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엎드려 경배하더라

전봉석 2018. 10. 26. 07:19

 

 

 

내가 또 들으니 하늘 위에와 땅 위에와 땅 아래와 바다 위에와 또 그 가운데 모든 피조물이 이르되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 양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권능을 세세토록 돌릴지어다 하니 네 생물이 이르되 아멘 하고 장로들은 엎드려 경배하더라

요한계시록 5:13-14

 

땅의 모든 끝이 여호와를 기억하고 돌아오며 모든 나라의 모든 족속이 주의 앞에 예배하리니 나라는 여호와의 것이요 여호와는 모든 나라의 주재심이로다

시편 22:27-28

 

 

문득 드는 생각이었다. 하나님이 없다면, 죽음으로 모든 게 끝난다면, 그래서 심판도 없고 천국도 없다면. 그 허망함에 대하여 나는 어찌 감당이 안 되는 것이다. 나의 말은 닿을 수 없는 곳에서 허허로웠고 미칠 수 없는 지점에서 막막하였다. 어떻게 살까? 뭘 바라며 살까? 실은 중딩 아이 둘과 수업을 하다 그 아이들의 이런저런 말을 들으며 생각하였다.

 

그러니 내 안에 복음이 있어 주를 바라고 찬송할 수 있다는 게 얼마나 큰 영광이고 기쁨인지. 설교원고를 작성하면서 또 초딩 아이들과 수업하면서도, 이를 어찌 드러내어 알려주고 우리가 같이 주를 바랄 수 있을까! 조바심까지 나는 일이었다. 한 아이가 크게 달라진 것은 슬그머니 내 것을 하나 챙겨온다. 글에도 글방이 좋은 걸 숨기지 않고 드러낸다. 그 누나 아이가 다음 주부터 글방으로 오기로 했다. 아이를 볼 때면 초등학교 때 내 모습이 떠오른다.

 

언제쯤 돼야 이 아이들도 주의 살아계심을 붙들고 살 수 있을까? “내가 또 들으니 하늘 위에와 땅 위에와 땅 아래와 바다 위에와 또 그 가운데 모든 피조물이 이르되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 양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권능을 세세토록 돌릴지어다 하니 네 생물이 이르되 아멘 하고 장로들은 엎드려 경배하더라(계 5:13-14).” 나는 오늘 말씀을 그런 시각에서 다시 읽는다. 이내 모든 피조물이 주를 찬송하고 경배할 것이다.

 

저녁에 가정예배를 드리고 난 뒤 아내는 스케치북을 가져다 선 그리기, 도형 그리기, 땅과 나무 그리기 등을 일러주었다. 유치원 아이들에게 처음 입문 과정에서 선과 원의 원리를 가르치는 것이었다. 색종이 접기는 너무 어려운 단계여서 좀 더 쉬운 것으로 그리 해보기로 하였다. 복지관에 가야 하는 목요일만 빼고 아이는 매일 오전에 오기로 하였다. 수업처럼 30분씩 성경과 작문, 영어와 수학, 그리고 공작으로 우선 나누었다.

 

그래서 국가장학금을 지원해서 사이버대학을 공부할 수 있게 하였으면, 하고 혼자 생각이었다. 다만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정도에서 아이를 마주하고 위할 뿐이다. 왕따인 중3 아이는 여전히 자기고집으로만 툴툴거렸고, 소유와 집착으로 괴로워하는 중1 아이는 자신도 그런 자신을 안다면서 자신으로 인해 힘들어하였다. 어떻게 주를 전하면 좋을까? 글방은 좋은데 교회는 싫고, 평일 날 이렇게 오는 건 좋은데 일요일 날 일부러 와야 하는 건 더욱 어려운 일이었으니.

 

그럼에도 “땅의 모든 끝이 여호와를 기억하고 돌아오며 모든 나라의 모든 족속이 주의 앞에 예배하리니 나라는 여호와의 것이요 여호와는 모든 나라의 주재심이로다(시 22:27-28).” 저 아이들을 그럼에도 우리에게 보내시는 게 주님이시라. 주가 더 사랑하시는 일이었으니, 나는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정도에서 위하고 마주하고 가르치는 일이었다. 어떤 종교적인 이유나 의무감이 아니었다. “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않는 자는 먹는 자를 비판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이 그를 받으셨음이라(롬 14:3).”

 

내 안에 두시는 어떤 안타까움이 신비다. 그러려니 하고 말던 시절도 있었다. 왜 그때라고 아이들이 힘겨워하지 않았을까? 미처 나는 그것을 몰랐다. 알려고 하지 않았고 내 일이 아니라고 여겨 상관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이제는 자꾸 마음이 쓰여서 초딩 5학년, 이 녀석의 혀 짧고 어눌한 말씨가 정겹다. 내게 주려고 막대사탕 하나를 가져와 슬그머니 책상 앞에 놓아두고는 잠언을 찾아 떠듬떠듬 읽고 삐뚤삐뚤 글씨를 쓴다. 주 없이 어찌 살까?

 

내게 맡기신 일이라. “또 형제들아 너희를 권면하노니 게으른 자들을 권계하며 마음이 약한 자들을 격려하고 힘이 없는 자들을 붙들어 주며 모든 사람에게 오래 참으라(살전 5:14).” 때론 내가 힘에 부쳐 곤란하기만 하다. 유난히 정이 안 가고 마음이 어려운 경우도 있다. 그런데 참 신기한 건, 전에 같으면 안 하고 안 보면 그만이었을 텐데 그러면서도 자꾸 신경이 쓰인다. 뭐라 나무라고는 마음이 안쓰러워 숨겨둔 과자라도 한 봉 내어주며 등을 토닥이게 되는 일이다.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누나가 이사 때문에 정신이 없어 전화를 못한다며 조카 딸내미를 걱정하였다. 점점 더 심해져서 큰 병원으로 옮겨 심리 상담을 받게 한 모양인데 그걸 또 그렇게 싫어한 모양이었는지. 한 번에 돈 십만 원에 가까운 기존의 상담자와 계속 상담을 하고 싶다고 고집인 모양이었다. 나이나 어리면. 스물 넷, 한참 꽃다운 나이에 뭐가 그리 힘에 겨워 그늘에 숨어 있으려고만 하는 것일까? 내 안에 이는 궁금증은 한 몫에 그 답이 나왔다.

 

교회들 안 다닌지 꽤 됐을 걸! 친구의 무심한 말에 나는 바로 앉았다. 저이는 어쨌든 사역자에게 시집을 갔었다. 아이가 몇 살 때 이혼을 했는지, 왜 기껏 목회자가 이혼까지 하게 됐는지, 그러는 동안 서로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수 없었지만. 그렇기로서니 사모였던 이가 교회조차 안 다니고 있었다니. 그 애도 나는 신앙생활은 하고 있는 줄 알았더니.

 

도대체 하나님 없이 어찌들 살까? 그저 막연하여 이 생으로 전부인 것이면 도대체 무얼 의지하며 사는 것일까? 새삼스러웠다. 오전에 친구와의 통화 때문이었는지, 오후께 중딩 아이들과의 이런저런 대화 때문이었는지, 내게 두시는 은혜가 얼마나 분에 넘치게 귀하고 감사한지 새삼 놀라웠다. 하나님을 멀리하며 하나님 없이 사는 사람들과 주로 어울리던 시절을 떠올렸다. 그때는 그게 그처럼 재밌고 좋았던 것들이 지금에 와서는 두렵고 떨리기만 한 것이다.

 

그렇다고 그럼 달라진 게 뭐 있나? 저들 눈에는 여전하여서 빈궁한 나의 생활이 곰살맞지는 않을 것인데, 그러나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고후 6:10).” 나는 이에 충만하다. 전적으로 동감한다. 쥐뿔도 없으면서 여유롭고, 늘 돈에 쪼들리는 것 같은데 풍족하게 나눌 수 있고, 내 몸 하나 힘에 부쳐 쩔쩔매는 것 같은데 저들을 돌볼 수 있으니,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9).”

 

이제 확연히 달라진 위상이다. 친구는 보험 문제로 일이 주 더 미뤘다가 병원엘 가기로 했다. 아무래도 괴사해서 인공관절을 넣은 것인데 재수술을 해야 할 모양이었다. 함부로 굴며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저의 호기가 나는 속상했다. 아직 저가 살아 있는 가장 아름다운 이유는 주를 바라고 구할 수 있는 기회가 있다는 소린데. 아직은 돌이켜 주를 찾을 수 있는 것인데. 얼마나 더 몰려야 주를 바랄까? 영영 저에게는 기회가 없는 것일까? 저의 거부감을 나도 한다. 두 누이가 모두 사역자들에게 시집을 가서 목회자 사모가 되었다가 둘 다 떠난 꼴이었으니.

 

그렇다고 하나님 없이 살며 자기 앞가림 잘 하고 사는 의사 형님은 좀 안녕하신가? 스스로 밝힌 것처럼 저는 알코올중독자라. 하루라도 취하지 않으면 살 수가 없는 것이다. 그 허망함에 대하여는 저들 부친이 그리 살다 그리 죽었는데도 어찌 귀 기울이지 않는 것일까? 그러니 죽음으로 이생이 전부라면, 더는 내생이 없는 일이라면 말 그대로 문제될 게 뭐겠다. 이리 살든 저리 살든 그저 살다 가면 그만일 것을.

 

돌이켜 주를 바랄 수 있는 게 복이었다. 무드셀라를 낳고 주의 심판을 두려워할 줄 알았던 에녹이 주와 동행하였다. 그저 이 땅에서 사는 게 전부가 아니라는 걸, 노아는 평생 방주를 지으며 되새겼을 테고. 어떻게 다윗은 그 모진 역경의 세월을 견딜 수 있었을까? 단지 이 땅에서의 일로 여겼다면 그와 같은 영성이 무슨 의미가 있었겠나?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후 5:10).”

 

말씀 앞에서 두려워할 줄 알 때 그 은혜의 풍성하심을 바랄 줄도 안다.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호 6:6).” 그러므로 “너는 이것도 잡으며 저것에서도 네 손을 놓지 아니하는 것이 좋으니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날 것임이니라(전 7:18).” 나는 설교원고를 작성하며 그저 주시는 말씀을 따라 겅중거리는 것이지만, 내게 주신 그 보다 더 큰 은혜가 또 어디 있겠나? 새삼 그리 여겨지는 하루였다.

 

내가 할 수 없는 일에 대하여는 어쩔 수 없는 일일 테고,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대상 16:34).” 그러므로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시 23:6).” 이보다 더 귀한 보배가 또 무엇이겠나? 이제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 14:8).” 하는 말씀 앞에서 나는 안도한다.

 

“오직 주께서 나를 모태에서 나오게 하시고 내 어머니의 젖을 먹을 때에 의지하게 하셨나이다(시 22:9).” 그러므로 “내가 날 때부터 주께 맡긴 바 되었고 모태에서 나올 때부터 주는 나의 하나님이 되셨나이다(10).” 이에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너희여 그를 찬송할지어다 야곱의 모든 자손이여 그에게 영광을 돌릴지어다 너희 이스라엘 모든 자손이여 그를 경외할지어다(23).”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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