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든지 귀가 있거든 들을지어다 사로잡힐 자는 사로잡혀 갈 것이요 칼에 죽을 자는 마땅히 칼에 죽을 것이니 성도들의 인내와 믿음이 여기 있느니라
요한계시록 13:9-10
주께서 나의 슬픔이 변하여 내게 춤이 되게 하시며 나의 베옷을 벗기고 기쁨으로 띠 띠우셨나이다
시편 30:11
때로는 혼자 있다는 게 힘들다. 아이는 복지관에서 소풍을 갔다. 전날에 작성하지 못한 설교 원고 때문에도 점심께 집에 가지 않았다. 오전에 잠깐 옆 노인이 찾아와 차를 같이 했다. 보니 마사지업소가 한 달도 안 돼 영업을 그만두었다. 그렇게 시설만 새로 꾸미더니 부동산에 내놓은 상태라고 했다. 노인은 파주며 포천을 하루에도 몇 번씩 오가며 일을 하였다. 그렇게 텅 빈 공간에 혼자 있었다.
성경을 통독하다보면 늘 그렇듯 레위기에서 막힌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따른 규례와 법규의 책이다. 레위기는 첫 단어인 <와이크라>의 뜻 그대로 ‘그리고 그가 부르셨다(1:1)’는 것이다. 성별과 거룩을 강조하는데 성경학자가 아닌 다음에는 읽기가 어렵다. 그런데 그 가운데 뜬금없고 다소 생소하기까지 한 구절이 들어있었다.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19:18).” 이는 성경의 근간이 되어 예수님도 여러 번 인용하셨다. 읽다보면 ‘그냥 사랑하라는 소리다.’ 사랑해야 하는 그 대상이 사랑스러워서가 아니다. 사랑받게 굴어서도 아니다. 저들은 짜증난다. 정말 싫증나는 대상이다.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고 거짓말을 한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둠에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하지 아니함이거니와(요일 1:6).”
형제를 미워하는 자들이다. 어둠에 있고 눈이 멀었다. “그의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둠에 있고 또 어둠에 행하며 갈 곳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그 어둠이 그의 눈을 멀게 하였음이라(2:11).” 심지어는 마귀의 자녀들이다. “이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드러나나니 무릇 의를 행하지 아니하는 자나 또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니라(3:10).” 저들은 결코 그리스도인을 사랑하지 않는다. 우리를 대적한다.
스스로 속이고,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18).” 돈만 밝힌다. “누가 이 세상의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닫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하겠느냐(17).” 적그리스도와 다름없다. “아이들아 지금은 마지막 때라 적그리스도가 오리라는 말을 너희가 들은 것과 같이 지금도 많은 적그리스도가 일어났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마지막 때인 줄 아노라(18).” 구분이 잘 안 간다. “거짓말하는 자가 누구냐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자가 아니냐 아버지와 아들을 부인하는 그가 적그리스도니(22).”
그런데 레위기에서는 그런 저들에게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19:18).” 이는 명령이다. 할 수 없어도 해야 하는 일이다. 어쩌면 이런 말씀이 훅, 하고 내게 끼치는 덴 다 이유가 있었다. 내가 요즘, 아주 유치하지만 중3 애가 너무 꼴 보기 싫다. 안 왔으면 좋겠다. 그만큼 마음을 기울였으면 길가의 돌도 알아들었을 것이다. 그런 마음과 씨름하는 건 적적으로 나의 싸움이다. 저 애는 알기나 하는지.
그런데 말씀은 나를 입 다물게 하신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요일 3:16).” 목숨은커녕 내가 조금 더 마음 쓰고 신경 썼는데 전혀 달라질 기미가 없고 오히려 엉뚱한 소리로 사람 속을 뒤집어 놓는다고 툴툴거리는 꼴이었으니. 아이에게 싫증이 나는 일이 아니라 나의 됨됨이가 그 정도여서 한심하기만 하다.
난 못하겠어, 저런 앤 딱 질색이야! 했더니 내 속이 더 울렁거린다. 나는 열배 더 못됐고, 백배는 더 미꾸라지처럼 뺀질거렸고, 천배는 더 악하였다. 예수님의 사랑을 묵상하는 일은 민망하다. 사람을 송구하게 만든다. 그래서 불편해진다. 할 말이 없게 만드신다. 날 위해 목숨을 버리신 사랑 앞에 나는 고작, 그래봐야 사춘기 중딩 아이의 고만고만한 얄미움을 미워하는 꼴이었으니.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4:9).” 결국 나는 또 나 혼자 속 끓이다 만다. 나는 여전히 미숙하고 어리석고 나만 알고 서툴고 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촌스러워서, 아내는 대뜸 당신은 남자 애들이랑 잘 어울리는 것 같아! 하는 말로 우회적인 결론을 내렸다. 하긴 앞서서도 초딩 5학년 여자아이들에게 손을 든 형편이라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
그러려니 하고 말면 그만인데 내 안에 이는 이와 같은 불편함은 어떤 이유에서일까?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4:21).” 내가 주를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그 사랑을 이용해서 나의 위로를 삼으려는 정도이지 나를 드릴 마음은 없어서인가. 심지어는 나의 불편함을 주 앞에 아뢰고 주께서 어찌 실력 행사를 좀 해주시기를 바란다. 이르고 고자질하듯 저를 혼내주라고, 주의 사랑을 이용하려 드는 것이다.
어처구니없지만 그래서 요 며칠 마음이 영 좋지가 않다. 자기고집이 보통이 아니고, 말도 안 되는 논리로 자기주장을 일삼는데 더는 짜증이 나서 못하겠다. 그리 돌아서려고 하면 그게 또 나이어서, 내가 딱 그 모양이었는데. 것도 여전하여 어쩌면 또 누군가를 그리 힘들게 하고 속상하게 하는지도. 그러면서 그 애의 그런 모습이 싫은 것이다. 불편하고 답답한 것이다. 피하고 싶고 더는 마주하기도 싫은 것이다.
그러니 이런 마음을 두시는 게 그냥 그러다 말면 그만인 게 아닐 거여서. 나는 오히려 그 애를 통해 나의 고질적인 죄를 마주한다. 내 안에 적그리스도를 발견한다. 어쩌면 그게 불편하고 못 견디게 역겨운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오늘 아침, 말씀 앞에 앉는다. “누구든지 귀가 있거든 들을지어다 사로잡힐 자는 사로잡혀 갈 것이요 칼에 죽을 자는 마땅히 칼에 죽을 것이니 성도들의 인내와 믿음이 여기 있느니라(계 13:9-10).”
이와 같은 어려움이 실상은 그 애 때문이 아니라 나의 본질적인 죄성 때문이다. 여전하여서 그저 하나님의 사랑을 사는 데 도구로 삼고 이용하려 드는 얄팍한 위안의 무게로 삼으려 들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그러면 네 지식으로 그 믿음이 약한 자가 멸망하나니 그는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형제라 이같이 너희가 형제에게 죄를 지어 그 약한 양심을 상하게 하는 것이 곧 그리스도에게 죄를 짓는 것이니라(고전 8:11-12).” 말씀 앞에서 나는 불편하다.
감출 수 없는 마음이 그대로 드러나는 듯하다. 결국 사랑은 참는 일이다. “또 형제들아 너희를 권면하노니 게으른 자들을 권계하며 마음이 약한 자들을 격려하고 힘이 없는 자들을 붙들어 주며 모든 사람에게 오래 참으라(살전 5:14).” 그러니 이게 어디 쉬운 일인가? 내 맘 같지 않아서 나야말로 미움이 가득하게 되는데,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롬 5:6).” 아! “그러므로 피차 권면하고 서로 덕을 세우기를 너희가 하는 것 같이 하라(살전 5:11).”
낮에 끙끙거리며 정리하였던 설교 원고의 성경 말씀들이 고스란히 나를 향해 외치고 있었던 것이다. 나야말로 속되고 어리석다. 깜냥도 안 되는 위인이 선생이고 목사이려니까 이 지경이다. 좀 더 나은 위인을 주의 종으로 삼으시지. 하나님도 참, 그 정도로 모르실까? 나 같은 걸 뭐에 쓰시려고! 그럴 때 내겐 ‘이건 뭐지?’ 하게 되는, 말씀이 곧 ‘만나’였다. “내가 주 예수 안에서 알고 확신하노니 무엇이든지 스스로 속된 것이 없으되 다만 속되게 여기는 그 사람에게는 속되니라(롬 14:14).”
말씀 앞에 나는 두 손을 든다. 이와 같은 갈등과 어려움까지도 우리의 인내와 믿음을 위한 것이라는 말씀으로 다시 읽는다. “누구든지 귀가 있거든 들을지어다 사로잡힐 자는 사로잡혀 갈 것이요 칼에 죽을 자는 마땅히 칼에 죽을 것이니 성도들의 인내와 믿음이 여기 있느니라(계 13:9-10).” 영적인 귀가 있다면 들려야 한다. 눈이 있다면 좀 봐야 한다. 누구 탓이 아니라 내 속에 얼마나 여전한 죄와 허물로 가득한지를. 속상하고 답답하였다. 나로서는 어찌 나를 다룰 수가 없다.
내가 제일 어렵다. 그러자 말씀은 나를 붙드신다. “주께서 나의 슬픔이 변하여 내게 춤이 되게 하시며 나의 베옷을 벗기고 기쁨으로 띠 띠우셨나이다(시 30:11).”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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