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와 같이 주의 말씀이 힘이 있어 흥왕하여 세력을 얻으니라
사도행전 19:20
주를 찾는 자는 다 주 안에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시며 주의 구원을 사랑하는 자는 항상 말하기를 여호와는 위대하시다 하게 하소서
시편 40:16
주의 뜻은 시험과 함께 온다. 딱 그만한 곁길이 같이 놓인다. 안 그래도 될 것 같은 일이다. 뜬금없이 아이는 댄스학원에 등록했다. 기껏 글쓰기 동기도 부여가 된 셈이고, 작심하여 공부도 열심히 할 거였는데! 이미 결정을 했니? 하고 물으니 그렇다고 했다. 뭐라 해서 말을 들을 단계가 아니었다. 주일에 두어 번 교회를 나오는가 싶더니 안 나올 이유도 가지고 들어왔다. 지금은 권하여도 씨알도 안 먹힌다. 늘 보면 한 손을 품 안에 숨기고 있는 꼴이다. 일을 해야 한다고 하는 사람이 품에 넣은 손을 빼려하지 않는다.
무슨 공식 같다. 시련이 없으면 순종도 없다. 순순히 말을 듣지 않는 게 사람의 특징이다. 다 자기 방식이 있다. 말씀도 그 정도 선에서 기준을 삼는다. 그리하여 공식적으로 시험을 하신다.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켜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 이는 장차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할 때라(계3:10).” 말씀을 지킨다는 일은 은혜의 영역이다. 사람의 자기 생각은 언제나 말씀을 앞선다. 주저하거나 부정하거나. 오후 늦게 아이랑 통화하면서 마음이 아팠다.
스물여섯. 아, 그 꽃다운 나이를 쉰여섯은 족히 된 듯한, 사느라 찌든 중년의 여성을 마주하고 있는 것 같았다. 힘내, 하고 말해주었더니 ‘힘든데 힘내봐야 뭐해요!’ 하며 울먹였다. 아이는 부모를 싫어한다. 집이 싫어서 누구를 좋아하면 저와 동거를 하였다. 지금 아이는 벌써 2년째다. 둘 다 계약직, 한국 사회의 눈물겨운 청춘들이라 미래가 없다. 결혼은 엄두도 못 내고, 실은 그만큼 서로를 사랑하는지도 의문이다. 갱년기 부부처럼 산다. 있어서 좋은데 없다고 싫을 것도 없다.
정돈이 안 된 삶을 사니까, 늘 곁에 흘리고도 어디에 두었는지 찾아 헤매는 꼴이다. 그렇다고 하면 또 발끈한다. 감사를 잃었으니 온통 불안함뿐이다. 술에서 깨면 부끄러워 다시 술을 찾는 식이다. 모르고 그러는 게 아니라, 자기 생각이 우선이니까 어렵다. 하나님밖에 답이 없다. 아니면 거짓말을 믿는다. “이러므로 하나님이 미혹의 역사를 그들에게 보내사 거짓 것을 믿게 하심은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들로 하여금 심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살후 2:11-12).”
안 됐고, 마음이 아프다. 내가 할 수 있다면 다리몽둥이라도 부러뜨려 끌고 왔을 텐데. 그 부모의 권위는 땅에 떨어져 그저 참견과 격한 분노만 일으킬 따름이다. 그럴 때 또 그만한 도피처가 되는 남자들이 있었으니, 그냥 그 품이 나은 것이다. 아,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롬 1:28).” 함께 교회를 시작하였던 아이인데, 나는 변변하게 어떤 말도 못해주고 아이의 푸념만 듣다, 일에 쫓겨 아이가 전화를 끊자 마음이 울적했다.
딱 그만한 곁길이 같이 놓인다. 이 길로 가도 될 것 같다. 늘 보면 사탄의 열심도 대단하다. 성령이 우리에게 어떤 마음을 주시면 안 그래도 될 것 같은, 같은 무게의 마음을 동시에 놓아둔다. 그게 더 나은 것 같다. 훨씬 합리적이다. 위로가 된다. 너무 은밀하여 분간을 못할 것 같다.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마 24:12).” 근데 자신도 다 안다. 근본적으로 우리 안에는 하나님을 싫어하는, 그 마음에 모시기 싫어하는 속성이 있다. 내가 내 주인이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신기한 것은 이 마음이 누룩 같다. 삽시간에 우리를 주도한다. 언제 벌써 그게 옳은 게 되어 있다.
“너희가 자랑하는 것이 옳지 아니하도다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지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전 5:6).” 마지못해 하는 하나님의 일은 더욱 그 얼룩이 선명하다. 싫은데 가려니까 천근만근 발이 무겁다. 아이도 그렇고, 주의 이름으로 다가가려 하면 날름 등을 돌린다. 그러니 이제 말씀 말고는 다른 걸 줄 게 없는데 어쩐다? 할 수 있는 데까지 해봐야지 별 수 있겠나? 듣기 싫으면 살아보는 수밖에. 자기 고집대로, 스물여섯. 그 아름답고 싱그러운 청춘을 찌든 삶에 허덕이며 더는 소망도 없는 여인처럼 가꾸지도 못하고 살아가는 것이니.
난데없이 웬 춤? 열여섯, 우리 중3 아이의 고집도 어지간하다. 뭐라 하면 정색을 하고 반감을 드러내니까, 그럼에도 안 볼 각오를 하고 꾸짖어야 옳은 것인지. 미술을 하네, 어떤 요리에 관심이 있네 하더니만, 학원비도 만만치 않을 텐데. 어쩜 우리는 이처럼 자기 고집에 겨워 살아야 하는 것일까? “적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지느니라(갈 5:9).” 삽시간이다. 그 마음에 하나님 모시기를 싫어하면, 습한 베란다에 끼는 곰팡이처럼 순식간이다. 돌아보면 그랬던 아이가 벌써 스물여섯. 혹은 딸 하나를 둔 마흔넷.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아이를 치료하는지 어쩌는지 더는 연락도 없는 마흔넷이나, 한 남자아이와의 동거로 더는 어떻게 해볼 의욕도 의지도 없는 고학력의 스물여섯이나, 인문계 고등학교라도 가야 하지 않겠나 싶은데 하루에도 열두 번씩 바뀌는 마음을 주체하지 못하는 열여섯이나. 잠깐 돌아앉았을 뿐인데 인생은 훅, 훅, 지나 저만치 그 끝이 보일 지경이라. “여호와여 주의 긍휼을 내게서 거두지 마시고 주의 인자와 진리로 나를 항상 보호하소서(시 40:11).” 나는 주께 아뢴다. 다른 대안이 없다. 더 좋은 수가 없다. 내가 어쩔 수 있는 게 아니다.
주가 아니시면 아까운 인생 다 흘려보내고 난 뒤, 황폐한 땅에서나 도로 길을 얻을까?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겠느냐 반드시 내가 광야에 길을 사막에 강을 내리니(사 43:12).” 자기 아집과 생각으로 결탁하면 별 수 없다. 누룩 같아서 교묘하게 전부를 부풀린다.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요일 2:16).” 누구보다 먼 길을 배회하며 살아온 사람이라, 나는 그 고집이 얼마나 강한지 잘 안다. 부러지고 넘어지지 않는 이상 별 수 없다. 망하는 것만이 답이다. 죽어야 산다.
갈 데까지 가보는 수밖에. 망가지고 깨져서 비로소 도움을 구하는 소리가 그 심령에서부터 나와야 할 일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 4:16).” 거기 아니야, 하고 말해주어도 소용이 없다. 손을 잡아끌어도 어림없다. 주님만이 우리를 도우실 수 있다. “그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느니라(2:18).” 주와 상관없이 살기로 하는 데야 별 수 없는 일이고.
주의 길을 간다고 하면서도 우린 또 얼마나 자기 생각이나 그 안이하고 막연한 감상을 따르려고 하는지 모른다. 내 안에 수도 없이 들어차는 내 생각과 내 기준에 대하여는 말할 것도 없다. 그럴 때면 왜 하나님은 늘 내 생각과 거꾸로 일하시는지 알다가도 모르겠다. 아이가 이쯤 되었으니 아이엄마가 이젠 돌아오려는가, 하고 기대하였는데 역시나! 더 강한 무장으로 등을 돌렸다. 내 안에 이는 난감함은 낭패가 되어 할 말을 잃었다. 결국 나더러는 주의 뜻만 바라게 하신다. 아이가 아니다. 중년이 넘어서는 아이엄마도 아니다. 문제도 아니다. 그 큰 일이 다 별 거 아니다.
우리의 가장 큰 실수는 다음을 기약하는 것이다. 내일을 계획하는 일이다. 앞으로의 꿈을 붙들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직은. 또는, 조금 더 있다. 혹은, 나중에. 어쩌면 그 대답은 다들 한결같은지. 내가 즐겨 쓰던 말들이다. 아직은, 나중에, 좀 이따, 알아서 할게. 그렇게 훅, 십 년이 흘렀고 또 그러다 훅, 십 년이 흘렀다. 나는 아이에게 그 말을 해주고 싶었는데 아이는 짜증 섞인 말투로 징징거리기만 할뿐. 자신을 숭배하는 것이다. “그런즉 내 사랑하는 자들아 우상 숭배하는 일을 피하라(고전 10:14).”
말씀 앞에 앉아, 비극적인 저들의 모습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한다. 그리 다루심이다. 이내 알게 하시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주의 말씀이 힘이 있어 흥왕하여 세력을 얻으니라(행 19:20).” 거짓과 실패가 난무하는 것 같은데, 돌이켜 주를 바라게 하시려고. 곧 “주를 찾는 자는 다 주 안에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시며 주의 구원을 사랑하는 자는 항상 말하기를 여호와는 위대하시다 하게 하소서(시 40:16).” 그렇듯 나를 오늘에 두시는 것처럼 또한 저들에게 향하신 주의 긍휼하심을 구한다.
“나는 가난하고 궁핍하오나 주께서는 나를 생각하시오니 주는 나의 도움이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라 나의 하나님이여 지체하지 마소서(17).” 하나님이여, 우리를 도와주소서. “또 범죄와 육체의 무할례로 죽었던 너희를 하나님이 그와 함께 살리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시고 우리를 거스르고 불리하게 하는 법조문으로 쓴 증서를 지우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력화하여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시고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느니라(골 2:14-16).”
그러므로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주를 가르치겠느냐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고전 2:16).” 나는 할 수 없으나 나로 할 수 있게 하시는 이가, 나는 알지 못하나 나로 주의 마음을 가지게 하셨으니,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골 3:5).” 내가 죽어야 내가 산다. 우리가 망해야 우리는 산다.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라(3).”
그리하여 "주를 찾는 자는 다 주 안에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시며 주의 구원을 사랑하는 자는 항상 말하기를 여호와는 위대하시다 하게 하소서(시 40:16)."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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