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하나님은 위대하시다 하게 하소서

전봉석 2018. 7. 13. 07:16

 

 

 

밖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심판하시려니와 이 악한 사람은 너희 중에서 내쫓으라

고린도전서 5:13

 

주를 찾는 모든 자들이 주로 말미암아 기뻐하고 즐거워하게 하시며 주의 구원을 사랑하는 자들이 항상 말하기를 하나님은 위대하시다 하게 하소서

시편 70:4

 

 

<잠언으로 돌아보는 자기 이야기>를 하였다. 자꾸 책을 읽으라고 권해봐야 소용없고, 모든 글의 소재는 자기 이야기에 있다고 해도 모르는 일이어서 안 되겠다싶었다. 같이 잠언을 한 장 돌아가며 읽었다. 그 가운데 한 구절, 마음에 와 닿는 것을 옮겨 적게 하였다. 그 의미를 자신이 이해한대로 설명하고 이를 자기 생활 속의 이야기와 연관지어서 쓰게 하였다. 생각보다 진지하였고 질문은 자연스러웠다. 내친김에 중학교 아이들과는 덧붙여 3분, 혹은 5분 말로 설명하게하는 시간도 가졌다.

 

말로만 듣던 중1 아이가 처음 왔다. 아이는 온순하며 생각보다 밝았다. 얼뜬 것 같이 맹한 구석이 있기는 했다. 늘 걸어 다니거나 버스로 몇 정거장 되는 학교에서 돌아오면서 다른 버스를 타서 한 바퀴 돌고 오느라 우리를 모두 긴장시킨 것 말고는! 아니나 다를까, 아이엄마는 일 끝내고 늦은 시간에 아내에게 전화를 걸어 푸념인지, 신세한탄인지 아이를 정신과치료를 받게 해야겠다는 둥 그 날 있었던 일에 대해 맹한 것을 두고 그리 지겨워하며 소란을 피웠다. 내가 보기엔 아이엄마가 중증이었다. 아무 문제없는 부부 사이처럼 자꾸 아이아빠를 들먹이며 ‘그이가 그러는데’ 하는 식으로 말을 끌어가 당황스러웠다고 했다.

 

저 둘은 이혼을 하였고, 사귀는 남자가 있었으며, 아이들은 그 아저씨를 그냥 아빠라고 부른다(그렇게 부르라고 시켰다). 언니는 며칠째 가출을 하였고 엄마는 종종 아저씨와 같이 있느라 집을 비운다. 아이가 들려준 말이다. 그런데 아이엄마의 표현은 다른 것이다. 아내는 열한 시를 훌쩍 넘겨 통화를 끝내고는 아이가 왜 그처럼 주눅이 들고 어리숙한지 알 것 같다고 하였다. 정신과 치료 이야기는 벌써부터 있었다고 하는데, 우리가 보기에는 죄다 부모들이 먼저 치료를 받아야 할 것 같다.

 

아이와 아이들 사이에 있는 일을 보면 알 것 같다. 같이 끝나고 PC방에서 한 시간 놀기로 한 아이가 어떤 이유로 약속을 깼다. 그 애가 시큰둥하여 시무룩하니까 중1 두 아이가 그럼 언니랑 같이 수업 끝나고 한 시간 놀기로 하면서 신나게 수업을 했다. 그런데 끝나고 엘리베이터 앞에서 PC방에 못 가 시무룩해 한 중3 아이가 갑자기 피곤하다며 그냥 집엘 가겠다는 것이다. 오죽하니 나는 중1 아이 둘을 보며, 중3 아이가 먼저 말을 꺼낸 것이니까 같이 한 시간만 놀다가라고 참견을 하였을까. 아이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귀찮은 표정을 지으며 가버렸다. 참나,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아이는 그래서 왕따였다.

 

이래저래 어찌 더 관여할 수 없는 문제 앞에서 나는 난처하다. 아이들이 다 돌아가고 순간 피로감이 몰려왔다. 소파에 눕자 곤히 반시간은 잠든 모양이다. 땀이 흠뻑 젖어서 깼다. 점점 기도 제목만 늘어가는 것 같다.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하나도 성과는 없으면서 우리는 자꾸 난감하다. 나름 공들였던 형제 아이들이 뜬금없이 그만두었다. 얼마 전 학교 앞에서 드론을 사은품으로 주는 무슨 학원으로 옮긴다고 하였다. 그 중 작은 아이가 마지막 수업을 하고 갔다. 아이는 아직 그만두는 걸 몰라 뭐라 변변하게 인사도 하지 못했다.

 

다윗의 절규하는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하나님이여 나를 건지소서 여호와여 속히 나를 도우소서(시 70:1).” 한다고 하는데 그게 아니었나? 그렇듯 허무하게 서로 없는 사이가 되면 나는 당황스럽다. 평생을 나는 이별이 어렵다. 공들인 만큼 아쉬움이 크다. “아하, 아하 하는 자들이 자기 수치로 말미암아 뒤로 물러가게 하소서(3).” 그러게, 뭘 그렇게까지! 내 안에 드는 낭패감은 나를 몰아세운다. 중1 아이는 잠언을 읽는데 쌜쭉하였다. 종교적인 것을 운운하는 표현이어서 탈무드를 쓴 이의 책, 세계적인 베스트셀러를 운운하여 설명하다 화딱지가 났다. 잠시 멈칫하다 밀고나갔다.

 

교회 밖의 사람들에 대하여 그 완고함에 치가 떨린다. 혼자 아이를 키우느라 애 엄마는 더욱 엄격하다. 못 가게, 못 나가게, 못 하게 하는 게 너무 많다. 아이는 또 그런 엄마가 안쓰러우면서 그 생활에 안주하여 별로 반항하지 않는다. 아이 외할머니는 이혼까지 한 아이아빠에 대한 미움 때문인지 그렇게 애를 닦달한다. 아이는 두 어른 여자들의 등살에 종종 화가 치밀어, 그 애 핸드폰은 만신창이가 되었다. 집어던지고 책상을 내리치고 하느라, 가늘고 촘촘하게 실금이 가 있는 액정화면이 그 진상을 말해주는 것 같았다.

 

“밖에 있는 사람들을 판단하는 것이야 내게 무슨 상관이 있으리요마는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야 너희가 판단하지 아니하랴(고전 5:12).” 우린 그래서 주의 이름을 부를 수 없는 아이들을 위해 기도한다. 그 부모의 얼토당토않은 삶에 대하여는 일일이 열거할 수도 없는 일이지만, 하나님이 우리에게 두시는 동안은 대신 신앙으로 부모 역할을 해야 한다. 둘 중 누구 하나의 말을 들어야 한다면 아이 편의 것을 듣기로 했다. 능청스런 아이엄마의 아무렇지도 않은 듯 한 태도에 아내는 혀를 내두른다. 우리가 상대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밖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심판하시려니와 이 악한 사람은 너희 중에서 내쫓으라(13).” 우리가 우리 곁에 보내신 아이에 대하여는, 맡기시는 동안은 일러 주의 살아계심을 알려야 한다. 은연중에 우리가 저의 하나님이 되어야 한다. 우리의 살과 피를 나누는 일이다.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되셨느니라(고전 5:7).” 오늘 말씀은 이를 다시금 깨닫게 하신다. ‘오직 순전함과 진실함의 떡으로 하자.’ “이러므로 우리가 명절을 지키되 묵은 누룩으로도 말고 악하고 악의에 찬 누룩으로도 말고 누룩이 없이 오직 순전함과 진실함의 떡으로 하자(8).”

 

이는 주가 기뻐하시는 일이다. “하늘로부터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막 1:11).” 그 이유는 내 안에 예수가 계시기 때문이다.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갈 1:12).”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 “그의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셨을 때에(16).” 일이다. 안 믿는 가정에서, 하나님을 부인하고 사는 부모들에게서 아이들을 우리에게 맡기신 것이다. 이 말씀을 전하게 하시려고, 예수 그리스도를 내 안에 나타나게 하시기를 기뻐하신다.

 

그러니까 우리가 한숨을 짓고 염려와 근심으로 시달리는 것 같지만, 아이들로 인하여 우리들로 하여금 기도하게 하신다. 저녁에 모여 누구 이야기를 하고 그 애가 어땠는지, 그 부모는 또 어떠한지, 기도하기에 앞서 우리가 하루 아이들을 대하면서 있었던 일을 두고 말을 나누다보면, 기도밖에는 답이 없다. 여기저기 기도를 부탁하고 싶은 심정뿐이다. 주가 아니시면 이 아이를 어쩔 것인가? 하나님이 우리 속에 ‘그를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셨을 때에’ 그는 예수시라. 우리 안에 두시는 마음은 예수의 마음이라. 나는 이제 확신한다.

 

매일 그 아이가 그 아이인 것 같고, 그 일이 그 일인 것처럼. 참 이상하다 싶게 이상한 아이들의 이상한 이야기 속에서 나는 길을 찾는다. 여러 책을 권하기도 하고 이렇게 저렇게 아이들에게 맞는 주제를 달리하며 글로 써보게 하지만 매일 똑같은 타령이어서. ‘나도 모르겠다.’ 하는 심정으로 잠언을 읽히고, 한 구절을 옮겨 적어, 그 의미를 생각하고, 자기 이야기로 가져와, 도대체 우리가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보여주고 싶었다. 우리 부모가 우리에게, 자신이 자신에게 어떤 짓을 하며 살아가고 있는지를 말이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 12:1).” 아이에게 정신과 치료를 받게 하겠다는 아이엄마에게 차마 당신이 더 큰 문제라고 말하고 싶은데, 그렇게 큰 애도 포기하듯 고등학교를 안 보내고 기어이 가출하여 떠돌게 하더니 둘째도 같은 결과라니! 대체 이 엄마는 딸 셋을 다 잃고서야 정신을 차리려나. 번다고 버느라 매일 돈돈거리며 바쁜 날들이라 그 짜증이 다 애들한테 쏟아지고, 애들은 아빠를 버리고 다른 아저씨를 아빠라고 부르려니 그 죄책감으로 시달리는 것이고.

 

“말씀 밖으로 넘어가지 말라(고전 4:6).” 그럴수록 우리는 더욱 말씀을 붙드는 수밖에. 어차피 이래도 떨어져나가고 저래도 떨어져나갈 바에 말씀밖에 길이 없다. 기도가 답이다. 아이들이 변하지 않는 것이야 우리가 어쩔 수 없는 일이고, 우리 안에 두시는 이 마음이 주의 마음이라면 이 안타까움으로 주를 부르는 수밖에. 결국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은 내가 어떻게 잘 하고 있나, 하는 게 아니라 내 안에 예수를 보신다. 얼마나 주의 마음으로 씨름하는가 하는 것을 말이다.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갈 3:26-27).” 그 증거는 우리가 저런(!) 아이들로 안타까워하고 저런(!) 엄마들 때문에 답답해하면서 대신 주의 이름을 부르고 고하고 아뢰는 일이다. 그렇게 내가 기쁘게 할 대상은 하나님 한 분 뿐이다.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1:10).”

 

저들이 교회 밖에 있을 때에야 뭘 어찌할 수 없는 것이겠으나, “밖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심판하시려니와 이 악한 사람은 너희 중에서 내쫓으라(고전 5:13).” 이렇게 우리와 연결지으신 까닭은 저들에게 우리가 그리스도의 산 떡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러므로 우리가 명절을 지키되 묵은 누룩으로도 말고 악하고 악의에 찬 누룩으로도 말고 누룩이 없이 오직 순전함과 진실함의 떡으로 하자(8).” 그 떡은 순전함과 진실함의 떡이다. 우리의 방법이나 다른 더 나은 길을 모색하여 섞지 않고, 누룩이 없이 오직!

 

그리하여 주께 기도한다. “주를 찾는 모든 자들이 주로 말미암아 기뻐하고 즐거워하게 하시며 주의 구원을 사랑하는 자들이 항상 말하기를 하나님은 위대하시다 하게 하소서(시 70:4).”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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