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여호와를 더욱 기쁘시게 함이 될 것이라

전봉석 2018. 7. 12. 07:17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

고린도전서 4:20

 

내가 노래로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하며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위대하시다 하리니 이것이 소 곧 뿔과 굽이 있는 황소를 드림보다 여호와를 더욱 기쁘시게 함이 될 것이라

시편 69:30

 

 

공연한 말은 듣는 쪽에 말거리가 되기 쉽고 말한 쪽에서는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될 수 있다. 조금은 힘에 부친 하루였다. 아이가 오전에 일찍 병원에 들렀다 왔다. 오히려 한 시간이나 일찍 온 것이다. 주치의가 휴가라 상담을 생략하고 다른 이에게 약만 타서 왔다. 유난히 피로한지 연신 하품을 하고 넋을 놓곤 하였다. 그럴 때마다 나는 찌릿, 하여 아이를 살폈다. 다음 날부터 2박3일 동안 어느 교회로 어린이 봉사를 떠나기로 했다. 그래서 주말에 가는 병원을 미리 서둘러 다녀오게 하였던 것이다.

 

혹시 누가 좀 아는지. 그 청년부에서 친하게 지내는 누가 아이 상태를 알고 같이 도움을 청하고는 있는지. 담당 전도사나 부목사가 혹시 알고 있는지. 나는 아이에게 조심스럽게 물었고 아이는 단호하게 ‘그런 건’ 싫다고 했다. 엄마도 그렇고 자신도 굳이 누가 알기를 원하지 않는다는 요지였다. 나는 교회 안에서 서로가 나누고 위하여 도움을 청하기도 받기도 하는 것이라 설명을 하는데, 그런 내 말에 아이는 오히려 시무룩하여 횡설수설 말이 길어졌다. 말은 겅중거리며 중학교 때 이야기를 하다 고등학교 때 이야기를 하였다. 그런 걸 누가 알면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설명하고 싶었던가보다.

 

생각 같아서는 그 교회 청년부 목회자와 통화를 하고 아이의 그런저런 상황을 말해주고 싶었는데, 피로하지 않게 조심하고 약을 꼭 챙겨 먹어야 한다는 말로 당부하고 말았다. 한 시간 일찍 왔어도 이런저런 말로 원래대로 열한 시에나 성경공부를 할 수 있었다. 우리는 같이 요한복음 15장을 읽었다. 아이가 몇 구절을 읽으면 그 의미를 설명하는 식이다. 그 가운데 와 닿는 말씀을 표시했다가 마치 같이 앉아 글씨로 썼다. 그러면서도 아이는 깜빡깜빡 시선을 놓치곤 하였다.

 

한참 당구에 재미가 들려서 얼른 점심을 먹고 당구장엘 가자고 하였다. 전날부터 허리가 아파서 안 갔으면 했는데 어쩔 수가 없었다. 당구를 치면서도 아이는 멍을 때렸다. 그럴 때마다 나는 얘, 하고 주의를 환기시키고 내가 먼저 오싹한 듯 찌릿찌릿하였다. 아이가 돌아가고 나는 다시 당구장에 가 주인 남자에게 아이에 대해 넌지시 말해두었다. 생활스포츠강사 자격증도 있고, 늘 가던 곳이라 안면이 있었다. 우리가 가는 시간에 주로 우리들밖에 없지만 다소 어수선하게 소란을 피워 몇 번 눈치가 보이던 차였다. 혹시 아이가 혼자 오게 되면 그런 점을 알고 잘 가르쳐줄 것을 당부하였다. 주인도 대충 눈치로 알고는 있었다고 했다.

 

아이가 돌아가고 나 역시 병원에 가서 약을 받았다. 가고 오는 길이 너무 멀게 느껴졌다. 후텁지근하여 걸음이 천근만근이었다. 돌아와 숨 좀 돌리고 있을 때 오랜만에 친구와 통화를 했다. 전날에 한 친구가 캐나다로 이민을 떠났다. 잠깐 얼굴이라도 보고 가려했는데 그렇지 못했다고 대신 말을 전했다. 신대원 때 한 학기 등록금을 내어준 친구였다. 어떤 서운함이 밀려들었다. 넌 어떠냐? 하고 묻는 친구 말에, 이처럼 근황을 말해주었다. 목사가 무슨, 고행 길이냐! 친구는 다소 냉소적으로 뒷말을 흐렸다. 저의 위로 두 형님이 목회를 하고 있었다. 그에 대한 반감이 느껴졌다. 괜한 소릴 했다.

 

“내가 곡하고 금식하였더니 그것이 도리어 나의 욕이 되었으며 내가 굵은 베로 내 옷을 삼았더니 내가 그들의 말거리가 되었나이다(시 69:10-11).” 공연한 말은 안 하니만 못하다. 친구여서 조금은 편하게 있는 그대로 말했던 것인데, 저는 듣고 반감을 느꼈고 나는 말하며 은근히 누가 뭘 좀 알아주길 바랐던가보다. 다른 이런저런 이야기가 오갔지만 그 느낌만 남은 통화였다. 괜히 울컥하여 마음이 심란해졌다. 붓을 먹물에 적셔 글씨를 썼다. 아이 때문에 같이 시작하게 된 게 나의 큰 위안이 되었다.

 

한참 모양을 내듯 자음과 모음을 꾸미고 있으면 어느새 마음은 그 의미를 되새기고 있다. 누구에게 위로 받으려던 생각이 틀렸다. 아무리 친구라지만, 어제도 그렇고. 믿음으로 신앙 안에서 주의 마음으로 바라보지 못하는 경우에는 말할 거 없다. 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동정만 사고 공연히 또 내 마음도 우쭐하는 것이다. 누가 알아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컸다. 조금 힘든 하루여서 넋두리처럼 늘어놓은 말이었는데 푸념이 됐다. 안 해도 될 말이었다. 말해놓고 불편해졌다. 그런 내게 오늘 말씀은 일침을 가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고전 4:20).” 내가 덧붙여 설명할 것도 없고 이루어 나타내야 할 말도 아니다. 이 일은 부르심을 받은 자의 소명이다. 소명이란 부르신 자의 뜻만 헤아리면 될 일이다. 주만 보고 가면 되는 일이다. 충성만 있으면 된다.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1-2).” 내가 친구에게 말한들, 저가 기도하는 사람이 아닌 다음에야 그 말이 그저 위안이나 동정이나 뭔가 대단히 여겨주는 것뿐이지 않나. 그랬구나. 기도하는 사람이 아닌 다음에는 같이 말할 내용이 아니다.

 

도리어 말거리가 될 뿐이다. 웃자고 한 말을 죽자고 덤벼도 문제지만 죽자고 한 말을 웃자고 들어버리면 것도 낭패다. 그러니 주의 뜻을 구하며 함께 기도하자는 결론을 도출해야 하는데 엉뚱하게도 나를 칭찬한다거나 ‘목사가 무슨, 고행이냐?’ 하는 따위의 빈정거림을 들어야 할 소리는 아니다. 우리가 같이 주님, 하고 주의 이름을 부르면 될 일인데. 나는 아이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아이의 그런 점을 교회에 알리고 함께 기도해야 한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저이도 이를 상당히 꺼리는 것이라, 그 마음은 알겠는데 아이까지 그처럼 누가 알기를 바라지 않는다는 데서 놀랐다. 남들이 아니라 교회에도 말이다.

 

나는 무엇이 옳은지. 가만히 있어야 하는지. 나서서 아이가 다니는 교회에 알려야 하는지. 그 엄마에게 말해야 하는지. 심란한 마음으로 글씨를 썼다. “누가 너를 남달리 구별하였느냐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 같이 자랑하느냐(고전 4:7).” 이미 받은 것 중 칭찬이 없겠나, 동조가 없겠나. 돌이켜보니 아무리 친구라 해도 내 안에 우쭐하여 나타내고자 하는 자랑이었던 것이다. 어떻게 지내? 할 때 마치 생색을 내듯 그러저러하게 말해주어야 할 것처럼! 이런 게 괜한 말이었다.

 

나의 모든 건 이미 주님이 다 알고 계신다. 나를 엄마의 모태에서부터 살피셨다. “그러나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그의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갈 1:15).” 오늘의 나를 모르실 리 없다. 아,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 일에 대하여 혈육과도 괜한 말을 나누지 않았다는 소리구나! “그의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셨을 때에 내가 곧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고 또 나보다 먼저 사도 된 자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지 아니하고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갔노라(16-17).” 평생 나를 빚으신 이가 하나님이시다.

 

오늘 여기에 두시려고 창세 전부터 예정하고 택하신 일이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창 1:4).” 이게 결국은 누굴 위한 게 아니라 나를 향하신 주의 온전하심이다. 나의 실패와 좌절까지도 주가 주관하신다. 낙심과 실망까지도 주는 아신다. 나를 어머니 태에서부터 택정하신 이시다. 한데 그런저런 소릴 기도하는 사람이 아닌 이에게 말하여서는 무슨 말을 들을지 빤한 것을 새삼 알았다. 요셉도 이를 잘 알고 있었다. 저가 견딘 힘이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창 50:20).” 이를 아는 자가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이다. 부르심의 소명이다.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시는 데 있어 도구로 쓰임 받은 일이다. 나병에 걸린 이방 나라 나아만 장군을 통해 그 땅에 복음을 들려주기 위해, 앞서 잡혀와 그의 아내의 몸종으로 지내던 어느 이름 없는 이스라엘 소녀의 증언처럼, 세례요한의 표현처럼, 우리는 다만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이면 족한 것이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내가 이만한 인물이 돼서 그런 걸까? 왜 하필 나일까? 내가 할 수 있는 게 너무 없는데도 어째서 주는 나를 부르신 것일까? 이는 순전히 하나님이 그걸 기뻐하셨기 때문이다!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셨을 때에(갈 1:16).” 그는 내 안의 성령이다. 그리스도시다. 하나님이시다. 이를 다만 사랑하심에서다.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기 때문이 아니니라 너희는 오히려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신 7:7).”

 

내가 무얼 좀 남다르게 잘해서, 나은 게 있어서, 어떤 자격이 되어서 이 일의 일꾼으로 삼으신 게 아니라는 소리다. 또는 내가 마치 고행을 하듯 목사니까 이 정도는 감수해야 한다는 직유적인 이해로도 어림없다. 그런 게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이 나를 기뻐하셨기 때문이다. 왜 그런지는 나도 모른다. 어째서 나를 좋아하시고 기뻐하시는지 나는 모른다. 다만 “여호와께서 다만 너희를 사랑하심으로 말미암아, 또는 너희의 조상들에게 하신 맹세를 지키려 하심으로 말미암아 자기의 권능의 손으로 너희를 인도하여 내시되 너희를 그 종 되었던 집에서 애굽 왕 바로의 손에서 속량하셨나니(7).” 사랑하심으로 말미암아서이다.

 

그 사랑, 내 안에 예수님을 나타내시는 일이다. ‘그의 아들을’ 저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먼저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셨을 때에 내가’ 지금 이 일에 참여하고 있는 것이었다(갈 1:16). 때론 이 시간이 고독하다 해도, 아무도 알아주지 않을 뿐 아니라 자칫 뭐라 말하면 동정하거나 말거리가 되어 엉뚱한 쪽으로 해석하여 자신들의 의견을 덧붙이기 일쑤이니! 그럼에도 사도는 자신을 알아주는 예루살렘으로 가려는 게 아니라 아라비아로 간다. “또 나보다 먼저 사도 된 자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지 아니하고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갔노라(17).”

 

주를 만난 그 자리, 주가 날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그 자리, 아브라함이 그의 아들 이삭을 바친 그 자리로 간다. 그 이유는 단 하나였다. “나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24).” 아! 그 이유가 분명하여서 나의 괜한 말이 발목을 잡을까 주의할 필요가 있겠다. 공연한 누구의 동조나 괜한 칭찬으로 마음이 혼용될까 조심해야 한다. 바울은 그럴 때 스스로에게 물었다.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10).”

 

그렇지. 내가 오늘 ‘사람을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되새기며 물을 말씀이다. 결국 내가 누구를 의식하고 저들의 칭찬을 구하는 일은 엉뚱한 데서 위로를 얻으려는 것이다. 괜한 말이 된다. “사람을 두려워하면 올무에 걸리게 되거니와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안전하리라(잠 29:25).” 주를 의지하자. 어찌 됐든 감당할 수 있는 만큼 더하신다. 내가 할 수 있는 정도면 족하다. 주만 보고 가자. 하나님을 경외하는 데 가장 큰 걸림돌은 사람을 의식하는 데 있었다. 누가 뭐랄까, 어떤 평가를 또는 기대를 갖는 마음이 주범이었다.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고전 4:20).” 명심하고 또 붙들어야 할 말씀이다. 그러므로 “주의 집을 위하는 열성이 나를 삼키고 주를 비방하는 비방이 내게 미쳤나이다(시 69:9).” 그렇다 해도, “여호와여 주의 인자하심이 선하시오니 내게 응답하시며 주의 많은 긍휼에 따라 내게로 돌이키소서(16).” 나는 주만 바라기를. “내가 노래로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하며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위대하시다 하리니 이것이 소 곧 뿔과 굽이 있는 황소를 드림보다 여호와를 더욱 기쁘시게 함이 될 것이라(30-31).”

 

곧 “여호와는 궁핍한 자의 소리를 들으시며 자기로 말미암아 갇힌 자를 멸시하지 아니하시나니 천지가 그를 찬송할 것이요 바다와 그 중의 모든 생물도 그리할지로다(33-34).”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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