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갈라디아서 6:8
여호와는 선하시니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고 그의 성실하심이 대대에 이르리로다
시편 100:5
어떤 의미에서 우리가 인생을 사는 것은 심는 일이다. 그 거둠은 훗날 주의 앞에서이겠으나 심음으로 그 즉시 거두는 동시다발적인 일이기도 하겠다. 가령 내 것을 내어주었던데 그 이상의 것으로 만족함을 얻는 일처럼 말이다. 내가 공들여 한 일에 비해 너무 미미한 정도의 것이라 해도 이미 충분한 것은 더 나은 세계를 보고 있기 때문이다. 가령 아기가 눈을 맞추고 웃어줄 때 그것만으로도 어미의 마음은 이미 충분한 것처럼. 이는 단순히 자기만족으로 그치는 일이 아니라 바라고 믿는 바가 있어서이다.
보면 볼수록 마음에 안 드는 딸애의 남자친구가 왔다. 어디 한군데 흡족할만한 게 없어 늘 마뜩치 않다. 그럼에도 마음을 두고 또 돌이켜 다시 생각하는 게 딸애 때문이다. 나아가 같은 것을 바라고 의지하고 그 사역에 충실하니 그것으로 주의 뜻을 구하였다. 그 부친의 위중한 병세에 대해 묻고, 전도사로 여름 사역은 잘 맞추었는지 묻고, 저를 위해 기도하고 같이 내려가 점심을 먹었다. 그러게. 주의 생각은 무엇인지, 그 뜻은 어떠하신지.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갈 6:8).” 말씀 앞에서 내 안의 불편한 심경을 들춰본다. 무엇을 먼저 보고 있는지. ‘육체를 위하여’와 ‘성령을 위하여’ 사이에서 나는 어느 쪽에 더 가까이 붙어 생각하고 있는 것인지. 이래저래 마뜩찮은 마음이야 현실적으로, 그 조건을 두고, 어떤 기대치와 우려와 염려를 가지고 남들처럼 생각하는 까닭이겠다. ‘육체로 썩어질 것을’ 알면서도 그런다. 더 나은 조건을 기대하는 것이다.
모든 기본 전제는, “여호와는 선하시니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고 그의 성실하심이 대대에 이르리로다(시 100:5).” 단순히 오늘 내 생애에서 그치는 일이 아니다. 주의 선하심과 인자하심과 성실하심이 ‘대대에 이르리로다.’ 곧 오늘 우리의 심음의 원리는 단순히 자기만족의 정도로가 아니라 나에게서 내 아이에게로, 아이의 아이에게로 이어져 내려가는 주의 선하심이다. 그의 인자하심과 성실하심이었다. 나 같은 자를 어찌 여기까지 인도하시고 함께 하셨는가를 생각하면, 다른 그 어떤 조건보다 우리가 주를 바라고 의지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이미 큰 자산이고 가장 좋은 여건이며 무엇보다 귀한 가치 판단이겠다.
한 사람을 곁에 두는 일은 저의 전부를 받는 일이다. 그가 살아온 경험과 그를 둘러싼 사람들과 이웃과 일과 앞날에 대한 여러 계획까지도 같이 받아들이는 일이어서, ‘단순히 너’만이 아니라 ‘복잡한 너’를 있는 그대로 함께 하는 것이다. 이에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갈 6:2).” 서로의 짐을 지는 일과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는 일은 무슨 상관인가? 이는 내게 두시는 사명의 문제다. 그 뜻을 같이 하며 나란히 주를 바라고 걸을 수 있는 ‘우리로서의 너’에 대한 일이다.
말은 안 했지만 자꾸 싫어만 하고 반대만 할 일은 아니어서, 주의 마음을 구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먼저는 딸애가 좋다는 것이고, 그런 딸애를 좋아라 하는 저의 마음이겠으나 서로가 주를 바라는 마음이어서 그것으로도 충분한 게 아닐까? 내가 나를 돌이켜 살펴야 할 이유였다. “각각 자기의 일을 살피라 그리하면 자랑할 것이 자기에게는 있어도 남에게는 있지 아니하리니 각각 자기의 짐을 질 것이라(4-5).”
말씀을 묵상하며 내게 두시는 마음을 돌아보는 일은 귀하다. 전혀 바랄 수 없는 가운데서도 주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에 대하여, 그의 성실하심이 대대에 이르리로다. 심지어 나는 나의 판단과 기준은 믿을 수 없어도 주의 성실하심을 믿게 한다. 내가 누구를 생각하는 일이 이제는 저를 생각하는 정도가 아니라 저를 향하신 하나님의 선하심을 생각하는 일이다. 앞날에 대한 이런저런 걱정과 우려는 세상으로부터 세상을 향한 것이겠으니, 많으면 많다고 안도할 수 있겠나, 잘나면 잘나서 확신할 수 있겠나! 그게 다 부질없음에 대하여, “만일 누가 아무 것도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생각하면 스스로 속임이라(갈 6:3).”
어리석음은 그럴 것이다 하는 기대에 있고 지혜로움은 그러하다는 확신에 있다. 기대와 확신의 차이는 확률의 문제가 아니라 그 대상이 누구냐는 것이다. 저 아이뿐 아니라 우리 딸애에 대한 신의도 실은 그 뒤에 계신 주의 성실하심에 있다. 이 일이 갸우뚱할 때 가장 확실한 증거는 나 같은 자를 어떻게 인도하시고 함께 하셨는가, 하는 확신이다. 그러니까 저 아이에 대한 기대와 확신도 확률의 문제가 아니라 주를 바라는 확신의 문제에서 풀어야 하는 일이겠다. 결코 우연한 만남이란 없다.
모든 게 필연이다. 그러므로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7).” 하나님은 우리의 중심을 보신다.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의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하시더라(삼상 16:7).” 이미 버린 것과 이미 받은 것의 차이는 하나님이 그 중심을 보시는 데 있었다. 외모도, 어떤 조건도, 나아가 앞날에 대한 어떤 기대나 확률도 아닌 우리의 믿음을 말이다.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라(롬 7:4).” 우리가 사는 일은 각자의 소원을 성취하는 데 있는 게 아니라,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는 데 있었다. 심란한 마음으로 ‘동물의 왕국’을 보다 보잘것없는 수억만 마리의 성게와 바다거북의 부화와 그 생에 대하여 보다, 어떤 경이로움이 나를 부끄럽게 하는 것을 알았다. 그 가운데 단 1%의 생존율을 가지고도 저들은 사명을 다한다.
그러니까 이래봐야 얼마나 살아남겠나, 하는 따위의 확률 싸움이 아니라 그러하든 어떠하든 주신 바 그 사명을 다하는 데 전심(全心)의 일이었다. 99%의 실패를 놓고 좌절하지 않는다. 이제 막 부화하여 깨어난 어린 거북들은 고작 20미터의 바다까지 나아가는 데 있어 숱한 천적들로부터 공격을 받는다. 그 위를 배회하던 새들이 날카로운 부리로 여린 어린 거북의 머리를 쪼아낸다. 꼬물거리는 팔다리를 겨냥하여 뜯겨진다. 그러는 동안 다른 바다거북들은 묵묵히 필사의 힘을 다해 바다로 나아간다. 그렇게 당도한 바다라고 안전한 게 아니었다!
“이것이 너희의 간구와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의 도우심으로 나를 구원에 이르게 할 줄 아는 고로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빌 1:19-21).” 우리의 이와 같은 투철함이 저들의 필사의 사역과 같은 게 아닐까? 거기에는 ‘왜’라는 의문이 사치다. ‘어떻게’라는 방법론적인 확률도 무의미하다.
어느 유명 교회의 세습을 두고 또 어느 유명 목사가 일인 시위를 벌이는 기사를 보았다. 누구는 대놓고 저들에게 자신들이 속한 교단을 떠나라고 하였다. 세간의 이목은 집중되었고 수많은 사람들은 ‘개독교’를 욕하며 싸잡아 하나님을 비난하고 있었다. 누가 옳으니 그르니 갑론을박 시끄러웠다. 먼저는 그 기준이 어그러진 것 같아 아이러니 했다. 저 교회가 어마어마한 신도를 보유한 대형교회여서 저러는가? 문제는 세습이냐 아니냐가 아니라 대대에 미칠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의 문제가 아니겠나?
그러니 세습을 거절하고 엄연히 교회법에 의거하여 다른 유망한(?) 이를 앉혔더니, 그래서 어느 교회는 또 패로 갈리고 서로 갈가리 찢겨 소송에 소송이 맞물려 만신창이가 되고 있지 않나? 거기에 또 감 놔라 배 놔라 일인 시위까지 펼치는 저 ‘높은 뜻’의 목사는 이를 세상에 보여 이목을 끌어 누구의 지지를 끌어내려는 것인지. 나는 수천억 마리의 성게들이 물길을 따라 죽을힘을 다해 알을 털어내는 일이 눈물겨웠다. 갓 부화에서 깨어나 고작 20여 미터 앞에 있는 바다로 향해 어기적거리며 나아가는 그 개개의 상실함과 사명을 다하는 어린 생명들의 꿈틀거림이 더욱 경이로웠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지 교회를 사랑하는지, 교회를 사랑하는 게 ‘열정 페이’, ‘헌신 페이’를 운운하며 악덕기업을 방불케 하는 7만 성도를 보유한 대형 교회의 작태를 어찌 이해해야 하는지. 남에게는 엄격하고 자신에겐 관대한 게 우리 교회들의 고질적인 질환은 아니겠는지.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라(요 14:23).” 주를 사랑한다는 말이 얼마나 모순적이며 한심한 자기 신념과 욕구로 표출되곤 하는지.
결국은 성령의 내주임재하심이어야 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16).” 우리에게 주사 성령이 영원토록 함께 하지 않으시면 어림도 없는 것이겠으니, 정작 두려운 일은 ‘하나님을 모른다’ 하는 이보다 ‘하나님을 잘 안다’ 하는 이의 자기모순의 작태이겠다. 목사가 말씀과 기도 아닌 피켓을 들고 일인 시위를 하는 모습이 그래서 나는 모순 같았다. 거나 거나, 저나 저나, 뭐 그리 다르고 별개의 고결함인지.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갈 6:8).” 나는 오늘 말씀이 들려주는 경고를 큰 글자로 읽는다. “내 손으로 너희에게 이렇게 큰 글자로 쓴 것을 보라(11).” 언제부턴가 혼재되어 사회 정의를 부르짖는 게 하나님의 공의보다 앞서는 교회의 모양이 되었으니, 부디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14).”
나는 고작 자기 몸의 알을 털어내기 위해 물때를 기다렸다 일제히 알을 터는 수천억 마리의 성게 중 하나의 그 사명이 위대하였다. 옆에서 천적에 의해 뜯기어 머리통이 찢어지고 팔다리가 잘려나가는 와중에도 묵묵히 자신들의 소임을 다하는 어린 바다거북의 충실함에 이를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을 향한 찬송과 경배가 어려 있음을 알았다. 그리하여 고작 생존율이 1%에 지나지 않는다 해도, 나머지 99%의 죽음이 또한 결코 헛되지 않은 것을 알 것 같았다.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에 있을지어다 아멘(18).” 사도의 축도를 들으며.
“온 땅이여 여호와께 즐거운 찬송을 부를지어다(시 100:1).”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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