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우리를 죽을 때까지 인도하시리로다

전봉석 2018. 6. 21. 07:18

 

 

 

떡을 가져다가 모든 사람 앞에서 하나님께 축사하고 떼어 먹기를 시작하매 그들도 다 안심하고 받아 먹으니 배에 있는 우리의 수는 전부 이백칠십육 명이더라

사도행전 27:35-37

 

이 하나님은 영원히 우리 하나님이시니 그가 우리를 죽을 때까지 인도하시리로다

시편 48:14

 

 

 

인생 참 ‘유라굴로’ 같다. 닥쳐봐야 안다. 그런데도 자기 생각을 버리지 못한다. 감정에 휩싸인다. 아이로 인해 아이엄마는 죽고 싶다. 둘이 같이 죽을까 하여 그 동생은 마음을 졸인다. 공연히 마음이 어렵고 힘든 하루였다. 속상하고 답답하여 어디에 말할 데도 없었다. 바울이 “말하되 여러분이여 내가 보니 이번 항해가 하물과 배만 아니라 우리 생명에도 타격과 많은 손해를 끼치리라 하되(10).” 그러나 ‘남풍이 순하게 불며 닻을 감아 해변을 끼고 항해하기도 하였으니’, “백부장이 선장과 선주의 말을 바울의 말보다 더 믿더라(11).”

 

그 배에는 훈련된 병사와 평생 배를 다루었던 숙련된 사공 276명이 타고 있었다. 누군들 처량하게 끌려가는 바울의 말에 귀를 기울일까. 순풍이 불어 보란 듯 바울의 말은 우습게 여겨졌다. 결국은 유라굴로가 닥쳐서야 알 일이다. “배가 밀려 바람을 맞추어 갈 수 없어 가는 대로 두고 쫓겨가다가(15).” 그러면서도 자신들의 지식이나 삶의 경험을 우선한다. “사흘째 되는 날에 배의 기구를 그들의 손으로 내버리니라(19).”

 

아이는 조울증에서 조현병으로 병명을 바꾸어서 진단을 받고 새로 약을 바꾸었다. 공상이 많고 망상에 빠지기도 한다. 횡설수설 말이 조리 없고 두서없다. 나름은 세상과 소통하고 싶어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을 한다. 아무도 자신의 글이나 사진에 ‘좋아요’를 누르지 않는다. 이를 악용해 대신 홍보해주는 대행업체를 클릭했고 자신의 체크카드번호를 넘겨주었다. 십여만 원이 순식간에 빠져나갔다. 해외에 서버를 둔 터라 친구 신청을 해주거나 누가 ‘좋아요’를 눌러주는 게 거반 외국인들이다. 게시물에 천 명이 넘는 ‘좋아요’ 수에 만족한다.

 

그런 상황을 듣고 아이의 계정을 정지시켰다. 탈퇴를 하고 로그아웃도 하게 했다. 은행에 들러 체크카드를 새로 교체하게 하였고, 그와 같은 사실을 어쨌든 엄마에게 말하게 하였다. 당연히 아이엄마는 그 속이 뒤집어진다. 아이는 충동구매 욕구를 이기지 못한다. 자꾸 일을 벌이고 말썽을 일으킨다. 스물둘. 이제 성인이라 사회적으로도 그 부모가 어찌 관여할 수 있는 범주를 넘어섰다. 노심초사 그 삶이 사는 게 아니라. 아이엄마도 우울증을 가지고 있었다. 죽고 싶다는 욕구에 시달리고, 행여 아들애를 데리고 극단적인 선택을 할까봐 동생은 그게 늘 불안하다. 나는 아이엄마에게 문자로 위로를 하고 토요일마다 오시겠나, 권했다.

 

이래저래 속상하고 답답한 마음으로 설교 원고를 다듬는데, 정죄하심이 없다는 말과 징계가 있다는 말이 어떤 의미인지 알 수 있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롬 8:1).” 하나님도 이제 우리를 정죄하지 않으신다.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요 3:18).”

 

사탄도 우릴 정죄할 수 없다. “보라 주 여호와께서 나를 도우시리니 나를 정죄할 자 누구냐 보라 그들은 다 옷과 같이 해어지며 좀이 그들을 먹으리라(사 50:9).” 그런데 징계하심이 없다면 사생자다. 주의 자녀가 아니다. “내가 회초리로 그들의 죄를 다스리며 채찍으로 그들의 죄악을 벌하리로다(시 89:32).” 그러니까 우리를 죽여서라도 살리신다. “우리가 판단을 받는 것은 주께 징계를 받는 것이니 이는 우리로 세상과 함께 정죄함을 받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1:32).”

 

정죄하지 않으시는데 어째서 죄에 대해서 징계하시나? 이를 일련의 소동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아이를 속여 그처럼 돈을 갈취한 저들이 나쁜 것이지, 아이가 나쁜 건 아니다. 아이는 잘못은 했지만 범죄 한 것은 아니다. 죄에 대해서 정죄함이 있는 것이지 죄악에 대해서는 징계가 있을 뿐이다.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은 받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지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를 모두 전가하셨다. 즉 우리 죄를 대신 속량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 3:24).” 속량은 이런 의미다. 아이가 저지른 잘못을 그 부모가 대신 가져가는 것이다. 가령 한 아이가 가게에서 물건을 그냥 가져갔다. 그 주인은 아이를 붙들어 그 값을 부모에게 대신 물렸다. 그럼 아이를 이제 그냥 두어야 하나? 꾸짖어야 한다. 징계해야 하는 것이다. 다시는 그런 일을 못하도록 혼쭐을 내야 한다. 버릇을 고쳐야 한다. 야단을 쳐야 하는 것이다.

 

마치 복잡한 문제가 풀린 것처럼, ‘이제는 정죄함이 없다는데 징계가 있어야 한다.’는 말씀에서 어려워하던 마음이 풀렸다. 죄에 대하여는 그 값을 다 지불하셨다. 아이엄마에게 그리 설명해주다 이해가 되었다. 아이가 잘못했지만 저들이 나쁜 것이다. 나쁜 놈은 저들이지 아이가 아니다. 아이의 실수나 그 충동은 야단도 치고 혼을 내서 다스려야 할 일이지, 정죄하여 벌을 줄 일은 아닌 것이다. 가르쳐야 한다. “우리 각 사람이 이웃을 기쁘게 하되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도록 할지니라(롬 15:2).”

 

남들은 우릴 정죄할 수 있다. 우리 때문에 발생하는 일에 대하여 고발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린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가 있기로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기 위하여 말하노라(고전 15:34).”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로 저들에게 여겨져서는 안 된다. 아이로 인해 그 부모가 욕을 먹을 수 있다. 나로 인해 교회가, 교회로 인해 하나님이 욕을 당하실 수 있다. 꾸짖고 야단치는 정도로도 안 되면 일찍 그 생명을 거두어 가시는 것으로 멸망으로부터 보호하시기도 한다.

 

“우리가 판단을 받는 것은 주께 징계를 받는 것이니 이는 우리로 세상과 함께 정죄함을 받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11:32).” 나는 이 말씀을 그리 읽었다. 세상과 함께 정죄함을 받지 않게 하시려고 주께서 징계하신다. 오후께 중3 아이는 또 늦게 왔다. 장염으로 아파서 늦었다고 하였다. 뭔들, 늘 그 이유와 핑계는 끊이지 않는다. 답답한 마음이다. 일찍 아이를 돌려보내고 나야말로 마음이 우울해있었다. 한데 누가 문자를 보내왔다. 그 교회에서 한 달에 한 번 어디 교회나 개인을 위해 후원헌금을 하는데 이번 달은 우리 교회로 하게 되었다.

 

교회 소개와 사역 내용을 간단하게 적어달라고 해서, 어떻게 하게 되었는지, 하고 있는지를 정리하다가 내가 은혜가 되었다. 돌아보니 은혜 아닌 게 없어서 말이다. 그냥 죽어 마땅했을 자인데 이처럼 돌이켜 주의 일을 맡기신 게 은총이었다. 비록 한두 아이를 데리고 씨름하는 주제지만, 그것도 늘 헛발질을 해대는 것처럼 아무런 성과도 없는 일의 연속이지만, 그래서 주만 보고 할 수 있다는 게 은총이지 않나! 내가 누굴 위해 이처럼 간절하였던 적이 있었던가? 한 영혼을 천하보다 귀히 여기신다는 말씀에 두 손 들 뿐이다.

 

가정예배를 드리며 그리 특정 지을 건 아이지만 아이를 위해서도 ‘특별저녁기도회’를 하기로 했다. 딸애 퇴근시간에 맞춰 교회로 나아와 가정예배를 드리기로 했다. 이런저런 사정이 따르기는 하지만 저녁 한 끼 금식이라도 하면서. 조현병은 실은 무서운 병이다. 어차피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더더구나 조심스러운 일인데, 거기다 아이엄마까지 토요일에 오시라 했으니. 나는 모르겠다. 주가 알아서 하셔야 하는데, 우리가 할 게 기도뿐이라. 또 하는 데까지 할 수 있는 정도, 그리 해보자고 아내와 딸애에게 말했다.

 

하루가 참 길면서 고역인 나날이다. 훌훌 털어버리고 어디론가 숨고 싶었다. 뜬금없이 예전의 친구가 전화를 했다. 일 때문에 인천에 왔다가 올라가는 길에 생각이 나서 했다는 것이다. 요는 딸내미가 문학동네에서 책을 내게 되었고 어디서 이미 인정을 받아 문단에 알려지기 시작했다는 자랑을 하고 싶었던가 보다. 그러면서도 자궁에서 난포가 터져 응급실에 실려 가고, 그러기를 몇 차례여서 식겁한다는 말을 흘려버리듯 말했다. 넌 어떻게 지내냐? 하고 묻는데 나는 해줄 말이 없었다. 조만간 들르겠다는 인사를 남기고 끊었다.

 

보면 다 내남없이 설마, 하고 산다. “말하되 여러분이여 내가 보니 이번 항해가 하물과 배만 아니라 우리 생명에도 타격과 많은 손해를 끼치리라 하되(행 27:10).” 하고 말해도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다. 하긴 다들 나름 난다긴다하는 숙련된 사공에 훈련된 병사가 276명이라. 우리의 말은 괜한 소리가 되어 순풍에 돛단배에는 들릴 리 없다. “남풍이 순하게 불매 그들이 뜻을 이룬 줄 알고 닻을 감아 그레데 해변을 끼고 항해하더니(13).” 기어이 “얼마 안 되어 섬 가운데로부터 유라굴로라는 광풍이 크게 일어나니(14).” 어쩌겠나?

 

하나님이 우리를 광야로 내모시는 게 아니다. 스스로 그리 선택한 것이다. 어떻게 이러실 수 있어? 하지만 그러기까지 난포가 터져 피가 나고, 아이가 문을 걸어 잠그고 속이 곪아 썩는데도 나 몰라라 했던 일이다. 다른 여자가 생겨 집을 나간 남편에 대한 배신감에 치를 떨며 오늘까지도 이혼을 해주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고, 그러는 동안 “배가 밀려 바람을 맞추어 갈 수 없어 가는 대로 두고 쫓겨가다가(15).” 결국은 “사흘째 되는 날에 배의 기구를 그들의 손으로 내버리니라(19).” 그 귀하게 여기던 것을 다 잃고 버려야 하는 일이 발생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 인생에서 유라굴로가 복이 된다는 사실 앞에 나는 이제 아멘, 한다. “바울아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항해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24-25).” 하나님의 의도는 우리를 괴롭히시는 게 아니다. 징계를 징계로 그치게 하실 게 아니다. 그런 와중에도 우리의 역할은 분명하였다. “떡을 가져다가 모든 사람 앞에서 하나님께 축사하고 떼어 먹기를 시작하매 그들도 다 안심하고 받아 먹으니 배에 있는 우리의 수는 전부 이백칠십육 명이더라(35-37).”

 

그 잘난 줄 아는 사람들을 건사하는 일이다. 이내 “그 남은 사람들은 널조각 혹은 배 물건에 의지하여 나가게 하니 마침내 사람들이 다 상륙하여 구조되니라(44).” 주의 목적은 꾸지람이 아니다. 징계가 아니다. 채찍이 아닌 것이다. 돌이켜 “여호와는 위대하시니 우리 하나님의 성, 거룩한 산에서 극진히 찬양 받으시리로다(시 48:1).” 우리의 찬양을 받으실 것이다. 기어이 “하나님이여 우리가 주의 전 가운데에서 주의 인자하심을 생각하였나이다(9).” 생각하게 하실 것이다.

 

나는 하는 게 없는 사람이라, 주시는 바 내게 주신 연약한 몸뚱이와 말도 안 되는 상황과 이런저런 여건 가운데서도, “하나님이여 주의 이름과 같이 찬송도 땅 끝까지 미쳤으며 주의 오른손에는 정의가 충만하였나이다(10).” 하는 고백을 잃지 않는 일이다. 곧 우리는 우리에게 더하신 징계로, 그 심판으로 기뻐할 수 있다. “주의 심판으로 말미암아 시온 산은 기뻐하고 유다의 딸들은 즐거워할지어다(11).” 어떠하든 하나님은 선하시다. 선하신 이가 전혀 선하지 않은 상황을 우리 앞에 두시는 것도 선하시기 때문이다. “너희는 시온을 돌면서 그 곳을 둘러보고 그 망대들을 세어 보라(12).” 어느 것 하나 은혜 아닌 게 없었다.

 

그리하여 “그의 성벽을 자세히 보고 그의 궁전을 살펴서 후대에 전하라(13).” 내게 두신 남은 일이다. 주님 나라 가는 그 날까지, “이 하나님은 영원히 우리 하나님이시니 그가 우리를 죽을 때까지 인도하시리로다(14).”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