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의 순종함이 모든 사람에게 들리는지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로 말미암아 기뻐하노니 너희가 선한 데 지혜롭고 악한 데 미련하기를 원하노라
로마서 16:19
주께서 택하시고 가까이 오게 하사 주의 뜰에 살게 하신 사람은 복이 있나이다 우리가 주의 집 곧 주의 성전의 아름다움으로 만족하리이다
시편 65:4
중간고사를 끝내고 아이가 왔다. 늘 바닥이라 무력증에 시달리던 아이였다. 해봐야 소용없다고 느낄 때 만난 거여서 오늘의 변화는 놀라웠다. 뭐라 야단쳐도 이젠 그 본심을 알아 노여워하기보다 의미를 바로 알고자 하는 것이다. ‘널 위해’ 기도한다는 것.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마 26:39).” 주님도 기도를 부탁하셨다. “이에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시고(38).”
널 위한 중보가 날 위한 기도가 되어 돌아오는 것이다. “내가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딤전 1:13).” 그랬던 내가 이처럼 누구를 위해 또 아이를 두고 좋았다 나빴다, 마음이 연애하는 사람처럼 쥐락펴락하는 까닭은 그것이 우리에게 두신 사명이기 때문이었다. 하품을 쩍쩍하고 하기 싫은 걸 억지로 하는 사람처럼 굴 땐 밉기도 하고 그런 아이를 앞에 두고 있는 내 자신이 한심하게 여겨질 때도 있는데, 그래서 우리에겐 기도가 필요하였다.
내 힘으로 하는 게 아니었다.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롬 5:5-6).” 기도는 소망하는 자의 증거다. 소망이 없다면 기도도 없다. 그 소망은 연단으로 이루어진다.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3-4).”
토요일 오전, 아이도 헐레벌떡 늘어지던 잠자리를 박차고 나오는 거라 그 마음이 갸륵했다. 더 이상 가족 이야기는 쓰기 싫어요. 아이는 뚱딴지같은 말을 했다. 그래도 돼. 나의 대답은 모호했다. 그럼 뭘 쓰지? 글이란 이야기다. 이야기는 지금 온통 자기 안의 관심의 것이 나온다. 두서없이 늘어놓는 아이의 관심은 막연하여서 이야기가 되지 않았다. 그야말로 뜬구름이다. 이를 어찌 설명해주면 좋을까? 내 이야기를 쓰고 싶어요. 아이의 말에 피식, 웃음이 났다. 어떤 거? 하고 묻자 아이는 주섬주섬 이 말 저 말을 하였다. 내 이야기란 실제 그렇듯 거창하지 않다. 일반화하면 내 이야기가 아니다. 우린 얼마나 단순한지, 그 행동반경이 얼마나 제한적인지 말해주었다.
뭘 쓰든, 글을 쓴다는 것은 자기를 정돈하는 일이다. 그렇듯 신기하게도 아이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게 싫지 않다. 고작 이 중3 아이와 있는 시간이 좋아봐야 얼마나 좋겠나만. 나는 대놓고 이제 널 위해 기도한다고 말해주었다. 아이도 알고 있었다. 시험 기간에 공부방 선생님이 자신들 수업 끝내고 부리나케 글방으로 나가던 걸 여러 번 본 것이다. 우릴 위해 기도하신다고 했어요. 아이의 대답이 싱그러웠다. 이 애가 주 앞에 나와 함께 예배드리고 주일을 지키면 얼마나 좋을까?
축원이란 이런 것이다. “나의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함은 영세 전부터 감추어졌다가 이제는 나타내신 바 되었으며 영원하신 하나님의 명을 따라 선지자들의 글로 말미암아 모든 민족이 믿어 순종하게 하시려고 알게 하신 바 그 신비의 계시를 따라 된 것이니 이 복음으로 너희를 능히 견고하게 하실 지혜로우신 하나님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이 세세무궁하도록 있을지어다 아멘(롬 16:25-27).” 오라 하면 저만치 핑계를 대고 물러나 앉으니 자꾸 그러는 게 아닌 것도 같고. 그렇다고 그냥 내버려두자니 그 끝 모를 외면으로 너무 멀리 밀려나버릴 것도 같고.
우리로 복음 안에서 견고하게 하실 하나님의 영광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세 무궁하도록 함께 하기를. 결국 우리의 문안함이란 주의 복을 비는 일이다.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형제들아 기뻐하라 온전하게 되며 위로를 받으며 마음을 같이하며 평안할지어다 또 사랑과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고후 13:11).” 누군가 널 위해 기도한다. 나는 아이에게 부담을 주듯 말하였다. 이건 내 이야기다. 아이는 자기 이야기를 쓰고 싶다고 하면서 가족 이야기는 싫다고 하는 것이다. 그리곤 늘 가족들 때문에 씨름한다. 그게 네 이야기다. 말해주어도 아이는 한사코 다른 이야길 찾는다.
그렇지. 우상이란 그렇듯 하나님만 주실 수 있는 만족함을 다른 것으로 대체하여 구하고 얻고자 하는 모든 것이다. 이에 애써 수고하는 게 숭배다. 공들여 마음을 두는 일이다. 종종 은사를 은혜보다 귀히 여길 때도 있다. 어떤 재능과 능력과 행위와 그에 따른 성과를 사랑과 기쁨과 인내와 겸손과 용기와 온유보다 더 귀히 여길 때 말이다. 믿음을 구원 받았다는 가장 원론적이며 단순한 기쁨을 잃어버리는 원인이다. 아이에 대한 나의 마음이 조급하지 않기를 기도한다. 혹은 내 생에는 구할 수 없는 열매일 수도 있다.
알면서도 우리가 문안하는 것은 주께 순종함이라. 이런 소릴 해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나, 하면서도 묵묵히 또 하고 바라고 구하는 일. 오늘 본문은 이를 주지시킨다. “너희의 순종함이 모든 사람에게 들리는지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로 말미암아 기뻐하노니 너희가 선한 데 지혜롭고 악한 데 미련하기를 원하노라(롬 16:19).” 선한 데는 지혜롭기를. 곧 아이를 대하는 마음에도 지혜를 주셔야 할 일이다. 여기서 악함은 내가 나서서 어떤 성과를 내려고 하는 안달이다. 숭배가 된다. 정작 아이보다 나의 성취를 위한 것이겠다.
이쯤 마음을 두고 알게 했으면 아이도 좀 달라질 텐데, 싶다가도 누구보다 내가 거역하고 살았던 날들을 돌아보면 순간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어진다. 내가 더했다. 열배 백배는 더했다. 그랬으면서 아이가 손을 젓고 외면하는 것을 힘에 겨워한다는 게 말이 되나. 문안하라. 다시 또 찾아보고 들어주고 마음에 들여, 했던 말 또 하고 했던 말 또 하는 일이 있어도 했던 말 또 해야 하는 게 나의 일이었다. 악한 데 미련하기를, 사도의 바람은 내 안의 우상숭배를 없이하기를 원하는 거였다. 곧 나의 수고가 나의 숭배가 될 수 있다.
이에 미련해져야 할 필요가 있다. 미련하게 또 한다. 순종이란 날마다 또 똑같은 날에 똑같은 일과를 시작하는 노아의 아침이다. 여전히 구름 한 점 없는 날에, 남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잘만 살아가고 있는 이 땅에서 하나님의 심판을 대비하는 일이라니 얼마나 허황되고 어처구니없는 일이었을까? 했던 일 또 하고 했던 일 또 하고, 아무런 조짐도 없고 나아지는 것도 달라지는 것도 누가 알아주는 일도 없는데, 또 똑같은 날에 주어지는 일상을 묵묵히 준행하는 삶이 말이다. 아이가 돌아가고 순간 밀려드는 허탈감은 다시 시작해야 하는 시점을 알려주는 것 같았다. 처음 마음으로 다시 말하고 위하고 더해 기도하는 일.
“주께서 택하시고 가까이 오게 하사 주의 뜰에 살게 하신 사람은 복이 있나이다 우리가 주의 집 곧 주의 성전의 아름다움으로 만족하리이다(시 65:4).” 결코 나의 오늘은 내가 이룩한 날이 아니었다. 주가 택하시고 가까이 오게 하신 주의 뜰이다. 주가 택하시고 가까이 오게 하신 아이라면 주께서 반드시 주의 뜰에 거하게 하실 것이다. 밀려드는 졸음을 밀어내고 어쨌든 아침에 서둘러 글방으로 온 아이가 그나마 기특하고 신기한 것이다. 곧 우리가 주의 집 곧 주의 성전의 아름다움으로 만족할 날이 올 것이다. 이와 같은 소망을 주셔야 고작, 저 어린, 중3 아이 하나로, 씨름하는 일이 복되다. 이게 내 일이다. 내 이야기다.
온통 나의 관심이 글이 되는 것이다. 막연하여 뜬구름 잡는 소린 정작 와 닿지도 않는다. 힘에 겨워 씨름하면서도 놓지 못하고 사는, 우리의 관심이 온통 내 이야기인 것이다. 그걸 쓰지 않고 좀 뭔가 새로운 걸 써보고 싶다고 하는 아이의 말에 나는 그리 설명해주려던 것이었다. 그러할 때 인내를 배운다. 인내는 하나님의 성품이다. 나는 가질 수 없는 마음이나 주를 바람으로 인내하게 된다.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우리로 하여금 인내로 또는 성경의 위로로 소망을 가지게 함이니라(롬 15:4).” 이와 같은 나의 기록 또한 나를 주 앞에 바로 정돈하고자 하는 인내이다. 인내하기 위한 인내일 뿐이다. 소망을 가지게 한다.
나의 변덕스런 감정을 어찌 내가 주체하며 살까? 나는 아이에게 솔직히 말했다. 어느 날 내가 짜증이 나서 너하고 안 해, 너 오지 마! 하고 말해도 꿋꿋하게 들러붙어 있어라? 내가 말해놓고는 서로 웃었다. 결코 나는 아이보다 더 나은 게 있어서 아이의 선생이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진리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 아니라 알기 때문이요 또 모든 거짓은 진리에서 나지 않기 때문이라(요일 2:21).” 진리를 알기 때문에 때론 그 진리로 힘에 겨워도 결코 진리를 떠날 수 없는 게 된다. “그러므로 너희가 이것을 알고 이미 있는 진리에 서 있으나 내가 항상 너희에게 생각나게 하려 하노라(벧후 1:12).”
오직 진리는 하나여서 “이로써 너희가 하나님의 영을 알지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요일 4:2).” 내 안에 저 아이에 대한 연애하는 마음 같은 어떤 간절함이 나를 다시 붙들어 세우시는 일이었으니, 역설적이게도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 8:32).” 속상하면서도 즐거웠다. 답답한 규제인 것 같으나 질서 안에서의 안전함이었다. 이때 비로소 인내를 온전히 이루어 가는 것이다.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약 1:4).”
성경의 말씀은 늘 한결같다.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이시니라(5:11).” 아이를 엘리베이터까지 배웅하고 돌아설 때의 어떤, 간절함 같은! “어떻게 하든지 이제 하나님의 뜻 안에서 너희에게로 나아갈 좋은 길 얻기를 구하노라 내가 너희 보기를 간절히 원하는 것은 어떤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누어 주어 너희를 견고하게 하려 함이니 이는 곧 내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와 나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피차 안위함을 얻으려 함이라(롬 1:10-12).” 그러니까 단순히 내가 아이를 위한 것만은 아니었다.
그것으로 나도 안위함을 얻고 있었다. 새삼 이 놀라운 진리 앞에, 그래서 아이가 또한 내게도 소중하였다. 주가 알아서 하신다. “주께서 밭고랑에 물을 넉넉히 대사 그 이랑을 평평하게 하시며 또 단비로 부드럽게 하시고 그 싹에 복을 주시나이다(시 65:10).” 마치 내가 건사하는 일이었던 것 같은데, “주의 은택으로 한 해를 관 씌우시니 주의 길에는 기름 방울이 떨어지며 들의 초장에도 떨어지니 작은 산들이 기쁨으로 띠를 띠었나이다(11-12).” 주가 이루고 계심을 항상 신뢰하는 일, “초장은 양 떼로 옷 입었고 골짜기는 곡식으로 덮였으매 그들이 다 즐거이 외치고 또 노래하나이다(13).”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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