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에베소서 2:1
천지는 없어지려니와 주는 영존하시겠고 그것들은 다 옷 같이 낡으리니 의복 같이 바꾸시면 바뀌려니와 주는 한결같으시고 주의 연대는 무궁하리이다
시편 102:26
오늘 본문은 읽을 때마다 내 이야기다. 죽었던 나를 살리신 이의 ‘역사하는 영’에 대하여 묵상하게 된다. 그리고 오늘 내 곁에 두시는 한 영혼으로 씨름하게 하시는 바, 그리함으로 허물과 죄로 죽었던 나를 살리신 데 따른 증거를 확신할 수 있다. 뭘 그렇게까지 연관 지을까싶지만 실제 어느 것 하나도 주의 손길이 아니고는 있을 수 없다. 가령 아이가 안경이 부러져 전에 아내가 돋보기를 맞추려고 사두었던 동그란 테를 주었다. 그런데 아이의 렌즈가 그 테에 맞았고, 안경점에서 이를 무료로 잘 다듬어 끼워준 것이다.
그럴 수도 있지, 싶은 일들이 이렇듯 맞아떨어질 때의 놀라움에 대하여 일일이 열거하는 게 구차스러울 정도이다. 실외기를 둔 작은 창고 안에 그 뜨거운 열기와 어마어마한 온도로 선풍기가 녹아서 망가졌다. 한데 아뿔싸! 거기에 부탄가스 십여 개를 넣어둔 걸 깜빡하고 있었다. 밤에 어디 저수지에 나아가 라면이라도 끓여먹자며 부탄가스를 찾다 아뿔싸! 등에 식은땀이 흐를 정도로 놀랐다. 나는 이와 같은 도우심과 긍휼하심을 실제 내 삶 가운데서 수천 개는 더 열거할 수 있다.
하물며 허물과 죄로 죽었던 나를 살리신 이에 대해서는 구구절절 말해 무엇 할까? 성경은 늘 경고의 메시지와 함께 실제 그 증거로 나의 삶에 개입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증거 한다. 때론 두렵고 때론 송구하기만 하다. “우리는 주의 두려우심을 알므로 사람들을 권면하거니와 우리가 하나님 앞에 알리어졌으니 또 너희의 양심에도 알리어지기를 바라노라(고후 5:11).” 부탄가스가 폭발하고 그 이상의 어떤 끔찍한 사고로 이어질 수 있는 일이 비일비재한대도 그때마다 주의 긍휼하심이 나를 보호하고 계시다는 사실 앞에 이를 증거로 알리어야 하는 일이다.
그렇듯 우리 사람은 실제 여느 생물보다 스스로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이다. 특별히 주의 형상과 모양으로 만들어진 것임을 알 때 이를 온전히 보존하지 못할 때의 어리석음에 대하여, 성경은 우리 사람이 다른 피조물과 전혀 다른 존재로 지음 받은 것을 일깨우신다. “그러나 누구인가가 어디에서 증언하여 이르되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히 2:6).” 그러므로 스스로 오늘의 삶에 대하여 자신을 설명하고 변호할 의무를 갖는다. 어째서 그러했는지, 어느 훗날 우리는 낱낱이 고해야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도 오늘의 나의 묵상 글쓰기는 유익하다. 그리 생각한다.
한 날의 삶 가운데서 주가 어찌 나를 보호하시고 인도하셨는지. 나의 삶에 어떻게, 어디서 역사하시고 운행하시는지를 느끼고 깨달아 말씀으로 그 사실을 증명하는 일은 귀하다. 말씀을 볼 때는 물론 여느 책을 읽어도, 누구와 대화를 나누는 일에서도, 어떤 증명은 실제의 증거보다 빈약하다. 나는 내가 알지 못하는 찰나에서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도우시며 인도하시는 것을 의심치 않는다. 이를 알고 인정하고 묵상하고 바라는 게 찬송이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은 질투하신다.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출 20:3).”
스스로의 수고와 노력이 우상이 되기 십상이다. 옆의 교회에서 ‘독(讀)해야 산다’는 구호로 어느 세미나를 개최하고 누구를 초청하는 모양이었다. 붙어 있는 광고를 보다 아쉬운 것은 그 포스터에서 전혀 복음의 냄새를 느끼지 못하였다. 진열된 여러 권의 책들이 여느 도서관이나 어느 서점의 광고 포스터를 보는 듯 하여서 말이다. 일부러 그리한 것도 같은데 그런 책들 가운데 성경을 한 자리를 도드라지게 했으면 어땠을까? 혼자 생각하였다. 읽어야 산다는 구호는 너무 상투적이다. 하나님은 질투하신다.
“너는 다른 신에게 절하지 말라 여호와는 질투라 이름하는 질투의 하나님임이니라(출 34:14).” 그래서 나는 종종 일부러도 멈추고 생각하고 더디게 움직인다. 행여 나의 수고와 노력이 하나님의 일보다 앞서지 않기를. 아니, 그 어떤 수고와 애씀으로도 감당할 수 없는 것에 대하여 성경은 경고하신다.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마 3:7).” 그래서 그리스도인이면 읽는 것이다. ‘독(讀)해야 산다.’ 읽어야 하고 구해야 한다.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 1:18-19).”
공부 좀 하라는 소리다. 이를 힘써야 한다. 이는 곧 하나님 앞에 드리는 시간이다. “너는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딤후 2:15).” 그러기 위해 기도해야 한다. “그 중에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우리는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고후 4:4-5).” 우리의 마음을 붙들 수 있는 것은 기도뿐이다.
그리할 때 주가 우리의 길을 비추신다.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6).”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내가 하는 게 아니라 할 수 있는 길로 인도하심이다. 그리하여 찾고 뒤진다. 그와 같은 수고가 값지다. “은을 구하는 것 같이 그것을 구하며 감추어진 보배를 찾는 것 같이 그것을 찾으면 여호와 경외하기를 깨달으며 하나님을 알게 되리니(잠 2:4-5).” 주를 바라는 일은 실제이지 허상이 아니다.
이로써 생각해야 한다. “내가 말하는 것을 생각해 보라 주께서 범사에 네게 총명을 주시리라(딤후 2:7).” 주가 주시는 총명을 구한다. 특히 아이를 위해 기도할 때 나는 날마다 지혜와 총명을 주시기를 바란다. 깜빡깜빡 잃어버리는 아이를 두고 주께 바랄 수 있는 가장 최선의 기도이면서 동시에 내가 원하는 길이다. 주를 생각하기는 책을 선별하여 읽는 데서부터 누구와 어떤 말을 나누는 데 있어 사용하는 언어에 이르기까지, ‘범사에’ 총명을 구하는 일이다.
이것으로 말한다.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과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라(엡 4:25).” 사람들이 거부감을 느낀다고 해서, 또는 현대에 들어 더더욱 심판이니 멸망이니 하는 말이 듣기 싫은 소리가 되었다고 해서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우회적으로 돌려 얘기할 수 없는 문제다. 환자가 구구절절 자신의 상태를 말할 때 어쩌면 그렇게 자기 이야기만 하냐고 탓하는 의사는 없다. 치료를 위해 더 끔찍한 저의 상태를 말해주어야 할 때도 있다.
“이 말이 미쁘도다 원하건대 너는 이 여러 것에 대하여 굳세게 말하라 이는 하나님을 믿는 자들로 하여금 조심하여 선한 일을 힘쓰게 하려 함이라 이것은 아름다우며 사람들에게 유익하니라(딛 3:8).” 안 믿고 의지적으로 거부하는 자에 대하여는 뭐라 한들 소용이 없는 일이겠으나, 저에게 말하는 것은 이를 듣고 돌이켜 주 앞에 더욱 바르게 설 수 있는 자를 위하여서이다. 나는 아이에게 했던 말 또 하고 했던 말 또 하면서도 이를 멈추지 않는 것은 실제 저를 위한 것이기 보다 나를 위한 것이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흔히 몰라서 못하는 게 아니라 알면서도 안 하는 데 문제가 있다. 안 하면서 못한다고 하는 소리만큼 자기변호가 엉터리도 없다. 다 그렇지 뭐, 하는 식으로 ‘다들 그래요.’ 하며 항변하는 일은 어리석다. 나는 그래서 아이와 함께 성경공부를 하고 이런저런 말을 나누는 일에 의미를 둔다. 여느 잘난 사람들보다 훨씬 낫다. 뭐라 한들, 도무지 들으려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뭘 해도 소용이 없는 것이다. 기어이 터져야 하고 일이 벌어져야 꿈쩍이라도 하지! 이 시대에 바로 왕과 같은 고집불통이 어디 한둘인가?
겸손히 주를 바라는 것은 묵묵히 주신 바 내 처지에서 그 형편으로 맡기신 삶을 다하는 일이다. 가장 두려운 일은, “하나님이 나의 마음을 약하게 하시며 전능자가 나를 두렵게 하셨나니 이는 내가 두려워하는 것이 어둠 때문이나 흑암이 내 얼굴을 가렸기 때문이 아니로다(욥 23:16-17).” 내 얼굴이 가려진 게 아니라 하나님이 나의 마음을 약하게 하시는 일이다. “거기 와서는 바라던 것을 부끄러워하고 낙심하느니라(6:20).” 기껏 한다고 하던 일에서 낙심이 올 때, 주가 나의 마음을 다스리실 것이다. “장차 한 능력 있는 왕이 일어나서 큰 권세로 다스리며 자기 마음대로 행하리라(단 11:3).”
이 일을 계속 해야 하나 싶을 때, 중3 아이에 대하여, 또 어떤 상황을 놓고, 낙심이 나를 주저앉히려 할 때, “내 마음이 그것을 기억하고 내가 낙심이 되오나 이것을 내가 내 마음에 담아 두었더니 그것이 오히려 나의 소망이 되었사옴은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애 3:20-22).” 이내 주의 긍휼하심을 알기 때문이다. 나는 미처 생각도 못하고 느끼지도 못하는 순간에도 하나님은 나를 보호하시고 인도하시고 계시었다. 곧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엡 2:1).”
나는 이와 같은 사실 앞에 더는 바랄 게 없다. “천지는 없어지려니와 주는 영존하시겠고 그것들은 다 옷 같이 낡으리니 의복 같이 바꾸시면 바뀌려니와 주는 한결같으시고 주의 연대는 무궁하리이다(시 102:26).” 이 모든 게 주의 은총으로만 이루지는 것에 대하여,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며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롬 12:12-13).” 할 수 있는 대로 맡기신 일에 힘쓸 뿐이다.
이는 곧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엡 2:10).”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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