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일 후에 내가 보니 하늘에 열린 문이 있는데 내가 들은 바 처음에 내게 말하던 나팔 소리 같은 그 음성이 이르되 이리로 올라오라 이 후에 마땅히 일어날 일들을 내가 네게 보이리라 하시더라
요한계시록 4:1
여호와여 왕이 주의 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며 주의 구원으로 말미암아 크게 즐거워하리이다
시편 21:1
마땅히 일어날 일들에 대하여, 주 없이 사는 삶의 황폐함에 대하여 보이신다.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하늘에 열린 문이 있는데 내가 들은 바 처음에 내게 말하던 나팔 소리 같은 그 음성이 이르되 이리로 올라오라 이 후에 마땅히 일어날 일들을 내가 네게 보이리라 하시더라(계 4:1).” 보면 영락없다. 아픈 아이 뒤에는 병든 부모의 영혼이 있었고, 병든 부모의 영혼 너머에는 하나님을 두기 싫어하는 마음이 있었다. 이는 마치 공식 같아서 열에 아홉이 아니라 열에 열이 다 같았다. 그리하여 돌이킬 수 있는 게 복이었다. 그리 삼으신다. 배후에는 하나님이 계셨다.
우리는 주의 구원으로 말미암아 기뻐하게 되는 것이다. “여호와여 왕이 주의 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며 주의 구원으로 말미암아 크게 즐거워하리이다(시 21:1).” 이런저런 상황과 여건은 고약하기 이를 데 없지만 그래서 더욱 주를 의뢰하게 되는 일이다. 아이의 인지능력은 생각보다 떨어졌다. 색종이 접기를 하는데 무리였다. 종이비행기를 열 번을 접으며 설명했는데도 열 번을 다 혼자서 만들지 못했다.
손에 근력이 없어 부르르 떨었고, 아무리 하려 해도 어려웠던지 힘들어했다. 글방에서 식사를 하고 바로 실습장으로 가면 되는 거였다. 버스정류장까지 데려다주고, 일곱 정거장을 세서 무슨 공장 앞에서 내리면 된다고 알려주었다. 그럼에도 초조해하였고, 긴장은 고조되어 점심도 제대로 먹지 못했고 너무 서둘러 한 시간이나 일찍 당도하였다. 그러니 시간이 너무 남아서 잠깐 산책을 한다던 것이 공장과 공장 사이에서 길을 잃었고, 급기야는 더 먼 전철역까지 걸어갔다가 간신히 길을 찾았다.
그러는 동안 덩달아 긴장을 하고 신경을 쓰다 지레 내가 죽을 것 같아, 안타까워서 주의 이름만 불렀다. 아이엄마는 아이의 상태가 어떠한지 검사결과지를 보내왔고 비로소 나는 좀 더 아이의 상태를 이해할 수 있었다. 생각보다 심각하고 힘에 겨운 삶을 살고 있었다. 종이접기와 오리기, 색칠하기와 글자 맞추기 등. 작문과 영어 수학을 넣어 30분씩 오전에 3교시 수업처럼 시간표를 짰다. 어떻게 잘 따라올지 알 수 없으나, 나 역시 어떻게 감당이 될지 알 수 없으나 뭔가 유의미한 프로그램이 필요하겠다고 생각했다.
이렇듯 내 안에 두시는 마음이 희한한 일이라. 자꾸 그리 신경이 쓰였다. 과연 우리가 누굴 평가하고 업신여기고 괄시할 수 있을까? “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않는 자는 먹는 자를 비판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이 그를 받으셨음이라(롬 14:3).” 설교원고 초안을 작성하는 내내 마치 그 일을 보여 주시는 듯하여 일련의 일들이 시청각교재로 여겨질 정도였다. 특히 내가 붙들어야 할 말씀이다. 다소 종교적이고 나름 주 안에서 산다고 하는 사람이 실은 더 문제였다.
뒤미처 친구가 아이들에게 주라며 과자를 잔뜩 사가지고 왔다. 저는 교회를 옮기려 하는 사촌 오빠의 일을 들려주었고, 그런저런 갈등이 있다는 데 이해를 하지 못했다. 너무 멀찍이 서서 가면 갈등도 없다. 나는 그리 말해주었다. 인위적으로 스스로 가까이 할 때는 갈등이 생긴다. 결국은 사람 사이다. 친구가 교회를 다니면서도 아무런 갈등이 없는 것은 오히려 저의 거리가 늘 바깥쪽 어디 먼 데 있어서이다. 저이가 목사와 무슨 갈등이 있었는지 내막은 알 수 없으나, 서로가 하나님 이상으로 너무 밀착되어 있어서일 거였다.
누가 어떤지 듣다보면 모든 문제는 인위적인 우리의 자기 의지 때문이었다. 너무 가까운 밀착도, 너무 먼 거리두기도 모두 같은 범주의 갈등이다. 자신의 유산을 상속받아 집을 나간 둘째 아들이나, 늘 집에 있었으면서도 정작 아버지가 계신 집에는 들어가지 못하고 있는 큰 아들이나(눅 15:11-32). 우리의 인위적인 모든 것이 불순종으로 인한 것이었다. 이를 아무리 친구에게 설명하려 해도 저는 자신에게 아무런 문제도 없다고 여기는 거리에 서 있었다.
“화 있을진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의 십일조는 드리되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버리는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눅 11:42).” 할 만큼 하지만 굳이 하나님의 사랑은! 교회는 나가지만 주의 위로와 성도의 도리에 대해서는! 친구의 구구한 변명을 듣다보면 그게 지금 아이엄마의 경우와 같았고, 저가 왜 큰 교회를 선호하는지 알 것도 같았다. 그저 뒷자리, 스스로 마음의 위로를 얻는 정도이면 더는 바라지 않는 자리에서였다.
화 있을진저! 나름 열심으로 믿는다고 믿는 믿음에 대해서도, 경계를 두어 멀찍이 서서 외면하고 한사코 자기만족에 겨운 신앙에 대해서도. 나름 한다고 하는 그 수고와 노력이 화였다. “모세의 율법을 범하지 아니하려고 사람이 안식일에도 할례를 받는 일이 있거든 내가 안식일에 사람의 전신을 건전하게 한 것으로 너희가 내게 노여워하느냐 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공의롭게 판단하라 하시니라(요 7:23-24).” 목사를 운운하고 척을 두는 이의 특징은 누구보다 저를 따랐고 곁에 있던 자들이다.
사람을 의지할 때나 스스로 자신의 열심으로 주를 바랄 때나 영락없이 그 갈등은 남을 겨누어대는 총구이거나 자신을 향해 방아쇠를 당기는 자학이 된다. 특히 교회 목사에 대해 이러니저러니 말이 길어지는 경우에는 열에 열이 다 똑같았다. “바리새인 중에 어떤 사람은 말하되 이 사람이 안식일을 지키지 아니하니 하나님께로부터 온 자가 아니라 하며 어떤 사람은 말하되 죄인으로서 어떻게 이러한 표적을 행하겠느냐 하여 그들 중에 분쟁이 있었더니(9:16).”
그러니 분쟁이 난다. 갈등(葛藤)은 '칡덩굴 갈'과 '등나무 등'의 한자어다. 자신의 영혼을 감아 뒤덮고 있는 자기 생각의 뿌리다. 아이엄마는 그냥 그렇듯 큰 교회 어디 구석진 자리에 가서 하소연 하듯 저 혼자 하나님을 바라다 오는 게 전부라고 여겼다. 친구는 성가대 지휘까지 하며 교회를 섬기지만 ‘거기까지’여서 더는 가까이 알려고도 나누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러니 모든 게 적당하여서 고만고만한 게 능사였다. 정작 그 영혼은 어디서 위로를 얻는가? 십여 년째 가까이 하는 기타와 도자기 동호회의 저들과 친목하는 것이라. 그냥, 거기까지다.
그런 우리에게 말씀은 묻는 것이다. “남의 하인을 비판하는 너는 누구냐 그가 서 있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자기 주인에게 있으매 그가 세움을 받으리니 이는 그를 세우시는 권능이 주께 있음이라(롬 14:4).” 뭐라 하면 목사에 대해 또 어느 부류의 누구 종교인들에 대해서는 늘 할 말이 많다. 시시콜콜 저들의 삶을 나열하면서도 정작 자신의 영혼은 그 상태를 알려고 하지 않는다. 그러느니 한쪽 발은 이쪽에 두고 다른 한 발로 서서 세상을 기웃거리고 있는 꼴이었으니.
그러다 다 큰 조카아이의 전화번호를 내게 주었고, 나는 난감하여 주 앞에 미뤄두었다. 저의 엄마는 아이 핑계로 얼결에 술집을 차렸고, 결별한 아이아빠는 지방 어디 공장에서 막일을 하며 생계를 꾸려가고 있었다. 상대적으로 딸애는 하는 일마다 잘 된다고 하니, 서로의 공통점은 그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는 것이었다. 대놓고 교회를 등지고 사는 저들이나 주일이면 교회 안에 있으면서도 교회 밖에 있는 사람처럼 황량한 친구의 마음이나 다를 게 없었다. 누구에 대해 말할 땐 그처럼 열심이다가도 정작 자기 이야기 앞에서는 속수무책이라. 그냥 내버려두란다.
그러니 “어떤 사람은 이 날을 저 날보다 낫게 여기고 어떤 사람은 모든 날을 같게 여기나니 각각 자기 마음으로 확정할지니라(롬 14:5).” 그 마음의 기준을 무엇으로 삼을 것인가? 생전 성경 한 줄 읽는 법 없고 들으려하지도 않고, 그저 우리는 자신의 기준과 판단으로 중심을 잡으려 하는데 도대체 무슨 수로 하나님을 알까?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호 6:6).” 그게 또 보면 가까운 친구일수록 뭐라 말해주기가 가장 어려운 것 같다.
생각보다 아이는 그 이상으로 심각하였고 나는 불쑥 두려운 마음까지 들었으며, 왜 하필 나 같이 무능하고 능력도 안 되는 사람을 여기에 두셨을까? 주의 뜻을 생각하다 힘에 겨워 물러났다. 그래서 내가 할 일은 더더욱 주를 바라는 거였구나. 조바심치는 아이 앞에서 덩달아 긴장하고 그 이상으로 조바심 내는 나의 역약함을 가지고, 그러니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게 더욱 간절히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밖에는.
“그들이 날마다 나를 찾아 나의 길 알기를 즐거워함이 마치 공의를 행하여 그의 하나님의 규례를 저버리지 아니하는 나라 같아서 의로운 판단을 내게 구하며 하나님과 가까이 하기를 즐거워하는도다(사 58:2).” 그리하여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수밖에 달리 내가 손을 내밀 곳이 없었다. 힘에 부쳐 이럴 땐 어찌해야 하나 알 수가 없어 주께 더욱 아뢰었더니 그래서 그런가? 위층에 있는 요양병원의 나이든 의사양반이 친밀함을 가지고 얼마 전부터 다가온다. 아직 그런저런 이야기를 나눈 사이는 아니다.
또한 친구에게 받은, 스물네 살 먹은 조카아이에게 알았다는 듯 내가 먼저 아는 체를 하였더니 생각보다 금세 호응을 하고 반응이 왔다. ‘이게 뭔가 싶을 때’ 나는 다만 주께 내어놓고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게 일이 되었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고전 15:58).” 그러할 때 내게 두시는 말씀이 중심이 된다. 다른 수로 내가 해볼 게 없어서 다행이다.
결국 '나는 내 것이 아니다'는 사실 앞에서 안도한다. 비로소 위로를 얻는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6:19-20).” 값으로 사신 이가 그 값을 다하게 하실 일이지 내가 나서서 내 값을 다할 수는 없는 일이다. 나도 나를 주체할 수 없는데 감히 내가 누굴 어떻게, 무엇으로 위할 수 있을까?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 것도 판단하지 말라 그가 어둠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 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으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고전 4:5).” 다만 주를 바라게 하시려고, 주께서 어찌 이루어 가시는가 보고, 듣고, 느낌으로 더욱 주 앞에 바로 서게 하시려고.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후 5:10).”
곧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권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하더라(계 4:11).” 내가 하는 일은 그래서 다만 찬송이었다. 입만 열면 주를 알리고, 주가 어찌 행하시는지 내가 보고, 듣고, 느끼는 바를 자랑하는 일. 그리하여 “여호와여 왕이 주의 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며 주의 구원으로 말미암아 크게 즐거워하리이다(시 21:1).”
주의 아름다운 복으로 그를 영접하시고
순금 관을 그의 머리에 씌우셨나이다
그가 생명을 구하매 주께서 그에게 주셨으니
곧 영원한 장수로소이다
주의 구원이 그의 영광을 크게 하시고
존귀와 위엄을 그에게 입히시나이다
그가 영원토록 지극한 복을 받게 하시며
주 앞에서 기쁘고 즐겁게 하시나이다
(3-6)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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