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렀으되 이 백성에게 가서 말하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도무지 깨닫지 못하며 보기는 보아도 도무지 알지 못하는도다
사도행전 28:26
사람은 존귀하나 장구하지 못함이여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 이것이 바로 어리석은 자들의 길이며 그들의 말을 기뻐하는 자들의 종말이로다 (셀라)
시편 49:12-13
우리는 다만 전하여야 하는 사람들이다. “바울이 온 이태를 자기 셋집에 머물면서 자기에게 오는 사람을 다 영접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을 담대하게 거침없이 가르치더라(행 28:30-31).” 오는 사람들을 영접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는 책무를 지녔다. 참으로 악조건인 것 같으나 그것으로 주님은 일을 하신다. 기껏 유라굴로를 피해 섬에 이르렀는데 독사에게 물렸으니, “서로 말하되 진실로 이 사람은 살인한 자로다 바다에서는 구조를 받았으나 공의가 그를 살지 못하게 함이로다 하더니(4).”
이루어지는 일이 점점 더 실패인 것 같고 악순환이 거듭되는 것 같으나 그 가운데서 주님은 일을 하신다. 하나님의 의를 이루어 가신다. 성령은 고통까지도 분배하신다. 그러는 중에 아무런 방해도 없이 ‘자기 셋집에 머물면서’ 말씀을 증거할 기회를 얻는 일이다. 세상이 줄 수도 알 수도 없는 평안이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 14:27).”
한데 “일렀으되 이 백성에게 가서 말하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도무지 깨닫지 못하며 보기는 보아도 도무지 알지 못하는도다(행 28:26).” 그런 이들을 위해 우리로 하여금 대신 기도하라 하신다. 주의 마음으로 대하게 하시고, 저들에게 하나님이 되라고 하신다. 위로가 되고 평안을 주는 사람이어야 한다. 우린 감당할 수 없어 주께 고하는 것이다. 딸애가 퇴근하고 아내도 일을 끝내고 오면 8시 반이나 되어야 해서, 그 시각에 교회로 모여 기도회를 갖기로 하였다. 여느 때처럼 말씀을 읽고 기도제목을 나누어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다.
마음을 정하고 자세를 바로 하니 그 의미가 새로웠다. 듣지도 않고 들으려하지도 않는 아이들을 생각하며 아이와 그 가정을 위해 기도하였다. 우리에게 맡기신 일이라. 보내셨다는 건 단지 그렇고 그런 사이 이상의 관계로 놓으셨다는 의미다. 여기서 문득 ‘부활의 관계가 아니고는 이해할 수 없는 입장이 된다.’ 내가 대체 왜 이 아이 때문에, 들으려 하지도 않는 저 사람으로 마음을 쓰며 주의 이름을 불러야 하는 것인가. 바울은 그가 거기에 있는 것으로 충분하였다. 오늘 본문도 이를 드러낸다. 죄수로 잡혀간 몸이면서도 그 안에서의 자유함이라니! 비록 셋집에 머물고 있으나 그 자체로 교회다. 성소가 된다.
그것으로 바울은 고백하였다.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빌 4:11-12).” 그러게.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일은 어떤 어려움에 대하여 또는 곤란한 형편에 대하여도 이를 개선하고 극복하려는 의지보다 묵묵히 순응을 배운다. 아프면 아픈 대로, 어려우면 어려운 대로 무던히 주의 뜻을 살펴 행하는 일.
물론 힘들어 죽겠다고 주께 푸념한다. 또는 나의 곤고함으로 칭얼거린다. 실의에 젖기도 하고 낙심이 들기도 한다. 그럼에도 주를 바라는 일, 거기가 감옥이면 어떻고 셋집이면 어떻겠나? ‘오는 사람을 다 영접하는’ 일이 우리의 일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을 담대하게 거침없이 가르치더라(행 28:31).” 그러니까 외적인 조건으로 주의 일을 행사하는 게 아니었다. 어떤 결핍이 충족되어서 주의 쓰임을 행하는 게 아니었다. 성령은 주권적으로 그 일을 수행하게 하신다.
아침에 노인의 이런저런 말을 들어줄 때, 나는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 같으나 이미 그 자체로 주가 일을 하고 계심이다. 그냥 왔다 그냥 가는 이가 없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지 내가 아니다. 나는 아무 것도 아니다. 그냥 거기에 두신 이의 뜻을 따라 오는 이를 마다하지 않는 것으로 큰일이며, 영접하여 주의 살아계심을 보여주고 들려주는 게 사역이었다. 우리는 그렇게 알고, ‘특별히’라는 부사를 붙여 기도회를 갖기로 한 것이다. 그냥 일반적인 일이겠으나 그것과는 달리, 의도적으로 ‘누구를 위해’ 또는 ‘무엇을 위해’ 그리한다.
기도제목을 쭈욱 나열하였다. 서로 돌아가며 하나씩 기도제목도 나누었다. 따로 구별하는 ‘부사’다. 부사는 아홉 품사 가운데 하나로 형용사나 동사를 그 앞에서 쓰여 그 뜻을 한정한다. ‘특별 기도회’하면 기도하는 그 시간을 ‘특별히’로 구별하여 일반적인 것과는 분리하는 것이다. 가령 오늘 우리에게 보내시는 저 아이를 우리가 얼마동안 맡아서 함께 할지 모르지만, 또 어떻게 일이 진행되고 무엇을 이루어 가실지 알 수 없으나, ‘특별’ 기도가 필요하다고 여겨졌던 것이다. 아이의 상태나 그 엄마의 노고가 안타까움 정도에서 머문다면 그야말로 안타까운 일이어서 말이다.
그 너머, 주께서 예비하고 계신 놀라운 주의 뜻을 알고 되레 오늘의 그 지경을 감사로 받을 수 있는 것이었으며 좋겠다. 나아가 그것으로 또한 주가 이루시고자 하는 놀라운 구원 사역이 이루어질 것에 대하여 의심하지 않는다. 잊고 있었던 기억 가운데 하나가 떠올랐다. 초등학교 5학년 때였나, 시골에서 전학을 하여 서울 학교로 옮겨가는데 교감은 나를 복도로 내보내더니 엄마를 닦달하듯 설득하였다. 애가 장애도 있고 또한 성적이 지진아수준이어서 받아줄 수 없다는 거였다. 당시 기억이 맞는다면, 정립회관인가 하는 특수학교가 있는데 아이를 그곳으로 보내시라는 설득이었다. 어머니는 기를 쓰고 나를 일반학교에 넣었다. 뚜렷한 기억은 어머니가 돌아가고 교감은 나를 아주 무서운 얼굴로 대하면서 반을 배정하였었다. 그때 담임들은 서로 맡지 않겠다며 손사래를 저었었다. 뜬금없이 그때의 교무실 풍경이 기억났고, 오늘 오는 아이의 이야기와 중첩된다.
성령이 주도적으로 하신다. 일이 더 꼬이는 것 같고, 어려움은 점점 더 가중되는 것 같지만, 오늘 본문은 그런 가운데서도 하나님은 일을 하고 계신다는 걸 아주 강하게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모든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그래서 늘 전화위복이다. 좋지 않은 일이라 여겨졌는데,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일은 그런 거 없다. 좋지 않은 일이란 없는 것이다. 그게 아주 끔찍한 고통만 안겨주는 것 같다 해도, 그래서 살 수가 없어 죽기를 바라는 마음뿐이라 해도, 그것으로 빚어 가시는 하나님의 새로운 조성사업이 성화구원이다. 나는 그리 이해한다.
다들 나름의 시각으로 지금의 처지를 한탄하고 또는 동정하나, 그러는 자신들의 삶은 얼마나 평안하신가? 정상적이어서 얼마나 정상적으로 살고 계시는가? 남들처럼 사는 게 과연 정상의 정도인가? “사람은 존귀하나 장구하지 못함이여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 이것이 바로 어리석은 자들의 길이며 그들의 말을 기뻐하는 자들의 종말이로다 (셀라)(시 49:12-13).” 말씀 앞에 부르르 몸을 떤다. 나름 존귀하고 그 삶이 유한마담 같아서 희희낙락 사는 날이 다 즐거운 것 같지만, 들춰보면 어느 구석 썩어 냄새나지 않는 데가 없다.
과연 그런 애가 하나님을 알기나 할까? 그게 믿는 걸까? 하고 묻는 누구에게 나는 그런 소리하지 말라고 하였다. 믿음이 무슨 특권인양 굴어서는 안 된다.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단정 지어서는 안 된다. 구원은 하나님의 의, 그리스도의 화목제물로 인한 것이다. 이를 받아들여 영접하는 자는 그딴 소리 못한다. 왜냐하면 아무리 돌아봐도 내가 이룬 게 아니기 때문이다. 믿음조차 주의 선물이라, 내게 어찌 그리 되는지 우리는 도무지 알지 못하는 게 믿음이다. 마치 자신은 이성적으로 판단하여 자유의지에 의해 옳소! 하고 한 표를 행사한 주권으로 여기는 것 같은데, 나는 되레 그런 믿음이 의심스럽다.
신념을 믿음으로 둔갑시켜 열심을 다하는 빙충이 신자들이 얼마나 많은지. 나는 때로 저들의 과도한 열심이 역겨울 지경이다. 강매하듯 팔아치우는 것처럼 복음을 강요하는 이를 보면 더욱 그렇다. 그래놓고는 자신의 열심에 겨워 다른 이의 소득 없음을 평가절하하고 비판하여 정죄하는 모습들이라니! 두려운 일이다. 내 안의 속성도 다르지 않다. 나는 아이가 조현병으로 인함이든, 또는 뭘 알지도 못하고 지껄이는 고백이라 해도 그 뒤에 성령이 함께 하심을 확신한다. 성령의 주도하심이 아니면 내 안에 이는 마음도 설명이 안 된다. 저 아이의 발걸음도 그렇다. ‘오는 사람들’의 그 의지는 주의 것이다. 되레 더 친한 척 하면서도 교회여서, 와 봐야 빤하다 싶어서, 오기를 꺼려하고 차라리 밖에서 보자고 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나는 이제 아이들이 그냥 왔다 그냥 가는 경우는 없다고 확신한다. 성령이 저들로 글방에 오게 하셨지만, 저들이 들어선 곳은 교회였고, 하나님에 의한 부르심이었으며, 아직은 표가 나지 않고 긴가민가싶지만 어느 훗날 우리는 함께 확인하게 될 것이다. 오늘 우리의 만남도 창세 전에 이미 예정하신 택정하신 바 그 놀라운 주의 섭리 가운데서 이루어졌다는 것을 말이다. 나의 유년의 어떤 아픈 기억조차 지금 와 생각해보면 버릴 게 하나도 없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딤전 4:4).”
주께서 우리의 길을 주도하신다. 이를 온전히 알고자 하여 ‘특별히’ 금식을 하고 같이 모여 기도를 하는 것 자체로 은혜라. 이 아둔한 세상에서, “이 백성들의 마음이 우둔하여져서 그 귀로는 둔하게 듣고 그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아오면 내가 고쳐 줄까 함이라 하였으니 그런즉 하나님의 이 구원이 이방인에게로 보내어진 줄 알라 그들은 그것을 들으리라 하더라(행 27-28).” 어쩌면 그들이 안 듣고 안 보는 게 이성적으로 맞는 것 같고 이치에 더 합리적인 것 같은 세상에서.
“뭇 백성들아 이를 들으라 세상의 거민들아 모두 귀를 기울이라 귀천 빈부를 막론하고 다 들을지어다(시 49:1-2).” 하나님은 살아계신다. 우리를 돕는 이시라. “내 입은 지혜를 말하겠고 내 마음은 명철을 작은 소리로 읊조리리로다(3).” 주 앞에 우리의 무익함을 아뢴다. “아무도 자기의 형제를 구원하지 못하며 그를 위한 속전을 하나님께 바치지도 못할 것은 그들의 생명을 속량하는 값이 너무 엄청나서 영원히 마련하지 못할 것임이니라(7-8).” 아무도 그 값을 대신 물어줄 수 없다. 마치 우리 아이가 그러면 난 미칠 거 같아! 하면서 자신들은 나름 잘 하고 있다고 착각하는 경우에 대하여! “그가 영원히 살아서 죽음을 보지 않을 것인가(9).”
이에 “사람은 존귀하나 장구하지 못함이여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 이것이 바로 어리석은 자들의 길이며 그들의 말을 기뻐하는 자들의 종말이로다 (셀라)(12-13).” 그러니 오늘 우리가 주의 이름을 부를 수 있는 것만으로 얼마나 ‘특별한’ 일인가. 아무리 “존귀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20).” 주 앞에 엎드려, “그러므로 우리가 담대히 말하되 주는 나를 돕는 이시니 내가 무서워하지 아니하겠노라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요 하노라(히 13:6).”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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