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사도행전 20:24
내 원수가 나를 이기지 못하오니 주께서 나를 기뻐하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주께서 나를 온전한 중에 붙드시고 영원히 주 앞에 세우시나이다
시편 41:11-12
조용한 하루였다. 아내도 점심께 나와 같이 공부를 하며 오후를 보냈다. 창 밖의 세상과 다른 세계였다. 주 안에서 평안하다는 것, 시류에 휩쓸리지 않고 사는 일. 오늘 말씀에서 문득 성령의 내주 임재하심이란,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빌 3:12).” 우리의 삶 자체가 다른 방향에 있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13-14).” 이를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 20:24).” 하는 고백으로 가름하는 일.
그렇듯 주의 사랑은 최선을 믿고 바라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고전 13:7).” 다른 사람은 어떠한지, 그 시대에 대해 뭐라 할 거 없다. 변치 않는 것은 복음의 삶이 서로 같다는 것이다. 복음이란,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것으로,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롬 1:16).”
그 은혜 가운데 산다는 것은,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 우리를 양육하시되 경건하지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고 신중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 살고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으니(딛 2:11-13).” 이를 붙들고 흔들리지 않는 걸음이 복되다. 기초단체장 선거 날, 그 당락을 위해 혈투를 벌였던 이들의 고단했을 시간을 생각하면 그것과 비교도 할 수 없는 삶을 두고 사는 삶이라니!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14).” 그 목적이 뚜렷한 것이다. 전날에 통화한 아이의 고단하고 힘에 겨운 삶도, 어제 통화한 아이의 늘 같은 소리의 푸념과 한심함에 대하여도, “너는 이것을 말하고 권면하며 모든 권위로 책망하여 누구에게서든지 업신여김을 받지 말라(15).” 뭐라 일러 살아계신 하나님을 알려주어야 하는 것이었으니. 오늘 말씀은 그래서 우리를 세우신다는 것.
“지금 내가 여러분을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에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여러분을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하게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행 20:32).” 바울의 당부도 그러하였다. 늘 되새겨도 말씀밖에는 답이 없다. 먼저는 내가 든든히 서야 할 일이고, 누구의 말을 듣거나 그 사연을 두고 생각할 때 이해의 깊이와 뿌리는 말씀으로였다. 사느라 다들 쩔쩔매는 세상에서, 나름의 목표를 위해서는 어떤 인신공격도 서슴지 않는 선거판은 우리의 인생을 압축해놓은 듯하다. 한 치 앞도 모르면서 큰소리 떵떵 치고, 책임지지도 못할 언사를 막무가내로 해대는 꼴이라니!
그런 뒤에도 저는 반성이 없다. 잘못을 모른다. 억울할 따름이다. 아이는 통화하면서 그 짧은 이야기 가운데서도 오기 싫어서인 걸 지하철을 못 탄다는 말로, 자신의 무절제를 아버지의 인색함으로 덧씌워 변명하였다. 말씀으로 든든히 세워지지 않는 삶이란 허망하기 그지없어서 돌아보니 벌써 시든 것이라. 그러니 말씀은 내게 온유함을 더하신다. “그러므로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버리고 너희 영혼을 능히 구원할 바 마음에 심어진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라(약 1:21).”
전에는 그처럼 목숨 같이 여기던 것이 다 부질없다는 것을. 누가 누굴 지지하고 어떤 사상을 붙들고 무슨 신념에 기대 나름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일이라는 것이, 어리석을 따름이다. 말씀을 모르고 하는 소리는 자신의 그 소리에 의해 심판이 더해지고, 말씀을 든든히 붙들고 서는 일에서는 진리 가운데 서게 된다. “그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요 17:17).” 주님의 기도가 있다. 우리의 능력으로는 안 된다. 아이의 마음을 돌릴 수도 그 말을 따르게 할 수도 없다.
그리스도인의 순결이란,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여졌으니(15:3).” 우리는 그리스도께 속한 자유인이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8:32).” 말씀으로 세워진다는 게 말이다. “주 안에서 부르심을 받은 자는 종이라도 주께 속한 자유인이요 또 그와 같이 자유인으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은 자는 그리스도의 종이니라(고전 7:22).” 여기서의 종은, “너희는 자유가 있으나 그 자유로 악을 가리는 데 쓰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종과 같이 하라(벧전 2:16).” 자발적인 주의 종으로서의 자유다.
흔히 말하는 그 자유의지를 주께 내어드리는 자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갈 5:1).” 여기서의 종의 멍에는 예전에 그처럼 붙들려 목메어 살았던 가치와 기준이었지 않나? 더는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게 하시는 게 말씀이다. 더는 두려워하지 않는다. “무슨 일에든지 대적하는 자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이 일을 듣고자 함이라 이것이 그들에게는 멸망의 증거요 너희에게는 구원의 증거니 이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이라(빌 1:28).”
내 안에 있는 주의 능력이다. 이를 통해 사랑과 절제를 아는 마음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니 그러므로 너는 내가 우리 주를 증언함과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딤후 1:7-8).” 기꺼이 나는 외따로운 것 같으나 주 안에서 넉넉함이다. 개표방송을 보면서 들던 생각이다. 한낱 그 한정된 기간 동안의 당락에서도 저처럼 치열한데, 하물며 영생에 대하여는 무엇인들 그보다 더 귀하지 않을까.
오늘 바울 사도의 당부를 나는 그리 듣는다. “지금 내가 여러분을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에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여러분을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하게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행 20:32).” 그 영광의 즐거움에 대하여는 베드로 사도도 또렷하게 증언하고 있다.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벧전 1:8-9).”
그러므로 이를 지키라는 것,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네게 부탁한 아름다운 것을 지키라(딤후 1:14).” 귀하고 아름다운 것을 알면 알수록, “그러므로 너는 내가 우리 주를 증언함과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8).” 기꺼이 감수할 수 있는 것이다. 하다못해 목이 터져라 외쳐대고 몸이 으스러져라 뛰며 나름의 승리를 얻고자 저처럼 각 후보들이나 그 진영의 사람들을 보다 더욱 크게 알 것 같았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요 14:15).” 그 진흙탕 싸움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완주하는데, 하물며 말씀을 알고 영생을 안다면 ‘그 은혜의 말씀을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우리를 든든히 세우시는 건 당연한 게 아닌가! 그리하여 ‘거룩하게 하심을 입은 자에게 기업이 있게 하신다.’ 저 아이가 주의 기업이면 나의 당부와 염려가 헛되지 않을 것이다. 내가 잘나서가 아니라, “또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니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며 굳게 잡고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히 10:23-25).”
그리할 수 있는 힘도 주신다. 곧 “내 원수가 나를 이기지 못하오니 주께서 나를 기뻐하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주께서 나를 온전한 중에 붙드시고 영원히 주 앞에 세우시나이다(시 41:11-12).” 이를 붙들고 아이들을 생각하고 곁에 붙이시는 이를 위해 주께 간구하는 것이다. 내가 저들보다 나아서가 아니라, 능히 도우시는 주의 도우심을 알기에 가능하다. “그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느니라(히 2:18).” 말씀이 이로써 나를 붙드신다. 보호하심이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들과 세운 나의 언약이 이러하니 곧 네 위에 있는 나의 영과 네 입에 둔 나의 말이 이제부터 영원하도록 네 입에서와 네 후손의 입에서와 네 후손의 후손의 입에서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사 59:21).” 이에 “내가 주를 바라오니 성실과 정직으로 나를 보호하소서(시 25:21).” 아멘.
'[묵상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나는 네가 박해하는 나사렛 예수라 (0) | 2018.06.16 |
---|---|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0) | 2018.06.15 |
여호와는 위대하시다 하게 하소서 (0) | 2018.06.13 |
주께서 이를 행하신 까닭이니이다 (0) | 2018.06.12 |
내 주 하나님이 내게 응답하시리이다 (0) | 2018.06.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