 없다. 성경의 내로라하는 믿음의 사람들 역시 누구 하나 흠 없이 티 없이 살다간 이가 있던가? 과연 남은 생을 송두리째 동행하였던 에녹은 철저히 의인이었을까? 저는 심판을 알리는 무드셀라를 낳고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니면 노아라고 뭔가 특출해서 저가 뽑혀 구원의 방주를 지었을까?
이내 가장 장수하였던 무드셀라가 죽는 날 하늘은 열리고 땅은 터져 홍수가 시작되었다. 노아를 의인이라 보아주는 이가 계셨으니, “이것이 노아의 족보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창 6:9).” 곧 우리의 의는 그 터 위에서다. 하나님과의 동행에서이다. 저의 당대의 완전함이란, 다들 그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할 때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그 때에 온 땅이 하나님 앞에 부패하여 포악함이 땅에 가득한지라(11).”
이처럼 말씀을 따라가다 보면 그 어떤 악도 주 앞에서는 용서받지 못할 게 없고, 그 어떤 선도 그의 터 위가 아니면 아무리 어떠하다 해도 선할 수 없음을 보여주신다. 악하다 선하다의 기준은 그 모든 게 주님이시라. 더한 악이라 해도 주의 십자가의 보혈로 용서받지 못할 게 없고, 그 어떤 선이라 해도 십자가 위에서 생색을 낼 것이 없다. 그리하여 날마다, 내 십자가를 지고 주를 따르는 일이었다.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눅 14:27).”
때론 이를 감당할 수 없겠으나,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리라(요 16:12).” 주께서 그리 감당하심이다.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11:25-26).” 오늘 아침, 이와 같은 물으심이 내게 새삼 귀하다. “내가 여호와께 피하였거늘 너희가 내 영혼에게 새 같이 네 산으로 도망하라 함은 어찌함인가(시 11:1).”
주만 바라고 산다는 일, 그 “터가 무너지면 의인이 무엇을 하랴(3).” 그러므로 “여호와는 의로우사 의로운 일을 좋아하시나니 정직한 자는 그의 얼굴을 뵈오리로다(7).” 아멘.
'[묵상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너희가 믿게 하려 함이로라 (0) | 2018.05.17 |
---|---|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0) | 2018.05.16 |
나는 양의 문이라 (0) | 2018.05.14 |
주의 이름을 아는 자는 주를 의지하오리니 (0) | 2018.05.13 |
너희가 참으로 자유로우리라 (0) | 2018.05.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