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고린도전서 2:4-5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을 주시리니 땅의 모든 끝이 하나님을 경외하리로다
시편 67:7
내 힘으로 하려고 하면 영락없다. 앞서 내 안에 드는 두려움이 나를 옥죈다. 슬그머니 아이 몰래 안정제를 입에 넣었다. 그런 의미였을까?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노라(고전 2:3).” 같이 금방 성경을 읽고 아이는 또 금세 그게 어디였는지 까먹는다. 아침에 무얼 먹고 왔는지, 지금 하려고 했던 말이 무엇인지, 순간순간 그렇듯 회로가 깜빡거리듯 아이는 기억이 흩어진다. 무슨 말을 어떻게 해줘야 할까? 뭐라 일러 가르칠 수 있는 문제도 아닌 것에 대하여.
아이엄마가 심하게 울었다. 아내가 기도회 시간을 늦게 내려와서 난감한 표정으로 말했다. 몇몇 아이들로 인해 학교에 자해가 유행처럼 번졌고 그 주범으로 지목된 서너 명의 아이들 가운데 한 아이의 엄마였다. 지난 금요일 아이 둘을 따로 만나 잘 타이르며, 그런 문제를 어쨌든 엄마에게 말씀드리라고 일렀던 모양이었다. 왜 그 위로 두 오빠 아이들에게만 관심을 둘 수밖에 없었는지. 특히 둘째 아이가 왕따였고 그래서 운동을 시키게 된 것이고 그러다보니 잘 견디는 것 같은 막내 딸아이에겐 그만큼 등한히 했던 것이고.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없을 때, 나는 그 가운데 거할 때 약하고 두려워 떤다. 어떤 유능한 전문가라고 해서 능란하게 이 일을 풀어낼 수 있다 한들, 나는 오늘 말씀으로 위로를 붙든다.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4-5).” 아이 앞에서 나는 주께 빈다. 기도를 할 때도 나는 눈을 뜨고 아이를 보면서 한다. 혹시나 하고 아이의 표정과 몸짓을 살핀다.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기 위하여.
“기록된 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하지도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9).” 내가 미처 생각하지도 못한 곳에서 주가 일하고 계신다. 의외의 신호가 오는 것이다. 실제 아이엄마는 그렇게 여린 사람이 아니다. 직접 본 적은 없으나 외모부터도 드세고, 말투도 거칠고 거침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아내를 붙들고 이번 아이 일로 펑펑 울었던 것이다. 그리고는 한다는 말이 어떻게 해서든 돌아오는 주일부터는 아이가 교회로 가게 하겠다며 잘 부탁한다는 말을 여러 번 했던 모양이다. 신기하지? 밝고 명랑하게 잘 자라주는 줄 알았던 막내딸이 혼자서 팔목을 긋고 있었다니! 아이아빠는 그런 애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가만있지 않겠다며 윽박지른 모양이었다.
우리에겐 또 다른 난제가 생겼다. 가장 심한 아이로 지목 받은 아이는 여기 아이들과 다 친하다. 그런데 학교에서 내린 결정은 격리 아닌 격리 차원으로 같이 놀지 못하게 하는 것이었으니, 아빠는 누군지 모르고 엄마는 한 달에 한 번 정해진 날에만 만나고 집에는 보모가 대신 살림을 하고 있다는데. 술집을 여러 개 한다는 소문도 있고, 누구와 재혼해서 숨겨둔 아이라는 말도 있고. 내가 어떻게 아이에게 먼저 연락이라도 해볼까? 하는 마음뿐이었으니.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안타까움도 또는 아름다움도 아니라,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2).” 어떤 결단이 필요한 때가 있다. 어떻게든 하고 싶은데 이는 낭만적인 생각이라. 그렇다고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고 오히려 ‘약하고 두려워서 심히 떨’릴 뿐인데! 그래서 바울 사도의 고백이 내 것이기를 바란다. 곧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4-5).”
우리가 일련의 일을 풀어가는 데 사람의 지혜로 하는 게 아니라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음을. 솔직히 아이가 돌아가고 나면 비로소 긴장이 풀려 마음도 홀가분해진다. 안 오면 안 와서 걱정, 오면 와서 염려, 돌아가면 안쓰러워서 찌운 한 이 마음을 어찌 내가 감당할 수 있겠나. 이게 결국 은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비밀’이실 텐데. 어찌 하시려는가? 늙은 사모는 일 년도 채 안 돼 조산원을 접으면서 시무룩하여 물건을 챙겨나갔다. 평생을 나름은 신랑 목회를 뒷바라지하고 아들과 사위까지 아직도 그 목회에 건사할 게 한두 가지가 아닌데. 눈이 마주치자 저이는 죽어가는 목소리로 인사를 했다.
하나님의 비밀, 대체 무슨 일을 벌이고 계시는 것일까? “오직 은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으로서 곧 감추어졌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7).” 이런 와중에 미리 정하신 만세 전의 영광을 운운하기가 쉽지 않다. 우리의 의도와는 너무 동떨어져서 말이다. 요나는 난감하였다.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향하여 외치라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되었음이니라 하시니라(욘 1:2).” 하나님의 명령이 상식 밖이다. 원수들 아닌가? 늘 괴롭히는 적국에 가서 복음을 전하라니! 말이 먹히지 않을 곳으로! 해봐야 소용도 없는 일인데!
내 안에 가장 큰 위험은 말을 해서 먹힐 만한 사람에게 말을 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내가 이 애한테 지금 이런 말을 해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나? 싶을 때의 절망감은 단지 난감한 정도가 아니라 한심하기까지 하다. 이런 소릴 해준다고 해서 저 엄마가 듣지도 않을 텐데. 내가 말한다고 달라질 것도 아닌데. 그러느니 차라리 하나님이 가라 하시는 동쪽 니느웨보다 나름 설득력도 있고 가능성도 있는 서쪽 끝 다시스로 가는 게 더 낫겠다. 그런 생각은 사탕처럼 달콤하다. 이상하게 보람도 느껴진다. 때론 하나님이 이상하다.
결국 모진 고생 끝에 주의 긍휼하심 앞에 자신을 되돌려 세운다. 물고기 배 속에서의 기도라니! 이제 나이 들어 제 몸 하나 건사하는 것도 힘에 부치는 조산원 사모의 억울한 심정일까? 저이가 내게 토로했던 말은 그런 거였다. 평생 자신이 일구어온 일로 여겨 은근히 세 사람의 목회에 자부심을 갖고 있던 터였다. 그런 ‘요나’가 기도한다. “거짓되고 헛된 것을 숭상하는 모든 자는 자기에게 베푸신 은혜를 버렸사오나 나는 감사하는 목소리로 주께 제사를 드리며 나의 서원을 주께 갚겠나이다 구원은 여호와께 속하였나이다 하니라(욘 2:8-9).”
비로소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여(1).” 돌이키는 장면은 극적이다. 그리고 저가 외쳐, “니느웨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고 금식을 선포하고 높고 낮은 자를 막론하고 굵은 베 옷을 입은지라(3:5).” 그 사역에 성공적인 결과를 낸 것이니 저는 또 감사와 기쁨으로 찬송해야 하지 않겠나? 사람 참, 그 속을 알 수가 없다. 자신도 자신의 위선에 속는다. 그렇게 감사하며 찬송함으로 깔끔하게 이야기는 끝났어야 옳은데, 이상하게도 나는 요나의 마음이 내 것 같아서 민망하다.
“요나가 매우 싫어하고 성내며(4:1).” 내 안에 들끓는 어떤 불편함이 있다. 그래서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러하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므로 내가 빨리 다시스로 도망하였사오니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2).” 비아냥거리는 마음도 들고 괜히 억울한 마음도 들고! 교회법인 통장을 개설하는데 뭐가 그렇게 까다로운지. 두 시간 넘게 일처리를 하면서 뭔가 못마땅해 하는 직원 앞에서 괜히 주눅이 들던 것처럼.
목사가 되었다는 이유로 글방 선생일 때와 종교인으로서의 목사와는 다르다며 선을 긋고 돌아서는 사람들을 보면서. 저들은 돌이키면 안 되는 사람들이었다. 결국 내가 전해봐야 소용없다는 생각이 입증되듯 하나님의 재앙이 내렸어야 옳다. 역으로 이쯤 했으니 저들로부터 인정을 받아야 하고, 나는 면이 서야 하고, 어떤 가시적인 결과도 있어야 옳았다. 몇 년도에 시작했는가를 묻는 질문지에 답을 쓰려고 햇수를 세다보니 9년째가 된 것이다. 만으로 따져도 8년인데, 여전히 나는 이러고 있는가! 하는 어떤 고달픔 같은 마음도 들고. 급기야 내 안의 ‘요나’는 “여호와여 원하건대 이제 내 생명을 거두어 가소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음이니이다 하니(3).”
은행에서 돌아와 눅진해진 마음으로 실의 같기도 하고 낙심 같기도 한 시무룩함에 젖어 있을 때, 요나의 이야기는 바로 나였다. 내 안의 가장 무서운 교만이 또 우상이 그런 것이었구나! 말이 통하는 사람을 원한다. 전할 만한 대상에게 전하기를 원한다. 들어주는 사람을 바란다. 말을 들어 처먹질 않는데 자꾸 거기다 대고 또 말하게 하시고 또 마주대하게 하시니 도대체 하나님을 알다가도 모르겠다. 그리 뚱해 있을 때, 아내가 헐레벌떡 늦게 내려와 아이엄마와의 통화 내용을 말해주었던 것이다. 저이가 심히 울더라.
그리곤 아이를 주일에 보내겠다니! 아, 이 비밀.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고전 4:1).” 맡은 자로 살면서 내가 더 의심에 겨워 날마다 서쪽 끝 잘 알려진 다시스로 가려고 하니! 오늘 말씀은 그런 나를 붙들어 세우신다. 툴툴거리는 내 안의 불평과 불안을 두고 말씀하신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재배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말라 버린 이 박넝쿨을 아꼈거든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가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욘 4:10-11).”
언제쯤 나는 하나님의 멋진 동역자가 될 수 있을까? 날마다 드는 의심과 회의와 갈등으로 나는 늘 불평이 많다. 두려움에 떤다. 내가 구원할 수 있는 것도 아니면서 혼자서 용을 쓴다. 그럼에도 오늘 말씀은, “기록된 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하지도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고전 2:9).” 주가 알게 하시는 이 확신. 어떤 느낌. 그 비밀에 대하여,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신 것이요 그의 기뻐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엡 1:9).”
나의 인위적인 노력이나 가시적인 성과로 판명 나는 게 아니었다. 나는 다만 말씀 앞에 앉을 뿐이다. “곧 계시로 내게 비밀을 알게 하신 것은 내가 먼저 간단히 기록함과 같으니 그것을 읽으면 내가 그리스도의 비밀을 깨달은 것을 너희가 알 수 있으리라(3:3-4).” 말씀 앞에 앉아서야 비로소 ‘아, 그랬구나! 그래서 그러셨구나!’ 하고 늘 뒤늦게 돌이켜 주의 긍휼하심 앞에 다시 또 몸을 숨길 수밖에 없는 것이다. “또 나를 위하여 구할 것은 내게 말씀을 주사 나로 입을 열어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알리게 하옵소서 할 것이니(6:19).”
이런 나 정도를 다 아시면서도 부르시고 오늘까지 사용하고 계신 것을 보면, 이 또한 숨은 비밀이 있는 것이 틀림없음을 확신한다. 그러니 ‘입을 열어’ 나는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알리게 하옵소서.’ 늘 염치없고 송구하나 또 다시 주의 말씀 앞에 붙들리는 것이다. 결국은 내가 하는 게 아니니까 말이다.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고전 2:10).” 그리하여 주께 간구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사 복을 주시고 그의 얼굴 빛을 우리에게 비추사 (셀라) 주의 도를 땅 위에, 주의 구원을 모든 나라에게 알리소서(시 67:1-2).”
이내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을 주시리니 땅의 모든 끝이 하나님을 경외하리로다(7).”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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