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내 입술이 주를 찬양할 것이라

전봉석 2018. 7. 6. 07:17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로마서 14:7-8

 

주의 인자하심이 생명보다 나으므로 내 입술이 주를 찬양할 것이라

시편 63:3

 

 

모든 게 ‘주를 위하여’라는 데서 안도한다. “날을 중히 여기는 자도 주를 위하여 중히 여기고 먹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으니 이는 하나님께 감사함이요 먹지 않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지 아니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느니라(롬 14:6).” 이와 같은 말씀이 다행으로 들리는 이유는 무얼까?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7-8).” 그러하다는 데서 비로소 감사하다.

 

그래서 다윗의 고백을 사랑한다. “주의 인자하심이 생명보다 나으므로 내 입술이 주를 찬양할 것이라(시 63:3).” 내가 살아 있는 것은 주의 인자하심 때문이다. 누구를 두고, 어떤 상황에 대해 구체적으로 주께 아뢰면서 오늘 이와 같은 말씀에서 새로운 의지를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중3 아이가 둘째 날 시험을 치르고 기분이 좋은지 내게도 문자를 하였다. 토요일 수업을 오겠다는 것이다. 하긴 국어가 91점이 나왔으니 스스로도 놀라울 따름이다. 자신도 하면 되는구나, 하는 걸 새삼 느끼는 것 같았다. 아내는 우리가 아일 위해 날마다 기도한다는 말을 넌지시 아이에게 들려주었다.

 

함께 나와 예배에도 이르렀으면 좋겠는데, 이와 같은 마음을 주께 고하였다. 초딩 4, 5학년 아이들이 한꺼번에 왔다가는 날이어서 정신이 없었다. 한 녀석은 툭, 하면 학교에 남는다. 공부가 미진하여 남기고 자꾸 이런저런 말썽을 부려서 남기고, 아이는 늦게 글방으로 와서는 싱겁게 씨익, 웃었다. 옆에서 한 녀석이 건들거리며 비웃었다. 나는 되레 그 아이를 뭐라 하고 이 녀석에게는 괜찮다, 괜찮다 해주었다. 공부는 바닥이고 말투도 어눌하여서 늘 삐딱하니 혼자 겉도는 녀석이라, 이제 우리는 아픈 데 자꾸 손이 가듯 아이를 챙긴다.

 

그런 마음일까?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7).” 오늘 말씀이 크게 다가온다. 내가 어떻게 하려고 해서가 아니라, 그처럼 되어지는 마음이어서 때론 낯설다. 씨알도 먹히지 않는 경우에는 더 이상 어쩔 수 없다는 데서 우리는 자꾸 미련을 두지 않기로 주께 구한다. 공연한 참견과 미련도 선을 이루는 데 방해가 된다. 아이를 사랑하되 이는 다 주를 위해서다.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라(9).”

 

이웃하게 된 사무실이 믿는 사람들이어서 다행이다. 아이들이 소란을 떨어도 주의를 주지 않았다. 저녁에 기도회를 할 때도 개의치 않았다. 누군가 저를 위해 기도한다는 일은 참으로 대단한 일이었다. 우리가 그래서가 아니라 누군가 우리를 위해서 그러함을 피부로 느끼면서부터 확실해졌다. 공부를 못하는 정도가 아니라 어찌 지능검사라도 받아야 하지 않나, 싶을 정도의 아이가 변하여 국어는 무려 91점이라니! 기도의 결실로 아이 안에 열심히 하려는 의지가 생겼다는 데 감사하였다.

 

“이러므로 우리 각 사람이 자기 일을 하나님께 직고하리라(12).” 날마다 주 앞에 앉아 이와 같이 행하였던 일을 주께 아뢰는 일,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출 3:14).” 저는 여호와시다. “그러므로 너희의 선한 것이 비방을 받지 않게 하라(롬 14:16).” 우리가 의식하는 것은 주님이다. “믿음을 따라 하지 아니하는 것은 다 죄니라(23).” 짬짬이 설교 원고를 작성하였다. 누구 생각이 나면 노트에 적었다.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 물이 없어 마르고 황폐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시 63:1).” 본문을 정하고 관련된 성경구절을 찾고 그 의미를 되새기며, 아이들을 마주하고 주어진 일을 마주하는 모든 게 주의 말씀이 된다. ‘나머지 공부’를 하고 뒤늦게 온 어눌한 아이를 보며 나의 유년시절을 떠올렸다. 천둥벌거숭이 같던 그때 나 또한 늘 ‘못하는 아이’여서 주눅이 들 법도 한데 씩씩하게도 잘 견디어왔다.

 

이처럼 나의 지난날을 돌아보면, “주의 인자하심이 생명보다 나으므로 내 입술이 주를 찬양할 것이라(3).” 이제는 저 아이에게 그와 같은 놀라운 소식을 보여주고 들려주어야 하는 사명을 안고 산다. 결코 누구도 구제불능은 없다. 주가 이루신다. “이러므로 나의 평생에 주를 송축하며 주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나의 손을 들리이다(4).” 어느 훗날 우리 중3 아이가 주 앞에 감사와 영광을 올리는 일을 상상한다.

 

“골수와 기름진 것을 먹음과 같이 나의 영혼이 만족할 것이라 나의 입이 기쁜 입술로 주를 찬송하되 내가 나의 침상에서 주를 기억하며 새벽에 주의 말씀을 작은 소리로 읊조릴 때에 하오리니 주는 나의 도움이 되셨음이라 내가 주의 날개 그늘에서 즐겁게 부르리이다(5-7).” 하나하나 말씀을 되짚으면 내 이야기가 아닌 게 없다. 다 나 들으라고 기록하셨다. 작은 소리로 읊조리며 주의 날개 그늘에서 즐거워하는 일, 몹시도 후텁지근하고 몸은 고달팠으나 그럼에도 노트북을 끌어당겨 본문을 나열하고 말씀을 준비하는 하는 일은 눈물겹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126:5).”

 

전에는 지겨운 말씀이더니 이제는 큰 힘이 되는 말씀이다. 밭의 농작물은 농부의 발소리를 듣고 자라면, 우리에게 맡기신 어린영혼들은 우리가 주를 부르는 기도 소리를 듣고 자란다. 식물도 그 돌보는 이의 마음을 따라 푸르러지듯 우리 곁에 두시는 아이들의 심령도 그렇게 환하게 주의 즐거움을 맛보아 알기를 소원한다. 5학년 녀석이 글을 쓰다말고, 선생님만 읽으세요. 알죠? 하면서 친근감을 드러낸다.

 

엄마는 같이 교제하는 남자를 집으로 들여 같이 산다. 아이는 친절한 아저씨가 좋을수록 떠나간 아버지에 대한 미안함이 동시에 든다. 늘 안달이 나서 이틀이 멀다하고 위경련을 앓던 아이였다. 마치 다 쏟아내듯 구구절절 자기 이야기를 하고 난 뒤 아이는 남다른 친밀감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스물여덟인 큰 누나가 어떤 나이 많은 아저씨와 동거를 하고 이를 엄마가 뭐라하자 더는 연락도 끊고 지낸다. 그 아래의 형은 군대 갔다 와서 일자리를 구할 생각은 않고 들어앉아 게임만 하다 밤에는 집을 나간다. 서로들 나이 차이가 너무 나서 과연 어떤 사연이 있는가, 나는 모른다.

 

다만 우리에게 보내신, 이제 초딩 5학년 아이를 보듬는 일이 우리 사역이다. 아이엄마는 늘 교육비가 밀려 송구해할 따름이고, 아내는 저 아이의 수입은 교회로 돌려 교육비를 채근하지 않는다. 혼자 속 끓여봐야 소용없다는 걸 이제 아내도 잘 안다. 안 되겠다 싶은 아이는 일부러 더 교회 재정으로 돌려 더는 안달하지 않으려는 것이다. 그러기까지 그 속이 오죽할까. 고난으로 순종을 배운다. 어려움이 없이는 감사도 없다. 믿음으로 하지 않는 모든 것은 죄다. 한 아이가 뜬금없이 그만두게 되었다. 그럴 거 같더라니. 우린 다만 맡기시는 아이들을 품을 뿐이다.

 

주신 삶을 묵묵히 준행하는 일, 나는 이번 로마서 12장 말씀을 준비하며 그리 주제로 삼았다.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으면 그 모두는 우상이 된다. 결과는 일맥상통한다. 모 항공사 기내식을 납품하던 57세 된 대표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난다 긴다 하는 사람들의 돈을 맡아서 관리하던 상류층 인사가 몇 십 억 달러의 손실을 내고 자살했다. 러시아 월드컵에서 한국이 독일을 꺾자 중국의 많은 도박사들이 목숨을 끊었다. 이는 모두 다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것을 숭배하며 살았던 결과이다.

 

우리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돼야 하는 게 아니다. 모세나 바울처럼, 다윗이나 베드로처럼 살아야 하는 것도 아니다. 저는 저이고 나는 나이다. 우리는 모두 예수님처럼 살아야 한다. 그럴 때 아무도 예수님처럼 살 수 없다는 걸 실감한다. 특히 마태복음 5장에 나오는 복의 근원을 살펴보면 금방 알 수 있다. 죽었다 깨어나도 우린 그 복을 누릴 수 없다. 결코 우리 스스로 심령이 가난한 자로 애통해하며 온유하게 살아갈 수 없다. 이는 예수의 성품이다. 아무도 예수님처럼 살 수 없다. 그 앞에서 우리는 우리의 결핍을 실감할 뿐이다. 은총 앞에 서는 길은 심령이 가난한 마음이다. 애통해하는 마음이다. 온유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긍휼을 바라는 마음일 뿐이다.

 

그러므로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모든 것은 우상숭배이다.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롬 12:3).” 우리의 지나친 모든 것은 숭배다. “지나치게 의인이 되지도 말며 지나치게 지혜자도 되지 말라 어찌하여 스스로 패망하게 하겠느냐 지나치게 악인이 되지도 말며 지나치게 우매한 자도 되지 말라 어찌하여 기한 전에 죽으려고 하느냐(전 7:16-17).”

 

우리는 이 모든 것에서 자유롭다. “너는 이것도 잡으며 저것에서도 네 손을 놓지 아니하는 것이 좋으니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날 것임이니라(18).” 그리하여 “그러나 우리는 분수 이상의 자랑을 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이 우리에게 나누어 주신 그 범위의 한계를 따라 하노니 곧 너희에게까지 이른 것이라(고후 10:13).” 내게 두신 연약한 육신을 가지고, 해도 해도 티도 안 나는 저 아이들을 건사하는 일. 무슨 대단한 자리에 서는 사람처럼 몇 날 며칠씩 설교 원고를 가지고 씨름하면서, 이것이 각자에게 주신 하나님의 가장 합당한 은사이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이 그 원하시는 대로 지체를 각각 몸에 두셨으니 만일 다 한 지체뿐이면 몸은 어디냐 이제 지체는 많으나 몸은 하나라(고전 12:18-20).” 그러므로 그 개개의 일에 충실할 따름이다.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나니(엡 4:7).” 그러므로 우린 하나님이 주신 다양성을 인정할 때 우상을 부술 수 있다. “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으나 모든 지체가 같은 기능을 가진 것이 아니니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롬 12:4-5).”

 

그러니까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고전 12:12-13).” 하나하나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받음으로 연결되고 결합되어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엡 4:16).” 비록 저 아이들이 교회로 나오지 않고 아직은 주의 이름을 부르지 못하는 실정이라 해도!

 

우리의 다양한 은사는 서로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혹 섬기는 일이면 섬기는 일로, 혹 가르치는 자면 가르치는 일로, 혹 위로하는 자면 위로하는 일로,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니라(롬 12:6-8).” 내가 봐도 아내는 아이엄마들을 잘 상대한다. 아이들의 면밀한 속사정을 이해한다. 나는 그저 감정만 앞서고 마음만 있어 들썽거리기 십상인데, “몸 가운데서 분쟁이 없고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 돌보게 하셨느니라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즐거워하느니라(고전 12:25-26).”

 

함께 기도회로 모이면서 이런저런 그 날의 일을 나누다보면 절감한다.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벧전 4:10).” 하나님은 획일적으로 우릴 만드시지 않았다. 곧 우리의 인생은 결코 연극이 아니다. “사랑에는 거짓이 없나니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롬 12:9).” 우리가 사랑하는 그 마음에는 거짓이 없다. 그것으로 되레 우리 속이 뒤틀린다. “이르시되 이사야가 너희 외식하는 자에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기록하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막 7:6-7).”

 

스스로 못 견뎌하는 게 그런 이유에서였다. 그러므로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요일 3:18).” 결국 우리는 거짓을 대적한다. “주의 법도들로 말미암아 내가 명철하게 되었으므로 모든 거짓 행위를 미워하나이다(시 119:104).” 이유는 간단하였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악을 미워하는 것이라 나는 교만과 거만과 악한 행실과 패역한 입을 미워하느니라(잠 8:13).” 아이엄마라 해도 아이를 함부로 대할 때 화가 난다. 그 몰지각한 자기 기준과 잣대로 아이를 소유하려 드는 걸 보면 속상하다.

 

“너희는 악을 미워하고 선을 사랑하며 성문에서 정의를 세울지어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혹시 요셉의 남은 자를 불쌍히 여기시리라(암 5:15).” 그러므로 우린 더욱 아이를 보듬을 의무를 갖게 된다. 사랑은 명령이다. 이때 우리가 취할 수 있는 행함의 근거는 소망이다. 하나님이 이루실 것이라는,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며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롬 12:10-13).”

 

먼저는 사랑하게 하신다. 내 안에 아이에 대한 이런 마음이 때론 낯설 정도이다. 다음은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듯 아이를 위로하고 격려한다. 그것으로 환난을 참고 기도에 힘쓴다. 내가 먼저 대접한다. 마음을 열어야 들어올 수 있다. 곧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롬 15:13).” 주가 주시는 마음이 아니면 모든 건 헛되다. 그래서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라(골 3:2-3).”

 

왜 그런가 했더니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약 1:3).” 오늘 나에게 두시는 육신의 고달픔이 없다면 뭔가 더 원활하게 잘 할 수 있을 것 같으나 그렇지 않았다. 그래서 더욱 간절할 수 있었다. 우리의 가난이 또는 목마름이 아이를 이해하고 위로하는 데 더 큰 유익이 되었다. 왜냐하면 “나는 하나님께 부르짖으리니 여호와께서 나를 구원하시리로다 저녁과 아침과 정오에 내가 근심하여 탄식하리니 여호와께서 내 소리를 들으시리로다(시 55:16-17).” 그래서 나는 주 앞에서 애통해한다.

 

이는 성경의 가장 쉬운 공식이었다.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잠 8:17).” 그 간절함이 나의 곤핍함에서 나왔다. 그것으로 깨어있을 수 있는 것이었다. “기도를 계속하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골 4:2).” 이렇듯 말씀 하나하나가 나의 실제적인, 나의 삶을 위한, 나를 향하신 주의 음성이라는 데서 더 무엇을 바랄 게 있겠나? 그렇지! “주의 인자하심이 생명보다 나으므로 내 입술이 주를 찬양할 것이라(시 63:3).”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