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요한복음 10:7
여호와여 주는 겸손한 자의 소원을 들으셨사오니 그들의 마음을 준비하시며 귀를 기울여 들으시고 고아와 압제 당하는 자를 위하여 심판하사 세상에 속한 자가 다시는 위협하지 못하게 하시리이다
시편 10:17-18
다들 믿네 안 믿네 어쩌고 하면서도 그 속에 종교심이 없는 사람은 없다. 흔히 ‘소원을 빈다.’ 하는 따위의 말이 그 바탕이어서, “내가 두루 다니며 너희가 위하는 것들을 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단도 보았으니 그런즉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행 17:23).” 그러면서도 유독 하나님을 그 마음에 두시 싫어하는 것이었으니,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롬 1:28).”
우리의 합당하지 못한 모든 일의 출처는 그 마음을 상실한 까닭이었다. “이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끄러운 욕심에 내버려 두셨으니 곧 그들의 여자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그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자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 일듯 하매 남자가 남자와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그들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들 자신이 받았느니라(26-27).” 오늘 날 우리 사회가 이를 증거한다.
그러니 뭐라 한들 저들은 돌이켜 바른 문으로 들어가려 하지 않는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문을 통하여 양의 우리에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요(요 10:1).” 이를 아무렇지 않게 구는 양심이 화인 맞은 것이니, “자기 양심이 화인을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딤전 4:2).” 정말 모르는 게 아니라, 알고 싶지 않은 것이다.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고발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롬 2:5).”
찔린다는 말, “내 마음이 산란하며 내 양심이 찔렸나이다(시 73:21).” 그럴 수 있는 감각이 아직 살아 있다는 증거다. “그러나 이 지식은 모든 사람에게 있는 것은 아니므로 어떤 이들은 지금까지 우상에 대한 습관이 있어 우상의 제물로 알고 먹는 고로 그들의 양심이 약하여지고 더러워지느니라(고전 8:7).” 습관적으로 몸에 밴 것에 대해서는 나도 그 기준을 바로 알지는 못하는 것이겠으나 양심이 내게 호소한다. 나를 교훈하는 것이다. “나를 훈계하신 여호와를 송축할지라 밤마다 내 양심이 나를 교훈하도다(시 16:7).”
군 휴가를 받아 주일에 올라온 아이에게 고마움이 앞섰다. 그럴 수 있는 마음과 여건이 복이었다. 열에 아홉은 군대에 가면서 믿음을 버리고, 열에 아홉은 여자가 생기면서 신앙을 버리고, 열에 아홉은 어디 좋은 직장에 취직을 하면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잃는 것이나, “여호와여 나를 살피시고 시험하사 내 뜻과 내 양심을 단련하소서(26:2).” 나는 아이에게 부디 그 믿음을 지키도록, 신앙을 온전히 바르게 보존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하였다. 까딱하면 빼앗기는 게 양심이라.
“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 양심에 가책을 느껴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요 8:9).” 그랬다가도 휙, 잃어버리기 십상인 것이다.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는다고 믿었으나, “그리하여 거기서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으니라(요 10:42).” 또한 “그 때부터 그의 제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떠나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6:66).” 행여 자신의 믿음을 믿는 일보다 어리석은 것도 없었다. 바울사도의 절규가 나는 항상 귓가에 울린다.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고전 9:27).” 그의 믿음이 누구 못지않아서였을까? 우린 언제든 넘어지고 쓰러져 주를 모른다, 부인하기 쉬운 존재라.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 15:31).” 그렇지 않으면 어느새 나의 선한 양심은 무뎌져서 하나님을 모른다, 알지 못하는 자들과 다를 바 없이 굴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모든 종교는 사람이 신을 찾아 이에 우러르며 영성적인 삶을 추구하는 일이라면, 기독교는 그래서 종교가 아니다. 왜냐하면 신이 인간으로 인간을 찾아오신 것이기 때문이다. 굽이굽이 인류의 족적을 봐도 알 수 있다. 아담이 범죄 하여 자기 부끄러움을 가리며 나무 그늘에 숨었을 때도, 인류의 첫 살인자 가인에게도, 사람들이 온통 타락하여 더는 심판이 아니고는 감당이 안 될 때도 노아와 그의 가족에게 찾아오시는 하나님이 어느 날 우상의 땅에서 아브라함을 불러내어 약속의 땅으로 이끄시었다. 성경은 온통 신이 인간을 찾아오시는 이야기다.
마침 그 설교 말씀이 아이가 휴가 나와 주일을 지키러 올라왔을 때 들려주시는 것이라 참으로 시의적절하였다. 내 안에 이는 어떤 우려와 갈등을 아시고 들려주시는 말씀이었다. 하긴, 우리나라에만도 6만 여 종류의 신이 있다고 하고, 일본은 더해서 8만 여 가지나 된다고 하니, “바울이 아레오바고 가운데 서서 말하되 아덴 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심이 많도다(행 17:22).” 그러면서도 스스로 무교라 자청하고, 그러느니 자기 주먹을 믿고 산다고 여기는 교만에 대하여는, “우리는 주의 두려우심을 알므로 사람들을 권면하거니와 우리가 하나님 앞에 알리어졌으니 또 너희의 양심에도 알리어지기를 바라노라(고후 5:11).”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일이 한 영혼이 돌이켜 주를 바람이라. “내 영혼을 지켜 나를 구원하소서 내가 주께 피하오니 수치를 당하지 않게 하소서(시 25:20).”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의 종들의 영혼을 속량하시나니 그에게 피하는 자는 다 벌을 받지 아니하리로다(34:22).” 이를 아이에게 들려줄 수 있다면. 내가 듣고 섰는 것을 아이에게 보여줄 수만 있다면. 나에게 보이는 것을 바르게 들려줄 수 있기까지.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라(요 4:22).” 곧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23).” 예배를 위한 예배가 아니었다. 믿음을 위한 믿음도 아니었다. 나의 온전치 못함이 도리어 주를 온전히 바랄 수 있게 하는 것이었으니,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24).”
내 안에 두시는 이 모든 마음과 생각과 어떤 안타까움과 답답함으로도 주를 온전히 바라고 구하는 일이라. 이것까지도 온전히 주께 내어드리는 일이 예배였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 12:1).” 주일이 그저 주일이 아니어야 한다. 한 날의 삶이 그저 한 날의 무감각한 하루여서는 안 되는 일이다. 그러저러하다 보니 하나님을 바라고 구하는 믿음이란 또 그 때가 되면 돌아서서 떠나게 할 뿐이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2).” 이와 같이 분별할 수 있는 것이 복된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요 10:7).” 어찌나 숱한 문들이 많기도 하여서 여긴가, 저긴가 기웃거리다 보면 인생 더 허비한 때라.
“여호와여 주는 겸손한 자의 소원을 들으셨사오니 그들의 마음을 준비하시며 귀를 기울여 들으시고 고아와 압제 당하는 자를 위하여 심판하사 세상에 속한 자가 다시는 위협하지 못하게 하시리이다(시 10:17-18).” 그래서 곧 심령이 가난 자에게 천국을 주심이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마 5:3).” 스스로의 만족이 자신의 영혼을 병들게 하는 것이었으니, 나는 주를 위하여 고아라. 압제당하는 자라. 주를 바라는 마음이 아니고는 살 수가 없다.
그러므로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요 10:9).” 이 문이 옳았다. 그러므로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시 23:2).” 이에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6).” 하는 말씀을 머금으며 오늘의 말씀을 되새긴다.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삯꾼은 목자가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물어 가고 또 헤치느니라(요 10:11-12).”
삯을 위하여 교회를 이루고 영혼을 건사하는 일이란 참으로 그 죄가 크다. 가장 보편적인 마음인데 가장 추하다. 흔하여서 되레 그러한 마음이 당연한 일 같은데 벌써 그리 바라는 마음은 삯꾼이라. 온전히 주만 바랄 수 있었으면. 물질적인 것으로 연연해하지 말았으면.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7).” 그 문을 잃지 않기 위해서도 온전하고 바른 신학과 교리는 필요하였다. 여러 교단과 수많은 목사들이 건재하여 저마다의 위상을 드러낸다 해도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8).”
우리는 다만,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눅 3:16).” 곧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그것으로 족한 것이니,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가 오실 길을 곧게 하라 하였느니라(마 3:3).” 내가 들려질 때 나는 망하는 일이다. 내가 받들려 받듦을 받을 때, 우러러 그 경외함을 도둑질하는 것이었으니,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요 10:8).” 주 앞에 엎드려 아이들을 생각한다.
곧 “내가 내 목숨을 버리는 것은 그것을 내가 다시 얻기 위함이니 이로 말미암아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느니라(17).” 주께서 먼저 가신 그 길이라. 그리하여 주께 아뢴다. “여호와여 일어나옵소서 하나님이여 손을 드옵소서 가난한 자들을 잊지 마옵소서(시 10:12).” 곧 “ 여호와여 주는 겸손한 자의 소원을 들으셨사오니 그들의 마음을 준비하시며 귀를 기울여 들으시”옵소서(17).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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