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복음을 위하여 그의 능력이 역사하시는 대로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을 따라 내가 일꾼이 되었노라
에베소서 3:7
여호와는 긍휼이 많으시고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고 인자하심이 풍부하시도다
시편 103:8
아내와 딸애가 일을 마치고 돌아와 같이 늦은 시간에 저수지로 갔다. 늦은 밤인데도 후텁지근하였고 물비린내가 역겨웠으나 잔잔한 수면 위로 나란히 서 있는 야광찌가 근사하였다. 그러나 같이 와주었지만 정작 차 안에서 불편하게 있는 두 사람이 신경 쓰여 새벽 두 시를 조금 넘겨 집으로 돌아왔다. 그나마 잉어 한 마리를 잡았다가 놓아준 게 전부였다. 예전 같지 않았다. 가만히 앉아 있는 맛에 가는 거지 이제 별 거 없었다. 허밍으로 같은 찬송을 여러 번 흥얼거리며 두서없는 생각으로 시선을 모으다 온 셈이다.
결국 조산원 자리에 마사지 업소가 들어오는지, 공사를 시작하였다. 다용도실로 같이 쓰던 주방을 사용할 수 없어 불편하게 되었다. 마음이 어려웠으나 한편으론 아득하였다. 너무 더운 날씨라 중3 아이와는 원고를 출력하여 1층 카페로 내려갔다. 교회로 예배에 좀 나올 수 있으면 좋겠는데, 그렇지 않아도 주의 마음으로 대해야 하는 일이어서 종종 마음이 좋지 않았다. 그러니까 싫든 좋은 사람은 삶에 기준이 있어야 한다. 어떻게 살지, 왜, 어디까지 그 목표도 필요한 존재다. 나는 아이에게 그리 일러 함께 하였으면 하고 바란다.
동물은 본능으로 살고 사람은 마음으로 산다. 정신이라 해도 좋고 생각을 가졌다고 해도 좋다. 이를 더욱 유념하라. “그러므로 우리는 들은 것에 더욱 유념함으로 우리가 흘러 떠내려가지 않도록 함이 마땅하니라(히 2:1).” 사람이어서 그러해야 한다. 그저 살다 가는 생물이 아니다. 자칫 흘러 떠내려가는 존재가 될 수도 있다. 유념하라. 생각하라는 것이다. 나는 아이에게 이를 뿐 강제할 수는 없고, 그런 아이에게 싫증이 일다가도 마음을 추슬러 주의 마음을 잃지 않도록 해야 할 일이다.
또한 사람의 일에는 보응이 따른다. 이를 피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천사들을 통하여 하신 말씀이 견고하게 되어 모든 범죄함과 순종하지 아니함이 공정한 보응을 받았거든 우리가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어찌 그 보응을 피하리요 이 구원은 처음에 주로 말씀하신 바요 들은 자들이 우리에게 확증한 바니(2-3).” 그렇게 앞서 살다간 믿음의 사람들이 허다하다. 저들이라고 왜 갈등이 없었겠으며 회의와 좌절을 겪지 않았겠나? 이에 견딜 수 있었던 것은 믿음의 주요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본 것이다. 모든 무서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것들을 벗어버리고, 우리 앞에 당한 믿음의 경주를 하며 예수만 바라보고 나아갔다. 이와 같은 허다한 증인들이 있다.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12:1-2).” 말씀은 이에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다. 이에 하나님도 증언하신 것이다. “하나님도 표적들과 기사들과 여러 가지 능력과 및 자기의 뜻을 따라 성령이 나누어 주신 것으로써 그들과 함께 증언하셨느니라(2:4).”
잔잔한 수면 위로 가만히 서 있는 찌는 아름답다. 물밑의 어떤 생명에 의해 건들거리며 신호를 보내올 때 나는 긴장한다. 시선을 고정하고 허리를 곧추세워 언제든 당길 수 있는 준비를 하는 것이다. 기다림이란 그저 막연한 게으름이 아니다. 기다림은 곧 집중이다. 모든 시선을 모으고 촉각을 곤두세워 언제든 준비 상태를 유지하는 일이다. ‘유념하라.’ 나는 이 말씀으로 그리 여겨진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희게 되리라(사 1:18).”
이와 같이 긍휼이 많으신 하나님의 은총이 아니면 어찌 살 수가 있을까? “여호와는 긍휼이 많으시고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고 인자하심이 풍부하시도다(시 103:8).” 그저 낚시를 위해 낚시만 좋아서 쫓아다니던 시절과는 다르다. 허밍으로 이어지던 찬송가 가운데서 나의 달라진 나를 발견할 수 있었으니, 내 지은 죄가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희게’ 하신 데 따른 은혜의 자리를 아는 일이다. 생각하라. 그리고 전념하라. “내가 이를 때까지 읽는 것과 권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에 전념하라(딤전 4:13).” 말씀은 더욱 직접적으로 나를 붙드시는 것 같다.
오늘 말씀은 그렇게 들린다. “이 복음을 위하여 그의 능력이 역사하시는 대로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을 따라 내가 일꾼이 되었노라(엡 3:7).” 내 능력이 아니라 그의 능력이 역사하시는 대로 말이다.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다. 그러니까 내가 중3 아이와 앉아 있는 일도, 저 우리 아픈 아이를 건사하는 일에서도, 내 몸을 다스리고, 주어진 현실을 묵묵히 준행하는 것들도 모두 그 가운데 나는 일꾼이라. 경작하고 다스려야 하는 일이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창 2:15).” 일꾼으로 두신 날들 가운데서 “우리가 그 안에서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과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감을 얻느니라(엡 3:12).” 그와 같은 담대함은 받은 자로서는 거저였으나 주시는 이로서는 생명을 내어주신 일이다. “그러므로 너희에게 구하노니 너희를 위한 나의 여러 환난에 대하여 낙심하지 말라 이는 너희의 영광이니라(13).” 곧 내게 두시는 오늘의 이런저런 어려움이 또는 낙심하지 않고 이겨내야 하는 일이다.
이는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18-19).” 내게 두시는 일이었다. 마땅히 해야 하는 일인 것이다. 낚시를 하다 새삼 달라진 나의 생각들과 마음과 여러 떠오르는 것들에 대하여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게 자연스러웠다. 아,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그의 거룩한 이름을 송축하라(시 103:2).”
누구라도 구원에 이를 수 없었음을, 그러나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 그리하여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18).” 이는 명백한 사실이다. 곧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36).” 괜한 소리가 아닌 이와 같은 말씀 앞에서 안도할 수 있는 게 축복이었다.
죽음 너머에는 엄연한 두 세계가 있다. 그 두 세계는 서로 오갈 수 없다. “그뿐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텅이가 놓여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갈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눅 16:26).” 기회는 지금뿐이다. 살아서 사는 동안에 주께 돌이키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 내가 아이를 곁에 두고 종종 조바심을 쳐야 하는 이유다. 나중은 없다. 이번이 마지막일 수 있다. 주님은 이를 위해 오셨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 10:45).”
내가 이를 앞에 두고 이런저런 마음으로 어려워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단지 아이를 격려하고 보다 나은 삶을 사는 정도로 이끄는 선생의 역할이 전부가 아닌 것이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4-15).” 이를 대수롭지 않게 여겨 하나님을 속이는 삶이란 게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 대표적인 인물을 꼽으라면 아나니아와 삽비라 두 부부가 아닐까?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마음대로 할 수가 없더냐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사람에게 거짓말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행 5:4).”
사람에게 거짓말한 게 아니라 하나님께로다! 성경은 무서운 책이다. 경고를 알린다. 그러므로 “살아 계신 하나님의 손에 빠져 들어가는 것이 무서울진저(히 10:31).” 두려워할 줄 아는 게 은혜였다. 주의 은총이 아니면 살 수 없다고 여길 때 그의 긍휼하심 앞에 엎드릴 수 있었다. “여호와께서 공의로운 일을 행하시며 억압당하는 모든 자를 위하여 심판하시는도다(시 103:6).” 그러므로 “여호와는 긍휼이 많으시고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고 인자하심이 풍부하시도다(8).” 어떻게? “자주 경책하지 아니하시며 노를 영원히 품지 아니하시리로다(9).”
나는 이와 같은 말씀 앞에 아멘 한다. “우리의 죄를 따라 우리를 처벌하지는 아니하시며 우리의 죄악을 따라 우리에게 그대로 갚지는 아니하셨으니 이는 하늘이 땅에서 높음 같이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 그의 인자하심이 크심이로다(10-11).” 함부로 여기며 살던 때를 생각하면 오늘에 나를 두신 이 은혜가 엄청나다. “이는 그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단지 먼지뿐임을 기억하심이로다(14).” 내가 얼마나 하찮은가 하면, “인생은 그 날이 풀과 같으며 그 영화가 들의 꽃과 같도다(15).”
그런 나를 내가 무엇이라고 주가 그리 사랑하시는가! “여호와의 지으심을 받고 그가 다스리시는 모든 곳에 있는 너희여 여호와를 송축하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22).”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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