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자신을 속이지 말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이 세상에서 지혜 있는 줄로 생각하거든 어리석은 자가 되라 그리하여야 지혜로운 자가 되리라
고린도전서 3:18
의인은 기뻐하여 하나님 앞에서 뛰놀며 기뻐하고 즐거워할지어다
시편 68:3
팀 켈러는 <내가 만든 신>에서 우리 안에 어떤 우상이 있는가? 스스로 알 수 있는, 진단할 만한 질문을 몇 개 던졌다. 첫째, ‘혼자 있을 때 하는 게 신이다.’ 윌리엄 템플의 말이다. 남들 앞에서가 아니라 주로 혼자 있을 때 즐겨하는 게, 내 안에서 신 노릇을 한다는 거였다. 둘째, 돈을 주로 어디에 어떻게 쓰는지를 보면 안다. 이는 예수님도 일러,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둑질도 못하느니라(마 6:21).” 어디에 투자하고 무엇을 소비하며 어떤 궁리를 하느냐는 것.
이는 덧붙여 우리가 주로 하는 말을 들어보면 알 수 있다. 지식이 무엇에 쏠려 있는가를 봐도 알 수 있다. 무엇을 간절히 바라는 하는 일에서도 나의 사랑이 어디로 향해 있는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오직 너희는 믿음과 말과 지식과 모든 간절함과 우리를 사랑하는 이 모든 일에 풍성한 것 같이 이 은혜에도 풍성하게 할지니라(고후 8:7).” 우리 안에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나의 진짜 신으로 모시고 산다면, 이를 입증하는 삶이 필요하다. “내가 명령으로 하는 말이 아니요 오직 다른 이들의 간절함을 가지고 너희의 사랑의 진실함을 증명하고자 함이로라(8).”
셋째는 하나님은 기도에 응답이 없으시고 우리는 낙심에 들었을 때, 희망은 꺾이고 슬픔이 나를 둘러쌌을 때 과연 우리는 어떻게 반응하는지 보면 우상의 진위여부를 알 수 있다. 결국 하나님을 믿는다면 힘들어도 주를 바라며 주께 맡기고 다시 헤쳐 나가게 된다. 그런데 요나처럼 “여호와여 원하건대 이제 내 생명을 거두어 가소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음이니이다 하니(4:3).” 하는 것은 그의 신념이 또는 나름의 목적과 이유와 열심이 하나님을 대신하였다는 증명이다. 저는 이내 회개하고 주 앞에 섰을까? 성경은 다음 말씀이 없다. 나는 종종 요나의 다음 이야기를 상상하면 소름이 돋는다. 설마, 그는!
넷째, 자기감정을 보면 안다. 화가 나면 그 근본적인 이유가 무엇인지, 고통스러우면 그 고통의 기저에 무엇이 깔려 있는지를 보면 된다. 그게 왜 그렇게 중요한지? 그렇게, 그만큼, 화가 나고 실망이 오고 고통스럽기까지 한 근본적인 이유가 무엇인지 말이다. 우리가 너무 즐거워하는 일, 또는 심하게 두려워하는 문제, 죄책감, 절망의 경우에서 우리가 의지하고 살았던 우상의 실체를 확인할 수 있다. 늘 되새기는 문제지만 관심의 정도가 신의 자리다. 내 이야기가 온통 어떤 이야기로 채워져 있는가 하는 문제와도 같다.
아이가 쓸 게 없어 힘들어하는 건 쓸 얘기를 쓰고 싶지 않아서이다. 마주하기 싫은 자기 이야기가 실은 자신의 실체가 되기 때문이다. 이를 회피하느라 자신을 일반화시킨다. 낭만적인 문제로 주제를 삼는다. 너무 멀리 놓고 희미하게 자신을 본다. ‘양치기 소년’ 같다. 속된 말로 사람 간을 보듯이 그만 쓸까 봐요, 공부방을 옮겨볼까 봐요, 하는 식으로 상대를 조종하려 든다. 그럴 수 있는 게 그래도 되는 건 아니다. 앞서 모처럼 친구가 와서 같이 점심을 먹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갔다.
여기서도 느끼는 피로감은 서로 다른 데를 보는 일이다. 같은 문제를 놓고 다른 것을 말한다. 가르치는 아이가 어릴 때부터 틱 장애가 있었고, 우울증이 있어 폭식까지 겹쳤다. 우리는 범사에 주를 인정하는 사람들이다.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잠 3:6).” 그 아이를 우리 곁에 붙이신 것은 반드시 주의 뜻이 있으심이다. 그래서 우린 ‘어쩔 수 없어’ 기도회를 한다고 했더니, 저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 부모는 남녀호랑개교라 했다. 벌써 어떤 의미인지 알겠는데, 저는 그런 거에는 별로 관심이 없고 그저 오래된 아이에 대하여 이도저도 ‘어쩔 수 없는’ 안타까움만을 토로하였다.
그런 쪽으로의 생각을 마다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유난히 우리 곁에만 ‘이상한 아이들’이 있다는 소릴 하였다. 나는 그렇지 않았더라는 데 공들여 말해주었다. 늘 있었다. 예전에도 우리 곁에는 힘들어하고 아파하는 아이들이 있었다. 상한 영혼으로 그 심령이 병들어 있는 아이들이 있었다. 다만 그때는 관심이 없었을 뿐이다. 하나님을 찾지 않고 내가 알아서 하겠다고 굴던 시절이다. 못 따라오면 도태되는 것이다. 수업 분위기를 망치면 그 애를 따로 뺀다. 주의를 주고 다른 방도를 지시한다. 심지어는 엄마를 불러 데려가게도 했다. 같이 하던 아이들까지 팀을 깨기도 했다. 안 보면 그만이었다.
아내는 요 며칠 아이들 엄마와 통화를 하며 위로하고 또는 저의 끝도 없는 푸념을 들어주기도 한다. 언제 우리가 이처럼 아이들의 사생활에 깊숙이 관여한 적이 있었던가? 회피하는 게 능사였다. 책임전가를 하면 그만이었다. 외면하고 말면 될 일이었다. 늘 우리 곁에는 세리와 창녀와 고아와 과부가 있었는데 우리는 애써 저들을 몰랐던 것이다. 친구는 동의하지 않았다. 뭘 꼭 그렇게까지! 하며 선을 그었다. 교회를 다니고 나름 믿는다고 믿음을 확신하면서도 주변 이야기로 족하였다. 에둘러 다른 데 자꾸 시선을 두는 거였다.
왜일까? 내가 보이기 때문이다. 실은 내 이야기여서 말이다. 죄의 모양은 각각 다른 것 같으나 그 근본은 하나여서, 십계명의 나머지 아홉 계명은 첫 번째 계명을 어기면 모두 어기는 게 된다. ‘나 외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 이는 유일하신 하나님의 원리다.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나니 나 밖에 신이 없느니라 너는 나를 알지 못하였을지라도 나는 네 띠를 동일 것이요 해 뜨는 곳에서든지 지는 곳에서든지 나 밖에 다른 이가 없는 줄을 알게 하리라 나는 여호와라 다른 이가 없느니라(사 45:5-6).”
여전히 결혼은 생략하고 동거를 하는 이와 저의 무신론적인 지론에 기대 살면서 일주일에 하루 교회에 가고, 모태신앙을 자부하는 꼴이어서 과연 저이의 신이 하나님이시기는 한 건가? 답답하였다. 그렇듯 답답하다가도 그게 나였다는 데 통회한다. 그처럼 한사코 하나님과 결부시켜 어떤 일이나 고민을 마주하는 일은 싫다. 너무 빤한 답 같고, 결국은 그 소리가 그 소린 거 같아서, 기-승-전-하나님으로 이어지는 논리를 못 견뎌 했었다. 그러니 어쩔 것인가? 그러면서 우리는 기도를 하고 주의 이름을 부른다.
“아무도 자신을 속이지 말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이 세상에서 지혜 있는 줄로 생각하거든 어리석은 자가 되라 그리하여야 지혜로운 자가 되리라(고전 3:18).” 오늘 말씀은 거두절미하고 우리의 자세를 바로 하게 한다. 저들의 그런저런 삶을 하나님 앞에서 경계하고 옳지 않은 것으로 인정하지 못하는 까닭은 나도 결국 다를 바 없어서이다. 그러니 회피보다 좋은 해결책은 없다. 에이, 뭘 꼭 그렇게까지! 영적인 문제로 보기는 싫은 것이다. 살다보면 다 그렇지 뭐, 하면서 굳이 하나님이 없어도 되는 선에서 이해하려 든다.
결국 예수 그리스도 외에 내 마음에 신뢰하는 것과 몰두하는 것과 충성하는 일과 열심과 노력과 두려움과 애씀의 모든 출처는 우상이다. ‘나 외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는 계명을 보란 듯이 파기하는 것이다. 스스로 하나님이라 부르는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모시고 살고 싶지는 않은 것이다. 사실상 자신에 대한 소유권을 그대로 자신이 차지하고 있으려는 동안은 결단코 우리 안에 하나님이 주인이시지 못하다. 허울뿐이다. 습관적으로 주일을 지키고, 스스로 믿는 사람이라 여기는 것뿐이다.
이 모든 게 한 마디로 탐심 때문이다.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골 3:5).” 어떻게 죽일 수 있을까? 앞서 바울은 그 방법을 제시하였다. 첫째, 위에 것을 찾으라.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1).” 우리 뜻을 이 땅에 두고 사는 것이 아니다.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2).” 둘째, 나는 죽었고 나의 생명이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다.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라(3).”
더는 내 주장이나 내 생각이 앞서지 않는다. 내 판단이나 내 형편이 우선이 되지 않는다. 우리가 바라는 한 가지는 셋째, 주의 영광이다.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4).” 내가 무엇을 하든지 주의 영광을 위해 하는 것. 사나 죽으나 이젠 주의 것으로 사는 일. 이 모든 일의 주관은 하나님이시라는 것. 그러므로 우리가 구할 것은 주의 은혜밖에 없음을, 은혜 앞에서는 나의 빈손이면 족한 것이다. ‘나의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감추어져 있다’는 데서 나는 안도한다. 감사한다. 그리하여 회개와 기쁨은 함께 있다. 주님, 하고 부르면 어느새 기쁨이다.
“의인은 기뻐하여 하나님 앞에서 뛰놀며 기뻐하고 즐거워할지어다(시 68:3).” 이게 결코 괜한 구호가 아니었다. 어떤 다짐이나 목표도 아니었다. 일상이었다. 뭘 꼭 그렇게까지! 하고 선을 긋는 친구와 달리 나는 ‘그렇게까지’가 아니라 ‘그 이상까지’도 주의 것이다. 주가 이루신다. 기도회를 하고 올라와 서너 명의 아이엄마들과 연달아 통화를 하는 아내를 보며, 그게 우리 사역이라. 저들이 무슨 신을 믿든 혹은 무신론자로 살든, 어떤 추악함과 더러움으로 점철이 돼 있든, 오늘 우리 곁에 두시는 아이들이라.
‘늑대가 나타났어요.’ 하는 아이의 엉뚱한 소리에서 열 번 백 번 또 달려가 주는 게 우리의 일이었다. 빤히 거짓말인 것을 알면서도 그 속에서 오죽하면 또 저럴까, 하고 주의 마음으로. 세 번씩이나 주를 모른다, 부인하고 맹세까지 했던 이에게도 세 번씩이나, “세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이르되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양을 먹이라(요 21:17).” 우리는 주의 양을 먹이는 사람들이라.
결국 나는 할 수 없어서 할 수 없는 마음 그대로 애통해 하며 주를 바란다. 심령은 가난하여지고 그만큼 나는 주 앞에서 온유하여지는 것이다. 여전히 이는 짜증과 속된 말로 꼴도 보기 싫은 마음까지도 다 주 앞에 내어놓으며. “아무도 자신을 속이지 말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이 세상에서 지혜 있는 줄로 생각하거든 어리석은 자가 되라 그리하여야 지혜로운 자가 되리라(고전 3:18).” 오늘 말씀 앞에서 주의 이름을 부른다. “그런즉 누구든지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 만물이 다 너희 것임이라(21).” 곧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니라(23).”
그리하여 “하나님께 노래하며 그의 이름을 찬양하라 하늘을 타고 광야에 행하시던 이를 위하여 대로를 수축하라 그의 이름은 여호와이시니 그의 앞에서 뛰놀지어다(시 68:4).”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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